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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자의 IN서울]도심 한복판 ‘생리대 자판기’, 세상밖으로 나온 ‘월경권’

기사입력 : 2019년06월27일 05:00

최종수정 : 2019년06월27일 10:39

공공 생리대 지원 정책, 유엔 공공행정상 수상
저소득층 지원 이어 비상용 자판기 공공기관 확대
여성 정책 아닌 불특정 다수 위한 공공정책 안착
월경권 논의 활발, ‘젠더’에 따른 정책 접근 필요

[편집자주] 대한민국의 ‘심장’ 서울. 서울시는 이제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대도시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인구 1000만을 위한 수많은 주택·경제·교통·환경·복지·안전·문화·행정 정책들이 숨쉬고 있습니다. 뉴스핌이 [IN서울]로 그 정책들을 향해 한발 더 다가섭니다. 생생한 현장과 심도있는 진단으로 서울시 정책의 민낯을 전달합니다.

[서울=뉴스핌] 정광연 기자 = 혹시 ‘월경권’과 생리, 그리고 생리대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시나요.

올해 볼혹에 갓접어든 40대 유부남인 기자는 솔직히 몰랐습니다. 중학교 성교육 수업에서 처음으로 생리대를 만져본 후 10년쯤 지나 여대 행사에 두 번째로 조우한 기자에게 생리와 생리대는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관심도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생리는 여자의 문제라는 생각으로 살아온 40년. 그 생각이 깨진건 순전히 이번 취재 때문입니다.

시작은 지난 5월말 받은 서울시의 보도자료. 2016년부터 시작한 ‘공공 생리대 지원 정책’으로 올해 유엔에서 공공정책상을 받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게 뭔데 유엔에서 상을 받지?’라는 생각에 시작된 마우스는 돈이 없어서 신발 깔창으로 생리대를 대신하는 여학생에 대한 이야기에서 오랫동안 멈췄습니다.

서울시 공공생리대 정책의 시작은 2016년. 이렇듯 생리대 살 돈조차 없어 고통받는 저소득층 여성 청소년들의 ‘건강권’ 보호를 위한 무료 생리대 지원이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10월에는 미처 생리대를 준비하지 못한 여성들을 위해 공공기관 11곳에 무료 비상용 생리대 자판기를 설치하는 사업도 도입했습니다. 이 자판기는 올해 6월부터 160곳으로 확대 운영을 시작했습니다.

공공 생리대 지원 사업에 대한 기대감은 큽니다. 단순한 여성용품 지원 사업을 넘어 이른바 ‘월경권’에 대한 논의와 함께, 맞춤형으로 인식됐던 여성 정책이 불특정 다수를 위한 ‘공공행정’으로 정착하는 모범적 사례가 될 가능성이 엿보이기 때문입니다.

시행 4년, 유엔 공공행정상 수상을 계기로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는 서울시 공공 생리대 지원 정책 현장을 찾았습니다.

◆비상용 ‘무료’ 생리대 자판기, ‘건강권’을 이야기하다

우선 체험을 위해 비상용 생리대 자판기가 설치된 공공기관을 직접 방문했습니다. 160곳에 달하는 공공기관은 ‘스마트서울맵’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서울시청 인근에는 서울도서관과 서울시립미술관에 설치된 상태입니다.

비상용 생리대 자판기는 무료입니다. 그냥 레버만 돌리면 되는 방식과 안내데스크에 마련된 무료 코인을 넣고 사용하는 두 가지 모델을 공공기관에서 선택해 설치합니다. 자판기는 여자 화장실 안에 있습니다. 외부에 설치할 경우 다른 사람(특히 남자)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울=뉴스핌] 최유리 기자 = 서울도서관에 설치된 비상용 생리대 자판기(왼쪽)와 사용모습. 2019. 06. 20. yrchoi@newspim.com

체험을 위해 방문한 서울도서관에서는 하루 평균 5~10명 정도가 비상용 자판기를 이용한다는 설명입니다. 주말(토요일)에는 1.5배 가량 사용자가 늘어난다고 합니다. 서울도서관 자판기는 코인형. 혹시 모를 사용자들의 부담을 위해 담당 공무원과 마주칠일 없도록 무인 코인통을 따로 마련한 ‘배려’가 눈에 띄었습니다.

기자는 남자(40대 유부남)입니다. 그래서 부득이 여성들의 의견을 물어본바, 대다수 여성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브랜드의 제품을 이용할 수 있어 거부감이 적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반면 비상용 생리대 자판기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는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비상용이지만 급할 때는 편의점이 훨씬 더 찾기 쉽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다양한 평가가 엇갈렸지만, 그동안 적극적인 논의가 많지 않았던 생리(대)에 대해 정책적인 접근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 공감을 나타냈습니다.

◆“생리는 개인이 아닌 ‘우리’의 이야기, 사회적 논의 필요”

2016년부터 공공 생리대 지원 정책을 이어오고 있는 서울시. 과연 이 정책은 어디에서 시작됐고 중장기적 목표는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뉴스핌과 만난 김순희 여성가족정책실 여성권익담당관은 “비상용 생리대 비치 사업은 시민의견에서 시작된 정책”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서울=뉴스핌] 이형석 기자 = 김순희 서울시 여성권익담당관 2019.06.19 leehs@newspim.com

서울시에 따르면 2018년 6월 ‘민주주의 서울’에 ‘공공기관 화장실에 비상용 생리대를 비치하면 어떨까요?’라는 제안이 올라왔고 이 의견은 한달 동안의 투표기간 동안 찬성 92%(1350명), 반대 7%(109명)이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습니다.

