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구 행운동서 펼쳐지는 한국형 하드보일드 드라마
[서울=뉴스핌] 김선엽 기자 = 까데기. 택배터미널로 대형 화물트럭이 싣고 온 택배 물건을 분류하는 일을 일컫는 속어다. 새벽부터 시작해 오전 11시 무렵 끝이 난다.
"레일 시작점에 간선차를 대고 둘이나 셋 정도가 차로 올라가 물건을 빼서 레일 위에 놓는다. 그러면 레일 양쪽으로 탑차를 대고 택배 기사들이 자기 짐을 구분해 내린다"(소설 '침입자들' 중)
정혁용 작가의 신간 소설 '침입자들'은 마흔 다섯 살의 택배기사 행운동(그의 배달구역이 서울 관악구 행운동이다. 택배기사들끼리는 통상 이렇게 서로를 부른다)의 눈으로 바라본 택배 수신인과 동료 택배기사 이야기다.
오전 까데기를 마친 행운동은 밤 8시 정도까지 배달을 하는데 시간당 20개 정도를 돌린다. 잠은 터미널 한 켠 컨테이너에서 잔다. 이른바 '숙소제공'.
쉬는 날이면 소주를 홀짝거리며 온갖 소설을 독파하는 것이 주인공의 취미다. 어쩌다 보니 그의 성적 취향과 무관하게 허름한 상가 5층의 게이바에서 가끔 한 잔 하기도 한다. 휘발유 냄새가 나는 잭다니엘은 가능하면 피하는 편.
'이 일은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결국 아무도 만나지 않는 일' 주인공이 말하는 택배의 매력이다. 그럼에도 한 동네를 몇 달 씩 돌다 보면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고 만나고 싶지 않아도 마주치는 이들이 있다.
현장 르포처럼 시작한 소설은 주인공과 낯선 주변인과의 만남이 점점 엮이면서 가벼운 옴니버스 영화처럼 흘러간다. 고맙게도 시즌 1로 마무리되는 미드라고나 할까.
매일 같은 벤치에 앉아 주인공에게 담배를 빌려 피는 서른 중반의 여자는 "전 당신을 죽이려고 했어요"라며 다가와 이상한 데이트를 제안한다.
일흔을 훌쩍 넘은, 치매기가 있어 보이는 전직 유명 경제학과 교수는 그에게 애덤 스미스를 공부하자며 집으로 그를 끌고 간다.
폐지 줍는 서른 초반 여성 '마스크'는 곤궁에서 구해준 주인공에게 "꼴에 남자라고'라며 독설을 서슴지 않는다.
뜬금없이 검은 양복 경호원들을 대동한 회장님이 납시는가 하면, 주인공이 지하실 철제의자에 묶여 투피스 여성과 달콤살벌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귀여운 '하드보일드'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한국사회 온갖 군상들이 주인공의 일상에 '침입'한다. 주인공은 대체로 그들에게 무뚝뚝한 얼굴로 툴툴대며 말대꾸를 하는데 그가 퉁명스러울수록 그 주변에는 질척거리는 이들이 늘어난다. 그래서 그는 점점 불편해 어쩔 줄 모르고 보는 독자는 키득거린다.
김선엽 기자 sunup@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