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고(16)
‘어느 예술가 생애의 에피소드’라는 부제를 가진 《환상 교향곡》 은 베를리오즈 본인이 실연으로 인해 겪은 아픔과 슬픔을 담은 작품이다. 이 《환상 교향곡》을 통해 그는 사랑의 고통을 승화시키면서 서서히 되살아날 수 있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된다. 한 여자를 전전긍긍하며 미친 듯이 짝사랑했던 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녀가 자신을 거부하자 좌절감으로 인해 아편을 먹고 자살을 꾀한다. 그러나 치사량에 미달하여 자살미수에 그치고 꿈속에서 단두대로 끌려간다. 그런데 그토록 짝사랑한 여인이 마녀가 되어 마녀들의 잔치에 나타난다는 내용이다. 각 악장마다 주제와 이야기가 있다.
1악장은 ‘꿈과 열정(Revieries Passions)’의 장이다. 여기서는 젊은 예술가가 사랑할 애인을 만나기 전의 심정을 나타내는 우울한 가락이 연주된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을 향한 통제할 수 없는 열정은 베를리오즈의 작품 속에서 집요하게 반복되는 음악적 모티브가 되고 있다. 즉 반복되는 음악적 모티브는 그가 사랑하는 여인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것을 ‘고정상념(이데 픽스, idee fixe)’이라고 한다.
2악장은 ‘무도회(Un bal)’의 장이다. 연인을 상징하는 고정상념의 선율이 아름답게 나타난다. 군중 앞에 나타난 그녀의 자태는 뭇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연인은 무도회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춤은 계속되어 클라이맥스에 이른다.
3악장은 ‘전원 풍경(Scene aux Champs)’을 연주한다. 예술가는 아름다운 경치를 쫓아 시골로 간다. 목가적인 2중주는 그 주위의 화창한 풍경과 솔솔 부는 바람을 표현하며 상쾌하게 만들어 준다.
4악장은 ‘단두대의 행진(La marche au supplice)’을 연주한다. 젊은 예술가는 연인을 죽이고 사형선고를 받아 단두대에 끌려가는 꿈을 꾼다. 그런데 단두대로의 행진은 어둡고 거칠기도 하지만 눈부실 정도로 빛나기도 한다. 고정상념 선율은 여기에서도 잠시 나타나 죽음에 이르러 마지막 순간에 연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마지막 5악장은 ‘악마의 축제일 밤의 꿈(Songe d’unnuit du Sabbat/Ronde du Sabbat)‘을 나타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젊은 예술가는 자기가 무서운 악마들 사이에 끼어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예술가의 장례식에 모여든 것이다. 이때 야비하고 기괴한 무도풍의 연인의 선율이 나타난다. 여자의 자태를 본 악마들이 기뻐서 지르는 고함, 난잡한 연회의 잡음과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린다.
베를리오즈의 환상과 탁월한 상상력으로 만든 《환상 교향곡》에는 자신의 환각 상태를 ‘고정상념’을 통해 녹여 넣었다. 원래 ‘고정상념’은 정신과 병의학 용어인데, 베를리오즈가 이를 사용한 것은 교향곡의 줄거리가 환각에 빠진 주인공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그의 ‘고정상념’은 낭만시대의 주요 기법으로 리스트의 ‘교향시(Symphonic Poem)’, 그리고 바그너의 ‘라이트 모티브”(leitmotiv, 유도동기)’로 확장· 발전되는 기초가 된다.
이 작품은 발표 당시 찬반 논란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며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비단 자살을 다룬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줄거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유럽 음악계는 교향곡 작곡 활동이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다. 그것은 베토벤이라는 거대한 거인의 발자국 뒤를 걸어가는 후배들의 운명이기도 했다. 음악가들은 교향곡은 베토벤에 의해 더 이상 발전의 여지가 없이 완벽하게 완성되어 버렸기에 그의 전철을 밟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절대음악 즉 ‘음악 이외의 다른 예술과 직접 관계를 갖지 않고 순수한 음의 예술성을 추구하는 음악’ 대신 그나마 아직은 창작의 여지가 있다고 여겨지는 줄거리가 있는 가곡과 오페라에 치중했다.
그러나 베를리오즈는 새로운 길을 찾는 시도와 함께 교향곡 자체의 발전도 중단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불태웠다. 그 결실이 바로 《환상 교향곡》이었다. 그는 교향곡에 대해 새로운 시도를 단행했다. 즉 그동안 교향곡의 정석처럼 여겨지던 4악장의 틀을 파괴하고 5악장으로 늘린 것이다.
