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 사상 첫 덴노 생전 퇴위에
'일본고전 인용' 가능성 높아 관심 고조
[서울=뉴스핌] 김은빈 기자 = 31년을 이어온 일본의 헤이세이(平成) 시대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난다. 아키히토 덴노(昭仁天皇·일왕)가 오는 4월 30일 생전 퇴위함에 따라 연호도 함께 개정하기 때문이다.
1일 아사히신문과 마이니치신문 등 일본 언론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이날 오전 11시 30분 새로운 연호를 발표한다. 정오가 지나서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기자회견을 열고 연호의 의미 등을 담화 형태로 발표한다. 채택되는 연호는 645년 일본의 첫 연호 '다이카(大化)' 이래 248번째가 된다.
일본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연호를 사용하는 국가다. 서력만 사용하는 한국인에게는 생소하지만, 일본인에게는 서력만큼이나 널리 사용되는 제도다. 연호는 각종 공문서나 증명서, 화폐, 달력 등 일상생활에서 서력과 함께 기재되거나 단독으로 쓰이곤 한다.
때문에 연호 변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행사가 된다. 특히 이번 연호는 이례적인 '생전퇴위'로 인한 것인데다, 처음으로 '일본 고전'에서 인용될 가능성이 제기된 만큼 여느 때보다 관심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1989년 당시 연호 헤이세이(平成)를 발표하는 오부치 게이조(小渕恵三) 당시 관방장관 [사진=로이터 뉴스핌] |
◆ '전통과 권위'의 중국 고서 vs '최초 인용' 일본 고전
일본의 연호 선정과 관련해선 △국민의 이상에 맞는 좋은 의미를 가질 것 △한자 두 글자일 것 △쓰기 쉬울 것 △읽기 쉬울 것 △이제까지 연호 또는 시호로 사용된 적이 없을 것 △세간에서 사용되는 것이 아닐 것 등 총 6개의 유의사항이 있다. 일본 정부는 추가로 몇 개의 조건을 더해 연호를 선정한다.
여기서 '좋은 의미'라는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연호에는 '출전'이 존재한다. 연호의 출전을 밝히기 시작한 10세기부터 일본의 연호는 모두 중국 고전에서 인용됐다.
마이니치신문에 따르면 인용횟수가 가장 많은 건 '오경'(五經)이라 불리는 중국 고전이다. 오경은 △시경 △서경 △역경 △춘추 △예기를 말한다. 이 중 연호의 출전으로 가장 많았던 건 '서경'으로 총 36회다. 역경도 27회로 많은 횟수를 자랑하며, 시경 역시 15회 인용됐다.
현재의 연호인 헤이세이도 서경 대우모(大禹謨)의 '地平天成'(땅이 다스려져 하늘 일이 이루어진다)와 사기 오제본기(五帝本紀)의 '内平外成'(안이 다스려져 바깥 일이 이루어진다)에서 유래됐다. 근대 이후 연호를 살펴보면 메이지(明治)와 다이쇼(大正)가 역경, 쇼와(昭和)가 서경에서 인용됐다.
이처럼 출전이 한정된 데다 좋은 의미를 골라 2글자로 인용하다보니, 과거 채택과정에서 '탈락'을 겪은 연호들도 적지 않다. 헤이세이는 과거 두 차례 후보안으로 제출된 적이 있으며, 다이쇼(5번)와 메이지(11번)도 여러차례 후보 리스트에 오른 끝에 연호로 채택됐다.
