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보험 가입못하는 미등록 이주아동..건강권 '먼나라 이야기'
시민단체 조사결과, 미등록 이주아동 2명 중 1명 질병
UN '아동권리협약' 한국도 체결..지켜지지 않는 약속
[편집자 주] 태어나도 기록될 수 없는 아이들이 있다. 한국에 살면서 평생 스스로의 존재를 입증해야 하는 아이들. 출생과 동시에 죽음과 가장 가까이 놓이게 되는 이 아이들을 대한민국은 '미등록 이주아동'이라고 부른다. 이 아동들은 부모로부터 '미등록'이라는 신분까지 대물림 받아야 한다. 병원에 가는 일, 학교에 들어가는 일, 취업과 결혼을 하는 일 모두 고난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미등록 이주아동에게 한국에서의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에 가깝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자라고 있지만 '국민'이 될 수 없는 미등록 이주아동의 생존기를 추적해봤다.
<목차>
1.요람과 무덤 사이
2.모래성에 사는 아이들
3.등록되지 못한 모성애
4.병원은 멀고 시민단체는 가깝다
5.헌법 가라사대 “외국인 아동인권도 보장하라”
6.전문가 인터뷰-1
7.전문가 인터뷰-2
[서울=뉴스핌] 임성봉 윤혜원 기자 = #소망(가명)이가 태어난 지 6개월쯤 지났을 때였다. 이마가 펄펄 끓을 정도로 열이 오르고 기침이 나기 시작했다. 다급하게 찾은 동네 병원에서는 별안간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소망이의 부모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검사결과, 소망이의 병명은 ‘만성폐색성 기관지염’. 만성기관지염보다 심한 질병으로 기도폐쇄증상이 나타나고 심하면 저산소증, 고탄산가스혈증까지 동반된다. 평생 기관지 확장제를 들고 다녀야 하고 각종 약도 복용해야 한다.
현행법상 미등록 이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아동은 출생신고를 할 수 없다. 이로 인해 건강보험에도 가입하지 못해 건강권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사진=보편적출생신고네트워크] |
태어난 지 고작 6개월 된 소망이가 감당하기에는 지독한 병이었다. 병원은 소망이 부모에게 장기간 입원치료를 권했다. 그러면서 보증금 2000만원을 요구했다. 소망이가 출생신고조차 되지 못한 ‘미등록 이주 아동’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미등록 이주민이었던 소망이 부모는 아픈 소망이를 안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만성폐색성 기관지염은 아직 완치가 불가능하다. 입원치료를 받지 못한 소망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증세가 심해져 결국 다른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하지만 이 병원 역시 소망이 가족에게 선금 2000만원을 지불하라고 했다. ‘미등록 이주 아동’이라는 꼬리표는 소망이의 병만큼이나 집요했다.
자신들의 ‘미등록 신분’이 소망이에게도 대물림된다는 사실에 부모는 가슴이 쓰렸지만 손 쓸 방법은 없었다. 소망이 부모는 수소문 끝에 친척 중 한국인과 결혼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렵게 연락이 닿은 이 한국인의 도움으로 소망이는 보증금 없이 입원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더 큰 문제가 소망이 가족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증금 2000만원을 낼 수 없어 치료를 포기했던 소망이 가족에게 병원비가 청구됐다. 생후 6개월된 소망이가 만성폐색성 기관지염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처럼 소망이 부모에게 병원비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소망이는 태어난지 6개월만에 삶과 죽음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달아야 했다. 소망이 가족에게 슬픔은 절망으로, 절망은 재앙으로 찾아왔다.
26일 ‘보편적출생신고네트워크’에 따르면 미등록 이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아동은 현행 국적법상 출생신고를 할 수 없다. 출입국관리법과 의료급여법상 건강보험에도 가입할 수 없다.
단순히 감기에 걸려 병원을 찾아도 3만원을 웃도는 진료비가 청구된다. 약값 역시 만만치않다. 장시간 저임금에 시달리는 미등록 이주민으로서는 아이가 중증 질병에 걸리면 속수무책이다. 유령처럼 존재하는 미등록 이주아동은 출출생과 동시에 한국정부의 보호 밖에서 맴돌아야만 하는 셈이다.
시민단체는 미등록 이주아동이 건강권에서부터 차별을 받고 있다며 이에 대한 제도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사진=이주와 인권연구소] |
미등록 이주민들의 의료지원을 돕는 한국이주민건강협회에 따르면 미등록 이주아동의 61%가 한 가지 이상의 병을 가지고 있고, 43%는 두 가지 이상의 병을 동시에 앓고 있다. 천식이나 청력장애를 비롯한 만성질환의 유병률도 10.9%로 국내 아동보다 높다. 최근 이 협회를 통해 의료지원을 받은 미등록 이주아동들의 사례를 살펴보면, 지난달 25일에는 몽골 국적의 2살 여아가 급성기관지염에 걸려 도움을 요청했고 지난해 12월에는 베트남 국적의 2살 남아가 폐렴을 앓아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정부는 소망이와 같은 미등록 이주아동이 몇 명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10년 ‘이주아동의 교육권 실태조사’를 통해 국내 미등록 이주아동이 2만여명으로 추산된다는 내용을 발표한 게 전부다. 이마저도 법무부가 파악한 ‘불법체류율(미등록 이주민 체류비율)’을 인권위가 단순계산해 얻은 수치여서 정확도는 크게 떨어진다.
국제사회는 이미 30여년 전 정치·종교·인종·신분에 상관없이 모든 아동의 건강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합의했지만, 한국의 상황은 좀체 나아지지 않고 있다.
국제연합(UN)은 앞서 1989년 총회를 통해 ‘아동권리협약’을 체결, 1990년 발효했다. 한국은 1991년 UN에 가입한 후 이 협약을 비준하면서 조약 당사국이 됐다. 이 협약의 조문 제24조 1항은 “당사국은 도달 가능한 최상의 건강수준을 향유하고, 질병의 치료와 건강의 회복을 위한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아동의 권리를 인정한다. 당사국은 건강관리지원의 이용에 관한 아동의 권리가 박탈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미등록 이주아동의 건강권을 보장하려는 정부의 노력은 요원한 상태다. 이미 UN 권리위원회는 4차례에 걸쳐 한국 정부에 ‘아동권리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을 권고했다. 해당 권고에는 '미등록 이주아동이 가능한 최고 수준의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인권위 역시 2011년 “국내에 거주하는 미등록 이주아동은 의료급여법이나 국민건강보험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아 공공 및 일반 의료서비스의 사각지대에 놓이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며 보건복지부에 의료접근권 개선 방안을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이주민센터 친구' 이진혜 변호사는 “미등록 이주아동이 앞으로도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지만 제도권 밖에 놓여 있는 이 아이들을 보호하는 국내법은 사실상 찾아보기 어렵다”며 “미등록 이주아동의 건강권은 인권의 기본인 행복권과도 맞닿아 있기 때문에 이들을 도울 법적 근거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imbong@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