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김은빈 기자 = 나루히토 덴노(徳仁天皇·일왕)가 22일 즉위 의식 '소쿠이레이 세이덴노 기(即位礼正殿の儀)'를 통해 자국 내외에 즉위 사실을 선언했다.
아사히신문은 "이번 의식은 참가자에 대한 배려가 더해졌지만 헤이세이(平成·1989~2019)시대의 전례를 그대로 답습했다"며 "정교분리 등 헌법 상의 의문점이 장래 과제로 남았다"고 지적했다.
[도쿄 로이터=뉴스핌] 오영상 전문기자 = 22일 나루히토(德仁) 일왕이 고쿄(皇居)의 규덴(宮殿)에서 거행된 즉위 의식 '소쿠이레이 세이덴노 기(即位礼正殿の儀)'를 치르고 있다. 2019.10.22 |
즉위 의식은 22일 오후 1시를 넘긴 시각 일본 황거(皇居) 내 마쓰노마(松の間)에서 진행됐다. 나루히토 덴노가 즉위를 선언하는 '오코토바'(おことば·말씀)를 말한 뒤 아베 신조(安倍晋三)일본 총리가 국민 대표로 '요고토'(寿詞)라 불리는 낭독문을 읽었다.
아베 총리는 "즉위를 축하드리며 덴노 각하 만세"라고 선창하고 중·참의원 의장들이 따라 만세를 외쳤다. 이후 육상자위대가 축보 21발을 쐈다.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나루히토 덴노는 왕좌인 '다카미쿠라'(高御座)에 서있었으며, 주권자인 국민을 대표하는 총리들은 다카미쿠라보다 1.3m낮은 마쓰노마 바닥에 서서 덴노를 바라봤다. 다카미쿠라 안에는 덴노를 상징하는 '삼종신기'도 놓여있었다.
문제는 이날 치뤄진 의식이 헌법이 정한 '덴노의 국가행위'로서 진행됐다는 점이다. 삼종신기는 일본 고유 종교 신토의 '천손강림'(天孫降臨) 신화를 상징하는 물품이다. 신토에선 최고신 아마테라스오오카미(天照大神)가 손자인 니니기노미코토(瓊瓊杵尊)에게 삼종신기를 주어 지상으로 내려보냈다고 설명한다. 일본 왕실은 이 니니기노미코토의 직계 후손으로 여겨진다.
종교성이 짙은 상징품과 함께 의식이 진행됐다는 점은 정교분리 논란을 불러온다. 현행 헌법 하에서 처음으로 진행됐던 아키히토(昭仁) 상황(上皇)의 덴노 즉위 당시, 일본 정부는 다카미쿠라와 삼종신기에 대해 "황위(왕위)와 밀접하게 연관된 옛스러운 세간품"이라 정의하며 정교분리 원칙에 반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일본 정부는 2018년 4월 아키히토 상황 즉위 의식이 "현행 헌법 하에서 충분히 검토가 진행된 상태에서 거행했다"며 전례 답습을 결정했다. '세이덴노 기'에 각 지자체 지사들의 참석은 정교분리에 위반하지 않는다고 판시한 최고재판소 판결을 근거로 했다.
한 정부 관계자는 아사히신문 취재에 "전례를 수정할 경우 직전 의식에 헌법 상 문제가 있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라고 답습 결정이 내려질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키히토 상황의 의식에서도 위헌성 논란은 여전했다. 즉위 의식에 국비 지출을 하지 말아달라는 소송에 대해 오사카(大阪)고등재판소는 1995년 원고의 신청을 기각하면서도 "정교분리 규정에 위반할 수 있다는 의문점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또한 "국민을 주권자로 하는 현 헌법의 취지에 맞지 않다고 여겨질 점이 존재한다"고도 언급했다.
이번 즉위 의식에 대해 정부 측에 수정을 요구했던 공산당은 "헌법에 따르는 형태가 아니다"라며 불참을 선언했다. 일부 시민들도 반대의사를 표출했다. 이날 도쿄 긴자(銀座) 부근에서는 덴노제에 반대하는 시위가 진행돼 수백명이 행진을 하기도 했다.
다카미 가쓰토시(高見勝利) 조치(上智)대학 명예교수는 "전쟁 후 새로운 헌법 하에서 즉위 의식의 자세한 내용을 결정하는 정령 등은 규정되지 않아 법적인 공백이 만들어졌다"며 "애매한 정부해석으로 전쟁 전까지의 의식의 골격을 따라왔는데, 주권자가 국민이 아니라 덴노인 것 같은 의식의 형태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도쿄 지지통신=뉴스핌] 오영상 전문기자 = 22일 고쿄(皇居)의 규덴(宮殿)에서 나루히토(德仁) 일왕의 즉위를 축하하는 궁정 연회가 열렸다. 2019.10.22 |
◆ 검소화·전통 복원…다양한 모습 보인 즉위 의식
이번 즉위 의식은 직전 아키히토 상황의 즉위식과 비교해 일부 간소화되는 등 수정된 면이 있다. 시대 변화나 마사코(雅子)왕비의 적응장애 등이 고려요소였다.
가장 크게 바뀐 점은 국내외 손님들을 대접하는 '교엔노기'(饗宴の儀)의 형태였다. 아키히토 상황 당시에는 국내외로 3400명을 초대해 총 7번의 연회를 열었지만, 이번에는 4회로 축소했다. 이 중 2번은 입식 형태로 바뀌었다.
또한 고령의 왕족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전통의상 외에도 양장 참석도 가능하도록 했다. 80대인 마사히토(正仁) 친왕의 경우 연미복 복장으로 휠체어에 앉아 참석했다.
비용 문제로 초대자 수를 줄이는 방안도 고려됐지만 실현되진 않았다. 국교를 맺은 국가의 수가 직전보다 30개국 가까이 늘어난 점과 역대 문화훈장 수상자 수가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다만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배우자 동반은 하지 않도록 해 규모를 자제했다.
전통을 복구한 면도 있었다. 아키히토 상황 부부는 덴노 즉위 의식 당시, 복도를 통해 의식이 진행되는 마쓰노마에 모습을 드러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카미쿠라와 왕비가 서있는 미쵸다이(御帳台)의 장막이 걷힐 때까지 덴노 부부의 모습이 외부에 보이지 않도록 변경됐다.
궁내청은 9세기의 의식에 덴노의 모습은 다카미쿠라 위에서 처음 드러내야 한다는 기재가 있었다며 "전통에 따른 형태가 됐다"고 설명했다.
나카지마 미치오(中島三千男) 카나가와대학교 명예교수는 "신불(神仏)이 모습을 드러내는 형태가 됐다"며 "덴노의 신비와, 권위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봤다.
kebjun@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