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새 400여 가게 철거, ‘제조장인’ 떠나
예술가들 ‘박원순개인전’ 전시회로 소통 시도
대화 원하는 세운상가 “공존 위한 노력 필요”
서울시 정비사업 재검토, 연말까지 결론
[서울=뉴스핌] 정광연 기자 =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종로3가역과 충무로역 사이에 길게 걸쳐진 청계천과 을지로 지역은 ‘도시재생’이라는 이름으로 지난해부터 철거가 진행되고 있다. 세운상가 일대의 오래된 가게들이 ‘도시문화유산’ 가치가 높다는 지적이 이어지자, 서울시는 2014년 수립한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정비사업 계획’을 재검토, 올해 말까지 종합대책을 마련한다고 밝힌 상태다.
철거는 잠시 멈췄지만, 상인들의 ‘상실감’은 진행형이다. 지난 7일 찾은 세운상가에서는 문을 닫은 가게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미 공터로 변한 가게들도 여럿이다.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등에 따르면 철거로 이곳을 떠난 가게만 400곳이 넘는다. 그리고 더 많은 사업장이 ‘떠남’을 준비하고 있다.
'을지로-청계천' 세운상가 모습. 서울시 도시재생 정책으로 400여개의 사업장이 문을 닫은 가운데 이곳에서는 여전히 많은 상인들이 '공존'을 요구하고 있다. [사진=정광연 기자] |
20년째 철물점을 하고 있다는 김모씨는 가게를 방문한 기자를 앉아서 맞이했다. 지난 겨울에 미끄러진 허리가 좋지 않기도 했지만, 20년을 지켜온 곳을 떠날수도 있다는 생각에 자주 다리가 풀린다 했다.
그는 “헛헛하고 허무하다”고 말했다. 먹고 사는 문제도 그렇지만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세월이 너무 쉽게 부정당하는 느낌”이라고 덧붙였다. 서울시는 을지면옥과 양미옥 등 유명한 음식점들은 생활유산으로 지정해 철거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지만 세운상가 안쪽에 깊숙이 자리잡은 작고 수많은 노포(老鋪)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
소멸을 눈앞에 둔 세운상가를 위한 특별한 전시회도 열린다. 8일부터 24일까지 을지로 상업화랑에서 열리는 ‘박원순개인전’이다. 심승욱, 오세린, 일상의실천, 정용택, 차지량, 최황, 한정림, CMYK 등 8개팀 11명이 모인 프로젝트팀 ‘서울-사람’이 을지로와 청계천, 그리고 박원순을 이야기한다.
'박원순개인전'을 준비한 최황 작가. 그가 포함된 프로젝트팀 '서울-사람'은 박원순표 재개발 사업의 문제점을 조명하고 이에 대한 시민들과의 소통을 시도하는 전시회를 오는 24일까지 진행한다. [사진=정광연 기자] |
전시회에 앞서 미리 만난 최황 작가는 “박 시장 임기중 벌어진 도시재생 사업과 재개발 사업의 문제들을 토대로 한국 사회와 서울의 현주소를 조명하는 기획전”이라며 “박 시장을 작가로 데뷔시키고 그가 서울시라는 무대에서 보여준 재개발 ‘작품’을 우리 작가들이 어시던트로 도와주는 컨셉”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은 박 시장의 재개발에 대해 분노나 조롱을 퍼붓지 않는다. 대신 왜 을지로와 청계천이 보존되고 유지돼야하는지를 다양한 예술작품으로 담담하게 전달한다. 주물과 금형 ‘장인’들이 수두룩한 세운상가는 예술가들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들은 자신과 세운상가가 느끼는 소멸의 상실감을 전달하되 과도한 감정을 담는 걸 지양했다. 모두가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시도다.
최 작가는 싱글채널 비디오 작품 ‘사건 지평선’에서 포털 사이트 ‘로드뷰’로 확인한 2010년, 2012년, 2015년, 2017년, 2018년의 세운상가 모습을 담았다. 10년간 촬영된 타입랩스와도 같은 작품속에서 세운상가 골목안쪽의 모습은 확인할 수 없다. 대로변만 바라보는 서울시의 정책과 겹치는 지점이다. 보이지 않는 골목안쪽, 20년을 지켜왔던 많은 가게들이 불과 1년 사이에 400개 넘게 사라졌다.
전시회 작품 '미지수'를 통해 기자가 직접 만든 전단지. 여기에 사용된 모든 텍스트와 이미지는 박원순 시장이 도시재생 사업을 위해 말하고 만든 내용들이다. [사진=정광연 기자] |
세운상가는 끊임없이 박 시장에게 대화를 요청하고 있다. 재개발을 무조건 반대하는 게 아니라 이곳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역사적 가치에 대해 논의하자는 입장이다. 프로젝트팀 서울-사람도 박 시장에게 전시회 마지막인 24일 ‘작가와의 대화’를 요청한 상태. 하지만 박 시장은 ‘검토중’ 외에는 여전히 답이 없다.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정비사업 계획이 ‘재검토’ 중인 것처럼.
최 작가는 “서울시 조직도를 보면 시장 위에 ‘시민’이 있다. 박 시장을 만나면 무슨 무슨 의미인지 묻고 싶다”며 웃었다. 시민을 위한 세운상가 ‘도시재생’은 그 안에서 20년 이상을 살아온 또 다른 ‘시민’의 삶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흘러가고 있다.
세운상가를 철거된 자리에는 주상복합아파트(문화센터)가 들어설 예정이다. 서울시는 늦어도 연말까지는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정비사업 계획과 관련된 종합대책을 마련한다는 입장이다. 세운상가는 박 시장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peterbreak22@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