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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조재완 기자 = 미국이 러시아 옥죄기에 혈안이 돼있는 동안 러시아는 오히려 미국이 밀어낸 국가들 곁에서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러시아가 최근 중국,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를 돈독하게 다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럽과도 활발한 교류를 이어감으로써 대러 제재 성공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지난 12일(현지시각) 비중 있게 보도했다.
미국은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사건을 계기로 대러 제재를 시행한 이래 러시아 경제를 지속적으로 압박해 왔다. 초기 러 정치인들을 겨냥한 수준에서 시작된 제재는 이제 러시아 최대 산업인 에너지 분야와 방위산업으로 확대됐고, 서방 국가는 러시아를 외부 금융·통상·외교 지원 등으로부터 고립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2016년 미국 대선 개입 및 2018년 영국 이중스파이 암살 시도 사건의 배후에 있다는 의혹이 일면서 더욱 극심해졌다.
그러나 러시아를 고립시키려는 미국의 노력이 실제 성과가 있진 않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러시아는 오히려 터키부터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이란에 이르기까지 중동 국가들과의 동맹 관계를 더욱 단단히 다져가는 중이다.
유럽연합(EU)와의 사이에도 우호적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EU 정상들이 러시아를 잇따라 방문하는가 하면, 러시아는 유럽 기업들로부터 해외 직접 투자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EU가 아무리 호전적 언사를 쏟아내도 유럽의 꾸준한 러시아산 원유 및 천연가스 수요로 보아 관계가 쉽사리 단절될 모양새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사진=블룸버그통신] |
실제 현실은 ‘러시아 고립’이란 수사와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미국의 경고에 아랑곳 않고 S400 방공 미사일 등 러시아 무기를 사들이는 터키나 중국 등이 미국 심기를 건드리고 있다고 하나, EU의 주요 경제대국 역시 러시아와 활발한 거래를 이어가는 건 마찬가지다. 러시아 싱크탱크인 발다이토론클럽의 안드레이 비스트리츠키 회장은 한 마디로 “고립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그는 러시아 고립이 “30년 전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만 가능했던 얘기”라며 “당시에는 경제 블록이 두 개밖에 없었으나 지금은 너무 많은 선택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독일은 러·독을 연결해 천연가스를 운송하는 ‘노르트 스트림 2’ 가스관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독일은 2014년 크림사건 합병 사건 당시 대러 제재를 강력히 주장했던 국가였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올해 상트페테르부르크 경제 포럼에 특별 게스트로 초청돼 “친애하는 블라디미르”라며 푸틴 대통령에게 친근감을 표하면서 “상호 협력하는 게임을 펼치자”고 우애를 과시했다. 직후 프랑스 에너지기업 토탈은 러시아 노스텍사의 255억달러 규모 초대형 프로젝트 ‘북극 LNG 2’의 지분 10%를 인수했다. 토탈은 지난달 모스크바 인근에 새로운 원유 제조공장도 열었다.
영국도 빼놓을 수 없다. 영국은 대표적인 ‘러시아 강경파’다. 그러나 영국 에너지회사 BP는 러시아 국영 석유회사 로스네프트 지분의 약 20%를 소유한 러시아 최대 해외 투자자 중 하나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에너지 대기업 임원은 “토탈이나 BP를 보라”며 “러시아처럼 크고 중요한 나라는 고립시킬 수 없다. 절대 성공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지난달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열린 컨퍼런스에서 마테오 살비니 이탈리아 부총리는 러시아 대표단을 “평화주의자”라고 치켜세우며 이탈리아 기업들에게는 EU 제재를 타개할 방법을 찾을 것을 촉구했다. 살비니 부총리는 “2018년 우리는 제재가 필요없다. 군대도 필요없다. 필요한 건 대화와 우정”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러시아에 대한 반대 기류에 “저항해 이 같은 자리를 마련해 준 이탈리아 기업들에 감사하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러시아 주재의 외교관들은 서방 국가가 기대했던 만큼 대러 제재 효과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고 비공식적으로 인정했다고 FT는 전했다.