베를리오즈는 프랑스의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로 끈질긴 기질과 불굴의 음악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곡을 많이 만들었다. 프랑스 작곡가로서는 예외적으로 대규모 기악곡의 창작에 몰두하였다. 그는 프랑스 특유의 섬세한 감정과 관현악법에 의하여 감미로운 음색을 즐겨 사용하였으며, 대담 분방한 표현은 때때로 격정적인 폭발에 도달하기도 한다. 그는 악기의 음색과 효과를 최대한 이용해 환상과 감정을 극적으로 표현하였다.
음악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고 주장한 베를리오즈는 문학과 음악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작곡활동을 했다. 그는 스스로 베토벤의 사도로 자처하리만큼 베토벤을 존경하였고 실제로도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또 베토벤뿐만 아니라 문학가인 셰익스피어와 괴테도 존경하여 그들의 작품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삶은 그의 음악세계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는 음악을 문학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리하르트 바그너와 함께 낭만파를 대표하는 작곡가가 된 베를리오즈는 ‘표제 음악(Program music)’이라는 새로운 관현악곡 기법을 창시했다. 그리하여 그의 교향곡에는 모두 제목이 붙어있다. 그의 대표작인 교향곡 1번이 《환상 교향곡》, 2번이 《이탈리아의 해롤드》, 3번이 자신이 좋아하는 문학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소재로 한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이름이 붙어 있다.
‘환상 교향곡’의 두 주인공 베를리오즈와 해리엇 스미스슨 <사진=이철환> |
엑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1803~ 1869)는 1803년 프랑스 남부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부유한 의사였던 아버지로부터 라틴어를 배웠고 음악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베를리오즈에게 있어 음악은 한참 동안 취미생활이자 수준 높은 대화를 위한 교양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의 직업을 물려주고 싶어 했던 아버지는 큰 기대를 가지고 본격적인 의학공부를 시키기 위해 베를리오즈를 파리로 유학 보냈다. 처음 1년 동안 베를리오즈는 부모의 기대에 충실하게 부응했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감수성이 예민한 베를리오즈로서는 전 유럽에서도 최고의 예술과 문화가 집결되어 있는 이 도시에 혹할 수밖에 없었다. 틈만 나면 연극이며 오페라를 보러 다니고, 공연을 관람하는 것만으로 성이 안 차 그날 들은 음악을 악보로 베끼며 욕구를 채웠다. 결국 그는 파리 음악원 작곡 교수였던 장 프랑수아 르쉬에르를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부모는 펄펄 뛰었다. 특히 아버지와의 갈등은 무려 8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아버지는 생활비와 학자금 지원을 중단했다. 반면, 그의 어머니는 간곡히 타일렀다. “얘야, 의사가 되어 훌륭한 일을 하면 천당에 갈 수 있지만, 음악가가 되는 것은 지옥을 향해 돌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어머니의 말에 베를리오즈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머니! 저는 천사들이 우두커니 서 있는 조용한 천당보다는, 소란하더라도 음악이 있는 지옥을 택하고 싶습니다.”
부모가 생활비 지원을 끊으면서 빈곤에 허덕이던 베를리오즈는 상당한 돈과 명예가 보장된 ‘로마대상(Grand Prix de Rome)’에 도전했다. 그러나 그는 연이어 고배를 마셨다. ‘로마대상’이란 프랑스 정부가 자국의 우수한 젊은 예술가들이 당시 문화의 중심지이던 로마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주는 제도였다. 이 상은 루이 14세가 제정하였다. 처음에는 미술에서부터 시작하여 건축을 거쳐 1803년에는 음악 분야에도 수상자를 냈다.
