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지락필락(知樂弼樂)'은 '아는 즐거움이 세상을 돕는 즐거움'이라는 뜻의 조어입니다. 좁게는 우리 주변, 넓게는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현상을 들여다봅니다.
일반적으로 ‘내쇼날 트러스트(National Trust, NT)’로 잘 알려진 ‘역사적인 관심사 또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위한 국가 신탁(The National Trust for Places of Historic Interest or Natural Beauty)’은 잉글랜드와 웨일즈 및 북아일랜드의 환경, 유산 보존을 위한 독립적인 자선단체이자 회원 조직이다. 스코틀랜드는 독립적 활동을 하는 별도의 ‘스코틀랜드 내셔널 트러스트’가 있다.
이 조직의 목적은 간단하다. 역사적인 장소와 공간을 영원히, 모든 사람을 위해 보존하고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전개한다. 그것이 건물이든, 호수이든, 산림이든, 바닷가이든 상관없이 역사적인 장소 혹은 공간은 특정인의 전유물이 될 수 없고 시민들 모두 함께 즐기고 공유해야 한다는 이념을 반영하고 있다.
사적 소유제에서 보전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해당 자연문화유산을 ‘공적 소유’나 ‘공적 사용’의 상태로 전환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이 이러한 운동이 출현하게 된 배경이다. 1895년에 설립돼 지금은 직원 1만2000명에 봉사자가 6만명이 넘는 거대조직이 됐다.
NT는 1907년 ‘국가 신탁법(National Trust Act 1907)’에 의해 법적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 권한의 특징은 ‘토지의 양도불능 원칙’이다. 일단 NT 항목으로 지정되면 의회에서 1/3 이상의 동의를 얻지 않는 한, NT 의사에 반해 해당 자산을 매도하거나 담보로 설정할 수 없고 강제 수용도 못한다. 이 원칙은 NT에 법적 권한과 의무를 부여한다는 단순한 의미 이외에, 보전돼야 할 시민유산의 항구성과 불변성을 천명한 것이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법률을 만들려한다면 ‘좌파 사회주의적 발상이다’ 또는 ‘빨갱이 정책 아니냐’ 등 비난이 쏟아질 것이 자명한데, 영국은 이런 제도를 이미 백 년 전부터 시행해오고 있다.
그런데 절묘하게도‘국가 신탁법’은 대저택이나 대지를 소유한 특권층과 자연문화유산 보호론자들을 모두 돕는 상생의 방안이 됐다. 2차대전 이후 상속세가 80%에 달하면서 이를 견디지 못한 대저택과 땅 소유주들이 그들 자산을 NT에 유산으로 남기거나 헌납하는 붐이 인 것이다. 이렇게 할 경우 전 소유주들은 세금을 내지 않고 그들의 집에 계속 거주하면서 NT로부터 일정한 관리비까지 지원받을 수 있다. 그 대신 시민들에게 이를 정기적으로 개방하고, 보존관리를 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지난 2000년 1월 환경부 산하에 사단법인 ‘내셔널트러스트운동’이 결성됐고, 이후 명칭을 ‘한국 내셔널 트러스트’로 변경했다. 이들의 활동이 결실을 맺은 시민 자연유산 1호는 멸종위기 식물 매화마름 군락지인 인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의 농지 매입이다. 또한 시민 문화유산 1호로서는 서울시 성북구에 소재한 전통한옥으로 국립박물관장을 역임했던 고 최순우 고택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내셔널트러스트 활동에 매우 많은 제약이 있다. 생태계보전지역을 지정하려 해도 주민 반발로 실패한 사례가 부지기수다.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이 전국에 산재하지만, 이 중 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생태계보존지역으로 지정되지 않은 자연환경이나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문화유산들이 소리 없이 훼손돼 사라져 가고 있다.
무엇보다 큰 제약은 영국처럼 특별법에 의한 권한을 부여받지 못한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토지를 수용하여 개발할 수 있는 권리를 정부나 공공기관이 갖고 있기 때문에 자연문화유산 대상지가 언제든지 수용돼 개발될 가능성이 많다. 최근 제주도 비자나무 숲 훼손 사태가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또한 기부문화가 정착되지도 않았고, 보유세나 증여·상속세가 여전히 매우 낮기 때문에 자기 소유의 건물이나 토지를 기증받는다는 일 자체를 거의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경우는 민간보다 정부가 각성해야만 자연문화유산 보존 운동이 성과를 거둘 가능성이 높다.
자연 생태계는 특정인이 아닌 시민 모두가 향유하는 자산이 돼야 한다. 사진은 비엣남 다낭의 한 해변 |
지난 6일 비엣남(베트남) 중남부 빈딘성 정부가 해변 가까이 자리 잡아 경관을 가리는 호텔 세 곳을 철거해 이전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보도됐다. 이들 호텔은 길이가 수 ㎞나 되는 유명한 초승달 모양의 모래 해변 바로 앞에 자리 잡고 있기에, 해변의 아름다움을 복원하고 시민들을 위한 공간 확보를 위해 철거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빈딘성 의회의 의장은 “해변과 연안 지역은 지역사회의 것이며, 일부 다른 해안 도시들처럼 그곳을 빌딩과 건축물로 가득 메우는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우리는 이런 정책을 실천에 옮기는 지자체와 이를 적극 지지하는 의회 의장의 발언을 언제쯤이나 돼야 들을 수 있을까.
지난해 4월 필리핀은 유명 관광지 보라카이 섬을 6개월이나 강제 폐쇄하고 환경정화와 복구 활동을 전개했다. 폐수가 그대로 바다에 흘러들어가고 쓰레기가 넘쳐나는 등 심각한 환경오염 문제가 대두됐기 때문이었다. 이 기간은 관광 성수기였지만, 환경을 되살리겠다는 드테르테 대통령의 의지가 관철됐다.
보라카이 섬은 다시 문을 열었지만, 한 번에 수용할 여행객을 최대 1만9200명으로 제한했다. 해변에서의 음주, 흡연, 파티 등도 금지됐다. 환경법을 어긴 호텔과 레스토랑 수백 곳도 폐쇄 명령을 받았다. 그 결과 너무 쾌적한 청정 그대로의 보라카이 해변이 되살아난 것은 물론이다.
지난 10일 홍보차 서울을 방문한 필리핀 관광부 장관은 “재개장한 보라카이는 지속가능한 관광을 위해 국가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좋은 본보기”라며 “보라카이의 성공 사례를 보홀, 팔라완 등 다른 유명 관광지에도 적용해 지속가능한 관광의 좋은 모델을 만들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공무원들이여, 필리핀과 비엣남에서 배워라. 우리보다 국민소득이 떨어지는 개발도상국가의 정책을 본받으라고 해서 발끈할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환경정책은 이미 우리를 앞서가고 있다. 우리 후손들이 살아야가 할 생태계를 보호하고 보전하기는커녕 개발이익에 눈멀어 훼손에 앞장서는 공무원이 돼서야 쓰겠는가.
작가 겸 문화탐사 저널리스트. 전 동아일보 기자, <주간동아> 편집장. <유럽 도자기 여행> 시리즈, <펍, 영국의 스토리를 마시다> 등 다수 저서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