오히려 교류는 더 활발해질 전망이다. 독일 자동차기업 다임러는 내년 초 메르세데스-벤츠 E클래스 세단 생산 공장을 모스크바 인근에 지을 예정이다. 미국 항공기제조사 보잉은 티타늄 부품 제조를 위해 올해 여름 러시아 중부지역에 공장을 건설했다. 유럽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사들이고 있다. 정치인들이 방해하기에는 러시아가 가져다주는 수익성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대러 제재가 본격 가해지기 시작한 2014년과 비교했을 때, 로스네프트의 원유 생산량은 두배 가까이 늘었다. 노르웨이, 베트남, 인도 등 외국 기업들과의 공동사업 덕이다.
이고르 세친 로스네프트 최고경영자(CEO)는 “서로간 모두 이익을 취하는 윈윈(win-win) 관계가 계속 발전할 것이라고 확신한다”며 “(대러) 제재 강화는 역설적이게도 미국 스스로 제한하는 조치”라고 비판했다.
러시아는 미국이 국제사회에 대러 제재를 압박하는 행위가 오히려 제3국이 미국에 거리를 두게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러시아 주재의 한 아시아 국가 외교관은 “미국이 러시아를 제재하려 들수록 미국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다는 점은 우리나라 같은 국가들에겐 분명히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심지어 유럽 국가들조차 독자적인 대러 정책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덧붙였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서방 국가 제재로 인한 외교적 선택지가 줄어들자 다른 방면을 파고들었다. 러시아는 2015년 말 시리아 내전에 개입해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 정권을 지원하면서 중동 지역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 미국이 밀어낸 중국, 사우디…빈자리 꿰찬 러시아
그러나 대러 제재가 지속되는 동안 러시아에 가장 극적인 변화를 가져다 준 건 중국, 사우디아라비아와 관계다. 러시아는 중국, 사우디와 단순히 S400 미사일을 거래하는 이상의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새롭게 튼 석유, 농산품, 군수품 교역에 힘입어 러시아 전체 수출 규모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3년 10.6%에서 2017년 15.5%까지 늘었다. 동기간 EU의 교역 비중은 49.6%에서 43.8%로 밀렸다.
지난 9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해 푸틴 대통령을 만나 우애를 다지기도 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우)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사진=로이터 뉴스핌] |
사우디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외교·통상적 지평을 계속해서 확장 중인 양국은 원유 생산 정책에 있어서도 같은 보조를 맞춰왔다. 사우디와 러시아는 원유 감산 합의를 주도해 국제유가 반등을 이끌었다.
사우디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는 프랑스 기업 토탈의 전례에 이어 '북극 LNG 2’ 프로젝트의 지분 30% 매입을 검토하고 있다. 러시아 에너지기업 시부르와 석유화학 공장 설립 방안도 논의하고 있다.
지난달 국제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사우디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피살 사건과 관련해 러시아는 공개적으로 무함마드 빈 살만 왕자를 지지하며 대규모 대표단을 파견했다. 무함마드 빈 살만은 카슈끄지 피살사건의 배후로 지목되고 있다. 러시아의 '든든한 지원'은 사우디 국부펀드가 러중 공동개발기금에 함께하기로 하는 거래로 보상받았다. 사우디 왕실 변호를 중도 포기한 미국 입장에선 씁쓸할 수 밖에 없다.
일각에선 러시아의 ‘새로운 우애’를 겉치레로 보는 시각도 있다. 최근 사우디, 중국과의 끈끈한 관계가 러시아의 장기전략이 만들어낸 결과물인지, 여전히 친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처절한 노력인지 의문스럽다는 것이다.
모스크바 주재의 한 외교관은 러중 간 역사적 관계를 고려하면 양국이 완전한 지정학적 동맹을 맺지는 못할 것이라면서도 "양국이 서로 간 일정한 이익을 취하고, 미국 심기를 건드리는 쉬운 방법"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아르카디 드보르코비치 전 러시아 부총리는 러중 관계에 관한 질문에 "실용성과 전략 두 가지를 모두 취했다"고 답했다. 그는 "장기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도 러시아와 중국은 미래를 위한 관계를 구축하길 바란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성장 시장"이라고 설명했다.
chojw@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