그러던 중 베를리오즈의 마음을 뒤흔드는 사건이 터졌다. 그의 나이 스물네 살 때인 1827년, 그는 영국의 한 극단이 파리 오데옹 극장에서 공연하는 〈햄릿〉을 관람하였다. 혈기 왕성한 베를리오즈는 셰익스피어 연극에 매료됐을 뿐 아니라, 오필리어 역의 여배우 해리엇 스미스슨(Harriet Smithson)에게 완전히 빠져 버렸다. 그래서 거의 스토킹에 가까울 정도의 애정공세를 폈다. 하지만 당시 잘 나가던 그 여배우는 무명의 작곡가인 베를리오즈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베를리오즈는 삶의 의욕을 잃고 시름시름 마음의 병을 앓으며 현실을 벗어난 환상에 빠져들기도 했다. 목적지도 없이 거리와 들판을 배회했다. 우울과 고통, 절망적 사랑, 잔인한 냉소, 막막한 공상, 찢어지는 가슴, 광기, 눈물, 죽음과의 절망적인 투쟁 … 베를리오즈는 이런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점점 탈진해갔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상황에서 탄생한 작품이 바로 음악사에 새로운 획을 그은 《환상 교향곡(Symphonie fantastique, op. 14)》이다. 자신의 애끓는 심정을 알아주지 않는 스미스슨을 향한 절망과 분노를 긍정적인 에너지로 전환시킴으로서 걸작을 만들어 낸 것이다.
베를리오즈가 27세가 되던 해인 1830년, 그는 마침내 그동안 수차례의 낙방 끝에 〈사르다나팔루스의 최후의 밤〉 이라는 칸타타로 로마대상을 수상했다. 이 로마대상 수상으로 베를리오즈는 음악계의 시선을 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곧이어 발표된 《환상 교향곡》은 음악가로서의 명성을 확실하게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아버지는 비로소 음악가로서 아들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고, 가정에도 화해와 평화가 찾아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베를리오즈에게 인생의 변곡점이 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다름 아닌 베를리오즈가 그토록 갈구해 마지않던 여인 해리엇 스미스슨과 재회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남자와 여자가 처한 상황이 뒤바뀌어 있었다. 전 유럽이 주목하는 전도유망한 젊은 작곡가 앞에 스미스슨은 이미 나이든, 그리고 빚에 쪼들리는 한물 간 여배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베를리오즈의 연정은 다시 불붙었다. 결국 그들은 베를리오즈 아버지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1833년 결혼하여 몽마르트 언덕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베를리오즈의 창작력은 스미스슨과의 결혼과 더불어 더욱 정열적으로 타올랐다. 특히 결혼한 지 1년 만에 작곡한 《이탈리아의 해롤드》는 바이올린의 천재인 파가니니로부터 커다란 찬사를 받는다. 파가니니가 처음 이 작품의 악보를 보았을 당시에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비올라의 역할이 그리 많지 않았기에 다소 실망감을 보였다. 그러나 실제 작품의 연주를 듣고 난 후에는 베를리오즈를 베토벤의 뒤를 잇는 운명적인 천재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으면서 후원금까지 보냈다.
스미스슨이 아들 루이를 낳으면서 이들 가정의 행복은 절정에 오르는 듯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예민한데다가 아집이 강한 음악가와, 이제는 한창 때의 미모를 상실하여 열등감에 사로잡힌 중년 여배우의 부부관계는 평탄하지 않았다. 베를리오즈가 네 번째 교향곡을 완성한 37세가 되던 해, 두 사람은 애증이 점철된 8년간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이후 베를리오즈는 공공연히 사귀어 오던 여가수 마리아 레치오와 재혼하였다. 그렇지만 전 부인이 되어버린 스미스슨에 대한 감정을 완전히 정리한 것은 아니었다. 스미스슨이 병을 얻어 쓰러지자 베를리오즈는 그녀의 침대 옆을 지키며 헌신적으로 간호하였고 임종도 지켜보았다.
스미스슨의 죽음은 베를리오즈가 이후 차례로 겪을 이별의 서곡이었다. 스미스슨이 죽은 지 8년 후 두 번째 아내 마리아도 갑자기 사망하였다. 그리고 스미스슨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루이마저도 쿠바의 아바나에서 풍토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랑하는 이들의 연이은 죽음은 베를리오즈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베를리오즈는 첫 번째 아내의 시신을 두 번째 아내가 잠들어 있던 몽마르트의 무덤 옆으로 옮겼다. 그리고 얼마 후인 1869년 3월, 자신도 66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베를리오즈는 파가니니로부터도 크게 인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표제음악과 낭만파 음악세계를 창시하는 등 특별한 음악활동을 통해 유럽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또 프랑스음악의 자존심을 높이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살아생전 정작 그의 조국인 프랑스에서는 그렇게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이는 그가 파리에서 음악 비평가로 활동하면서 많은 적을 만들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를리오즈가 프랑스 음악계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은 그가 죽은 뒤 상당한 시간이 흐른 이후였다.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전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문화와 경제의 행복한 만남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