다만 이번 연호 선정 과정과 관련해선 일본 고전에 대한 기대감이 보수층을 중심으로 높아지고 있다. 아베 내각이 보수성격이 짙은 만큼 일본의 색채가 짙은 연호를 채택할 수 있다는 시각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아베 내각은 일본 고전 전문가에게도 후보안 제출을 의뢰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이니치신문은 "이번에 처음으로 일본고전이 인용될 있을지 '화제성'이 주목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황거(皇居)에서 열린 새해 축하 행사에서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일본의 로열패밀리. 왼쪽부터 마사코(雅子) 왕세자비, 나루히토(德仁) 왕세자, 아키히토(明仁) 덴노, 미치코(美智子) 왕비, 후미히토(文仁) 왕자. [사진=로이터 뉴스핌] |
◆ 헤이세이 첫날부터 준비한 '포스트 헤이세이'
일본 언론에 따르면 연호는 연호 선정 절차는 이날 오전 9시 반부터 40분간 총리관저 4층 특별응접실에서 열리는 '연호에 관한 간담회'부터 시작된다. 각계 대표와 전문가로 이뤄진 간담회에서 5개 이상의 연호 후보가 제시돼, 전문가들이 의견을 낸다.
10시 20분 경부터는 중의원(하원)과 참의원(상원) 각각 의장·부의장의 의견을 중의원 의장 공저에서 청취한다. 이후 총리관저 4층 각료응접실에서 열리는 '전각료회의'에서 협의한 뒤, 임시 각료회의에서 연호를 바꾸는 정령을 결정한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에 따른 새 연호 발표는 오전 11시 30분이며, 정오가 지나선 아베 총리가 기자회견을 열고 새 연호에 담긴 의의 등을 담화로 발표한다.
하지만 이는 공식적인 선정 절차일 뿐, 일본 정부가 연호 선정을 위해 '준비'를 시작한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89년 1월 8일이다. 이 날은 헤이세이 연호가 시작된 첫 날이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연호 준비작업의 첫 단계는 우선 연호 후보를 모으는 것이다. 연호 후보는 일본 정부가 1979년 정한 '연호 선정 요령'에 따라 작성된다. 요령에 따르면 일본 총리는 △높은 식견을 가진 △약간 명에게 △2~5개의 연호 후보 제출을 요청해 연호 후보를 마련한다.
쇼와(昭和·1926~1989)에서 헤이세이로 연호를 바꿀 당시 준비 실무를 담당했던 마토바 준조(的場順三) 전 내각내정심의실장은 '높은 식견을 지닌 인물'의 기준으로 △한문학자나 동양사학자 혹은 국문학자 △일본학사원 회원 △문화훈장 수훈자 또는 문화공로자 △그 밖에 해당 분야에서 저명한 공적을 세운 자라고 밝혔다.
마토바 전 심의실장은 "그 밖에도 출신 대학을 도쿄(東京)대학뿐만 아니라 교토(京都)대학 등 서일본 지역의 대학을 포함시켜 고르게 선정하는 것에도 주의한다"고 말했다.
총리의 의뢰를 받은 이들은 앞서 밝힌 연호 선정 유의사항에 따라 연호 후보를 고안한 뒤, 연호의 의미와 출전을 함께 제출한다. 의뢰를 받은 이들은 1인당 복수의 연호를 제출한다.
다만 제출받은 후보안이 그대로 고정되는 것은 아니다. 일본 정부 관계자는 "후보안은 필요에 따라 더해지거나 바뀌기도 한다"며 "의뢰를 한 학자에게도 1년에 한 번씩 생각에 변함이 없는지 확인한다"고 밝혔다. 다만 연호 제출자가 사망한 경우, '사망한 자의 후보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에 따라 제외한다.
2월 24일 일본 도쿄 국립극장에서 열린 '재위 30주년 기념행사'에서 나루히토(德仁) 왕세자 부부의 인사를 받고 있는 아키히토(明仁) 덴노 부부. 아키히토 덴노는 4월 30일 퇴위하고, 나루히토 왕세자가 5월 1일 일왕에 즉위한다. [사진=로이터 뉴스핌] |
◆ 사용 여부·출전·이니셜까지…"고려할 게 너무 많아"
하지만 자격 요건을 만족시켰다고 연호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연호 업무를 담당했던 관계자들에 따르면 가장 고된 업무는 연호 리스트를 '꾸준히 체크하는 것'이다. 연호의 6개 조건 중 '여태까지 사용되지 않은 단어'라는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다.
