기업들 이미 절박..정부, 규제 '시나리오'로 발목잡기 없어야
[세종=뉴스핌] 오승주 기자 ='탄소중립', 이 네 글자가 주는 의미는 크다. 탄소중립의 사전적 의미는 개인과 회사, 단체 등에서 배출한 이산화탄소를 다시 흡수해 실질적인 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 '탄소중립'은 간단한 게 아니다. 산업 전반의 패러다임 전환을 뜻한다. '그깟 이산화탄소 줄이는 게 뭐가 대수인가'라고 단순히 치부할 문제가 아니다.
현재 이산화탄소의 대부분은 우리가 사용하는 에너지에서 나온다. 아직 인류는 석유와 석탄같은 화석연료에 의존한다. 석유와 석탄은 18세기 '산업혁명'을 이끈 원동력이다.
산업혁명은 기술적 진보만 가져온 게 아니다. 기존 질서를 뒤흔든 인류 역사의 전환점이 됐다. 산업 발달에 따른 부르주아 계급 성장과 빈부격차 등이 대두되며 귀족제 중심의 기존 질서를 송두리째 바꿔버린 계기가 됐다. 공산주의 태동도 산업혁명에 따른 신분제 재편의 결과물로 볼 수 있다.
18세기 중반 태동해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250여년간 '산업혁명'이 풍미했다면 21세기는 '탄소중립'으로 대표되는 '탄소혁명'이 세상의 질서를 주도할 태세다. 화석연료의 시대는 가고, 이산화탄소 없는 에너지와 동력원에 집중하는 세상이 오는 것이다.
화석연료 시대의 종말은 많은 것을 얻을수도,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다. 산업에 미치는 영향은 산업혁명을 뛰어넘을 수 있다. 자동차 산업만 보더라도 글로벌 자동차 기업들은 이미 탄소중립에 사활을 걸고 있다.
글로벌 자동차 기업인 GM은 2035년부터 내연기관 자동차 생산 중단은 선언했다. 볼보는 이에 앞선 2030년 내연기관 자동차 생산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현대차그룹도 2040년부터 미국과 유럽 등 주요 시장에서 전기, 수소차만 판매하겠다는 계획이다.
석유를 기반으로 한 화석연료를 동력원으로 삼는 내연기관의 시대가 저무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대세다. 내연기관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은 일자리도 함께 자취를 감춘다는 뜻이다.
내연기관 자동차를 만드는 데 쓰이는 부품은 대략 2만개라고 한다. 2만개를 만드는 부품 공장이 필요없게 되고, 그곳을 일터로 삼는 사람들도 밥벌이를 잃게 된다. 공장 뿐만이 아니다. 공장 인근 식당은 줄어든 노동자들로 매출이 하락하고, 주머니에 돈이 사라진 사람들로 소비가 위축돼 경기는 힘겨운 가시밭길을 걷게 될 것이다.
기계가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고 기계파괴운동(러다이트)을 벌이던 18세기처럼 탄소중립을 거부해도 소용없을지 모른다. 탄소중립은 거부한다고 될 일도 아니다. 전세계적인 흐름을 거스를 수도 없다. 글로벌 시장이 탄소중립화에 박차를 가하는 마당에 구한말 대원군 시절마냥 '우리 식대로 산다'도 통하지 않는다.
자동차 산업뿐 아니라 모든 산업분야에서 탄소중립이 가속화되면서 코로나19 시대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될 수도 있다.
기업들은 알고 있다. 탄소중립 목표를 2050년으로 잡았지만, 아직 30년이라는 세월이 남았다고 느긋하지 않다. 탄소중립으로 대표되는 환경에 사회, 지배구조까지 개선하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가 기업 생존 여부를 결정한다는 점을 깨닫고 발빠르게 움직인다.
기업들이 움직이는 것은 절박함 때문이다. 상품을 만들고 팔려면 탄소중립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화석연료를 대체할 전기, 수소에너지 발굴에 힘을 모으고, 투자에 집중하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절박함이 깔려 있다.
반면 기업에 비해 정부는 다소 느긋해 보인다. '2050 탄소중립'을 대대적으로 외치고 기업들에 대한 지원 강화책을 내놓고 있지만, 정작 구체적인 시나리오는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다.
한국의 탄소중립실현을 위한 정책과 기후변화 대응을 총괄하는 컨트롤타워는 '탄소중립위원회'다. 탄소중립위원회는 산업계·시민사회 등과 소통을 바탕으로 탄소중립추진 전략을 마련하고 이행을 주도한다는 명분으로 국무총리실 산하에 설치됐다.
구성도 짱짱하다. 국무총리와 윤순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가 공동위원장을 맡고, 18개 관계부처 장관과 기후·에너지·산업·노동분야 전문가, 시민사회·청년 등 각계를 대표하는 민간 위원 77명을 포함한 97명의 위원으로 구성됐다. 출범식은 지난 5월 29일 이뤄졌다.
시나리오를 짜는 것은 탄소중립위원회의 몫이다. 10월에 구체적인 안을 내놓는다는 계획이다. 지난 7월1일 발표를 통해, 7월 안에 2050 시나리오안을 마련하고, 8월 산업·노동·청년·시민사회·지자체 등 각계 의견수렴, 9월 국민정책참여단 대국민토론회, 국민 온라인 설문조사 등을 거쳐 10월 국무회의 심의·의결을 마치겠다는 방안이다.
어찌보면 5월에 출범해 10월 5개월 만에 시나리오를 내놓겠다는 점이 스피드있게 보이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세계적 흐름을 고려하면 일각에서는 느긋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래도 5월말 출범한 위원회가 급박한 일정 속에서도 여러 절차를 고려해 10월에 시나리오를 내놓는다는 점은 이해된다. 하지만 내놓을 시나리오가 '탄소중립'이 아니라 정부 입맛에만 치우친 '탄소편향'이 될지 우려스럽다.
원래 '관의 습성'은 규제다. 민간과 관이 공동으로 탄소중립을 위해 머리를 맞댔다고는 하지만 관의 입김에서 자유로울지도 의문이다.
10월에 발표될 시나리오는 '하나마나한 소리'와 '규제만 가득한 소리'로 나열돼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십수장에 가득 적어 넣은 미사여구보다 오히려 '과도한 일탈만 규제하고 기업들의 탄소중립 방향을 적극 지원하면서 노동자와 상생 모색에 힘쓰겠음'이라는 한줄짜리 시나리오로 만들어 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미 기업들은 시나리오없는, 각본없는 전쟁에 돌입한 지 오래다. 차라리 시나리오가 없는 게 나을수도 있겠다. 시나리오가 발목을 잡는다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시나리오다운 시나리오를 기대해 본다.
fair77@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