시민제안을 정책에 적극 반영한다는 서울시 방침에 따라, 공공 생리대 정책은 같은해 10월부터 올해 1월까지 시범사업을 진행했으며 사용자 만족도 조사에서 4.42점(5점 만점)을 기록, 6월부터 160여개 기관으로 확대됐습니다.

김 담당관은 “생리대는 그동안 개인의 ‘영역’이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최근에는 건강이나 안정성 등과 연결되며 사회적 아젠다로 논의되고 있다. 이번 유엔 공공정책상 수상은 서울시의 공공 생리대 지원정책이 여성 ‘특혜’가 아닌 인류의 절반을 위해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행정 서비스라는 것을 인정 받았다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160곳의 공공기관은 △청소년시설 54곳 △도서관 18곳 △복지관 42곳 △박물관 9곳 △여성기관 37곳 등입니다. 서울시가 가장 큰 신경을 쓴 곳은 생리대의 ‘안정성’입니다. 누구나 ‘건강’하고 ‘안전’하게 생리를 마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 정책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김 담당관은 “더 많은 공공기관과 협의해 생리대 자판기를 200개 이상까지 늘릴 계획이다. 시민들의 반응 등을 감안해 나중에는 여성 청소년 시설이나 화장실 등도 염두에 두고 있다. 민간기업들의 동참까지 이어진다면 많은 여성들이 편리하게 생리대를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기대한다”고 밝혔습니다.

◆“모두가 안전하고 건강하게”, 세상밖으로 나온 월경권

공공 생리대 지원 정책이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최근 활발히 논의되는 ‘월경권(생리권)’과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안전하고 건강하게 월경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하는 월경권은 2017년 생리대 유해성 논란을 계기로 수면위로 떠올랐습니다. 변변한 선택권도 없이 안전하지도, 저렴하지도 않은 일회용 생리대 사용을 ‘강제’받고 있는 구조적 문제에 대한 위기의식이 월경권의 시작이라는 게 업계 시각입니다.

생리대 진열대 <뉴스핌DB>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월경은 선택할 수 없는, 인류의 절반인 여자로 태어나면 대부분 겪어야 하는 현상이지만 그동안은 개인의 문제, 심지어는 ‘감춰야 할 일’로 여겨져 제대로 된 논의가 없었다”며 “월경권은 여성들에게 기본권과도 같다. 이 부분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뤄지는 건 매우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말했습니다.

서울시 공공 생리대 지원 정책이 유엔의 인정을 받은 건 월경권과 연결된 성평등에 대한 지점일지도 모릅니다. 유엔은 2015년 9월 총회에서 193개국 정상들이 서명한 17개의 지속가능개발목표에 ‘젠더 평등(Gemder Equality)'을 포함했습니다.

함 교수의 말처럼 생리는 인류 절반인 여성이, 자신의 선택권이 아닌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수없이 겪어야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안전하고 자유롭게 생리를 할 수 있는 월경권은 또 다른 ‘인권’일지도 모릅니다. 서울시가 공공 생리대 지원 정책을 ‘기본권’와 연결시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넘어야 할 ‘편견’, ‘젠더 정책'을 향한 기대감 

지금도 포털 사이트 베너를 누르면 생리대가 없어서 고통받는 청소년들의 사연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한달에 필요한 생리대는 평균 40장 정도며 비용은 1만2000원 수준이라고 합니다.

누군가가 월 1만2000원이 없어서 고통을 겪어야 한다면, 그들을 지원하는 정책이 필요한 건 당연한게 아닐까요. ‘생리’라는 단어에서 편견을 뺀다면 이 정책은 ‘공공’이라는 정체성을 확보하는 데 무리가 없다는 게 서울시의 판단입니다.

유엔이 선정한 17개 '지속가능개발목표(SDGs)' 리스트. '인류의 절반인 여성'에 관한 목표인 '5. GENDER EQUALITY'가 보인다. [출처=KOICA]

반면 공공 생리대 지원 정책에 대한 날선 반응도 있었습니다. 내가 낸 세금으로 왜 여자만을 위한 지원을 하냐는 반발이 대표적입니다. ‘그것’까지 나라가 도와줘야 하냐는 댓글도 보였습니다. 월경권에 대한 논의가 최근 활발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성’과 ‘생리’라는 두 단어에 대한 편견은 여전히 견고한 듯 보였습니다.

사물인터넷(IoT) 생리컵 스타트업 룬랩의 황룡 대표는 “남자가 생리컵 개발에 뛰어들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많은 악플에 시달렸고 보수적인 벤처캐피탈(VC)들은 투자조차 꺼렸다”며 “불편하고 어색하고 낮설다는 이유로 거부감은 나타내는 사람들이 많더라. 결국 이들의 편견을 어떻게 무너뜨리느냐가 생리와 월경권을 둘러싼 다양한 대화와 접근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편견을 깨는 건 대화와 이해라는 지적입니다.

서울시는 올해 성과를 분석한 후 공공 생리대 지원 사업의 확대 여부를 결정한다는 계획입니다. 과연 이 정책이 여성들을 위한 맞춤형 지원 사업을 넘어 월경권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확대하고 나아서 ‘젠더 공공 정책’이라는 새로운 모델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서울시의 시도가 과연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관심이 모아집니다.

peterbreak22@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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