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에서 자화상으로…학고재에서 10월14일까지 전시
채색화에 푹 빠져 "채색화 잘하기 위해 오래 사고 싶다"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이 시작
[서울=뉴스핌] 이현경 기자 = 한국 1세대 페미니즘 작가 윤석남(79)이 자화상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본다.
어머니와 시어머니, 언니 그리고 역사 속 인물인 허난설헌과 이매창을 통해 '여성'의 힘을 전한 윤석남 작가가 이번에는 본인에게 집중한다. 9월4일부터 10월14일까지 학고재에서 열리는 개인전 '윤석남'에서는 윤 작가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자화상' 앞에서 윤석남 작가 [사진=학고재] |
30일 학고재에서 마주한 윤 작가는 과거 자신의 작품에서 새겨진 '모성'에 대한 이야기로 간담회를 이끌었다. 그는 "모성은 여성만 느끼는 강점이면서 저항적인 일"이라며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 카테고리에 그칠 게 아니다. 모성은 세상을 복원하고 사랑하는 힘이다. 그 힘을 여성적인 힘이라는 의미로 본다"고 해석했다.
윤 작가는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한 이유에 대해 "내가 나를 어떻게 그려도 상관없지 않으냐"며 웃었다. 그러면서 "나를 들여다보는 거다. '난 왜 이 세상에 태어났나' 이러한 물음에서 시작됐다"고 밝혔다.
자화상은 한국의 전통회화인 채색화 방식으로 그려진다. 윤 작가는 3년 전부터 채색화의 매력에 푹 빠졌다. 붓이 가진 선의 아름다움과 원색의 세련됨 때문이다. 원색의 생기발랄함에서 애환도 느껴진다고 했다. 또 다른 매력은 채색화에 담긴 '꿈'이라고 했다. '절망에서 찾은 꿈'이 있어 매력적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채색화에는 복을 상징하는 10가지가 있다. 그리고 채색화에서 사슴은 장수를 의미한다. 이렇듯 긍정적인 상징이 있다. 채색화에는 물고기가 공중으로 날아다니는 것도 있다. 자유를, 이상향을 향해 가는 거"라고 설명했다.
이어 "힘들고 가난한 상황에서 밝은 그림을 그릴 수 있겠는가. 난 못했을 거다. 억압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채색화를 그렸던 사람들은 그 그림 속에 꿈이 있기 때문"이라며 "채색화에는 이와 같은 희망과 꿈이 깃들어 있다"고 말했다.
설치작품 '우리는 모계가족' 앞에서 윤석남 작가 [사진=학고재] |
이번 전시에는 채색화의 가장 높은 수준인 '책가도' 형식의 자화상과 작업실에서의 모습을 담은 '자화상'을 볼 수 있다. 윤 작가는 "채색화를 잘하고 싶어서 오래 살고 싶다"며 채색화에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전시 주최 측은 윤 작가의 남다른 미술 열정을 높이 샀다. 이 관계자는 "선생님은 2015년부터 매주 채색화를 배우러 다녔다. 과거에도 뉴욕 유학 시절 박이소 선생을 비롯한 작가들을 만나면서 설치미술의 새로운 국면들을 체화했다. 계속해서 작업 방향과 방식에 고민하는 작가"라고 평했다.
전시 막바지에는 지난 1996년에 선보인 '핑크룸'의 새로운 버전이 등장한다. 1996년 작품처럼 바닥에 구슬을 흩뿌리고 3인용 소파를 배치했다.
소파 다리는 쇠발톱으로 끝이 날카로워 불안정하다. 이는 작가의 심리상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40대 뒤늦게 미술계에 입문한 윤 작가는 당시 '여성으로 살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 그는 늘 자유롭게 살고 싶은 갈증을 느꼈고, 매번 욕구를 억눌러야 하는 현실과 자유를 추구하는 갈등을 겪었다.
윤 작가는 "쉰 살이 넘어가면서 나도 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핑크룸'을 시작했다. 이게 형광 핑크라 날카로워 보이고 불안해 보였다. 남편이 그 당시에 돈도 잘 벌어서 경제적으로도 안정이 됐는데도 내 상황은 불안했다"고 회상했다.
소통이 문제였다. 윤 작가는 "한국 여성이 처한 상황 때문인지, 개인의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 그저 '나도 인간이야', '나도 살아있어'라는 생각은 드는데 소통하고 싶은 데가 없었다"며 "1985년 여성작가 김인순, 김진숙과 함께 '시월 모임'을 결성해 한국의 여성문화운동에 대해 공부했다. 그러면서 깨달음이 있었다. 그런 의식이 있었기에 미술을 할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핑크룸 Ⅴ'에서 윤석남 작가 [사진=학고재] |
페미니즘과 미투(me too, 나도 당했다) 운동이 일어나는 등 사회적인 변화도 일어나는 추세다. 이에 대해 윤 작가는 "세상이 겉으론 바뀐 거 같은데 의식이 바뀌었을까 싶다. 의식은 함부로 안 바뀐다. 세월이 지나고 훈련이 돼야 의식이 바뀐다"고 소신을 밝혔다.
윤석남은 여성 작가로는 처음 제8회 이중섭 미술상(1996)을 받았으며, 이후 국무총리상(1997) 등을 받으며 대표적인 여성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1996년 베니스비엔날레와 2014년 광주비엔날레에 참여했다. 2016년 테이트 컬렉션에서 작품을 소장한 후에는 그를 아시아 페미니즘의 대모로 평가하는 다수의 연구가 해외에서 이뤄지고 있다. 가부장적인 동아시아 문화 속에서 반기를 드는 페미니즘 움직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가로 꼽힌다.
89hklee@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