헤이세이로 연호가 바뀌었을 때도 뜻밖의 불상사가 발생한 적이 있다. 헤이세이로 새 연호가 발표된 뒤, '平成'라고 쓰고 '헤나리'라고 읽는 지명이 기후(岐阜)현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것이다. 해당 마을은 1991년 '일본 헤이세이무라(平成村)'로 지명을 바꿨고, 이후 관광객들이 모이는 명소가 됐다.
담당자들은 이런 일을 피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리스트에 적힌 연호 후보들이 지명이나 기업명 등 고유명사로 사용되는 일이 없는지 확인한다.
앞서 밝힌 출전도 중요하다. 헤이세이의 경우 인용 출전이 두 군데였는데, 이 중 서경의 인용부분인 대우모(大禹謨)의 '地平天成'가 청나라 고증학자들의 연구로 위서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연호 결정 시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해당 문구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伝)에도 있었기에 당시 저명한 한학자는 "어째서 거기서 인용했냐"며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원전 인용을 바꿔야 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출전의 문제를 안고 있던 헤이세이가 어째서 연호로 결정된 것일까. 이는 1989년 1월 7일 헤이세이 연호를 결정했던 '연호 간담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헤이세이의 출전 문제 뿐만 아니라, 음독 4글자라는 점을 문제삼는 참가자도 있었다. 국민들이 편히 사용하기 어렵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최근 연호가 메이지(明治), 다이쇼(大正), 쇼와(昭和)로 이니셜이 M, T, S라서 새로운 연호는 이니셜이 겹치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의견이 나오면서 결국 헤이세이로 의견이 모였다.
일본 사람들은 연도를 표기할 때 M2, S17 등 연호의 알파벳 초성을 숫자와 함께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구별을 위해선 헤이세이가 낫다는 뜻이었다. 당시 간담회에 올라온 연호 최종 후보는 3개로, H로 시작하는 헤이세이와 S로 시작하는 슈분(修文), 세이카(正化)가 있었다.
이처럼 고려할 게 많은 데다 '비밀 중의 비밀'로 취급되다 보니 연호 담당자들의 스트레스도 막중하다. 과거 실무를 담당했던 관계자는 "어디 가서 상의를 할 수도 없다 보니 심리적인 부담이 상당했다"고 말했다.
나루히토(德仁) 일본 왕세자와 부인인 마사코(雅子)왕세자비. 두 사람은 오는 5월 1일 각각 덴노와 왕비에 즉위한다. [사진=지지통신 뉴스핌] |
◆ 포스트 헤이세이는? "첫인상 확 와닿진 않아"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지난 1월 4일 신년 첫 업무로 미에(三重)현 이세(伊勢)시에 위치한 이세 신궁을 참배한 후 기자회견을 열고, 새 연호에 대해 "많은 국민에게 받아들여져 생활에 깊이 뿌리내리는 것이길 바란다"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실제로 일본 국민의 연호에 대한 애정도 남다르다. 지난해 7월 아사히신문 여론조사에 따르면 "앞으로도 연호를 사용하는 편이 좋은가?"란 질문에 "계속 사용하길 바란다"는 응답이 75%로 "그렇지 않다"(15%)를 압도했다.
이날 결정될 연호에 대한 관심도 높다. 민간을 중심으로 새 연호를 예상해보는 '랭킹'이 유행할 정도다. 원래 새 연호와 관련된 예상은 현 덴노의 죽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터부시됐다. 하지만 이번엔 생전 퇴위인 만큼 새 연호를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옅어지면서 예상랭킹 등이 나오고 있다.
민간 예상에 따르면 현재 가장 유력한 것으로 꼽히는 연호는 '안큐(安久)'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민간 예상 순위에 올라와있는 연호는 제외할 것이란 방침을 밝혔다. 근대 이후 연호의 초성인 'M·T·S·H'도 배제된다.
과거 일본 정부가 관리하는 연호의 '후보 리스트'를 본 적이 있는 일본 정부 관계자는 아사히신문 인터뷰에 "연호를 보고 한 눈에 딱 느낌이 오진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지금의 헤이세이도 처음 봤을 때는 비슷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kebjun@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