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흔히 보이는 것들로 뫼비우스적, 그 이상의 상상 여행을 하려 한다. 주변의 사물들엔 저마다 독특한 내력이 숨어 있고 어떻게 빚느냐에 따라 보석이 되기도 하고 나침판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출발한 여행의 과정에 어떤 빛깔의 풍경이 나타날지, 그 끝이 어디까지 다다를지 필자 자신도 설레인다. 인문학의 시대라고 하는데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 메타적 성찰 역시 필요한 시점이다. 사물과 풍경, 시대와 인문을 두루 관통하면서 색다르면서도 유익한 여행을 떠나려 한다.
스위치가 없다면 형광등을 켤 때마다 고역일 것이다. 누군가가 의자를 방 한가운데에 놓고 그 위로 올라서야 한다. 형광등을 분해해 그 안의 전깃줄을 서로 잇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 누르는 방식, 돌리는 방식, 리모컨 형 등 스위치의 종류가 많기에 전기밭솥, 가스렌지, 티브이를 사용할 때마다 비슷한 수고를 해야 한다.
집 바깥은 더 심할 것이다.
저녁 무렵이면 전신주에 사다리를 걸쳐 놓고 올라야 한다. 가로등의 유리관을 열고 엇비슷한 행동을 취한다. 동네의 전신주마다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이다. 승용차 운전자들은 보닛을 열고 몸을 반쯤은 안으로 집어넣어 서로 연결할 전깃줄들을 찾을 것이다.
전조등을 켜려는 그들의 얼굴과 와이셔츠에 오일이 묻을 것이다. 그들은 마치 행위예술 하는 사람의 폼으로 다시 차에 타 운전을 할 것이다. 옛날 시골에서 초가 위로 볏짚을 올리고 우마차에 풀이나 과일을 실어 나르는 풍경과 비슷한 면이 있을 것이다.
그런 풍경은 인간적인 느낌도 주겠지만 과도한 노동과 극심한 피로를 안겨줄 것이다. 일상은 지금보다도 훨씬 더 고달플 것이다. 스위치는 그런 면에서 고마운 존재이다. 복잡할 상황을 단순하게 해주었고 골치 아픈 기계들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수고를 덜어주었다.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줄뿐더러 기계들의 민낯을 보며 조작해야 하는 번거로움에서 해방시켜 준 것이다.
그러나 그런 우려가 별로 없는 것이 스위치의 발명은 손 쉬운 작업에 속했을 것이다. 인간은 그 이전에 전기를 만들었다. 패러데이가 전기의 아버지라면 에디슨은 그 산파이다. 전기와 전자 산업은 계속 발전하여 선풍기, 냉장고, 티브이 등등에서부터 로봇, 인공지능, 사물 인터넷 등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스위치의 특성 중 가장 큰 것은 편리성일 것이다. 별의별 기계들에 대해 모를지라도 스위치 한번 누르면 그것들은 훌륭한 조력자가 되는 것이다. 편리성은 시간 절약을 낳는다. 간단한 스위치 조작으로 취사, 세탁 같은 일을 가동시킨 후 티브이를 보거나 즐겁게 노닥거릴 수 있는 것이다. 조작은 쉬운데 ON과 OFF 중 선택하면 된다.
자유의지냐 결정론이냐가 중요한 논제 중 하나인 만큼 선택 문제는 사실 중요하다. 전자의 예로 실존주의를 든다면 후자의 예로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론이나 목적론적 종교관을 들 수 있다. 최근에 뇌과학이 발전해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과연 있는가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전개되기도 한다.
B(Birth)와 D(Death) 사이에 C(Choice)가 있다는 말이 있듯 싸르트르는 선택을 중시했다. 부조리한 세계에서 선택을 통한 결단으로 실존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든 간에 삶에 있어 선택의 문제는 무엇보다 중요한데 스위치에서의 선택은 성격이 다른 것 같다.
어두우면 조명을 밝히면 되고 잠을 자고 싶으면 소등을 하면 된다. 배가 고프면 쌀이 밥이 되도록 스위치를 누르면 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싶으면 내려오라는 신호를 보내면 된다.
이처럼 스위치에서의 선택엔 별다른 갈등이 없다. 욕망이나 필요가 시키는 방향으로 조작만 하면 된다. 전문가들이 프레임 안에 이미 모든 것을 짜놓았기에 주어진 선택지 둘 중의 하나를 상황에 맞게 고르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이런 선택을 하루에도 무수히 하다보니 선택을 하며 사는 듯한 환상이 생길 수도 있다. 더우기 그런 환상을 이 세상이 은밀히 안겨주기도 한다. 짜여진 체계 안에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조작하며 소비자로서만 살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 대해 각성의 눈을 뜬다면 한번 뿐인 삶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맞는 진정한 선택은 무엇인지 고뇌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스위치의 편리성은 양면성이 있는 바 그 이면을 들여다 본다면 사물에 대한 감각 상실과 맞물릴 수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묘사했듯 스위치가 없다면 기계들의 민낯을 대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들의 원리, 특성, 조작 방법을 습득해야 한다. 대화를 나눈다고 볼 수도 있다. 그 일은 불편한 반면 풍요로움도 있다고 할 수 있는 바 단지 편리성으로 인해 실체에 대해 무지한 상태가 되는 것은 옳은 방향이 아닐 것이다. 때론 스위치가 없는 상황을 상상하거나 만들어서 인간이 만들어온 기계들과 직접적인 시간을 갖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식당 테이블에 부착된 호출벨이다. 저 자그마한 기기에도 스위치는 들어 있다. 손님이 누르면 식당 종사자는 달려와 서비스를 한다.
큰 식당일수록 상당히 부착되어 있고 그 추세가 늘고 있다. 물론 식당 주인이 단 것이며 저것이 없다면 손님과의 사이에 커뮤니케이션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손님은 요란한 가운데 소리를 질러 식당 종사자를 불러야 한다. 듣지 못하면 여러 차례 부르는 수고를 해야 한다. 식당 종사자 입장에서도 어느 테이블에서 부르는지 주의해야 하고 혹시 못 들을지도 몰라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이런 딜레마에 대한 해결사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시각을 달리하면 저것의 설치로 인해 손님과 식당 종사자 사이의 관계가 질적으로 변했다고도 볼 수 있다. 손님과 식당 종사자 사이에 호출벨이라는 매개체가 들어가게 되어 ‘손님 – 식당 종사자’에서 ‘손님 -> 호출벨 -> 식당 종사자’의 공식으로 바뀌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것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관계의 양식을 더욱 굳어지게 할 것이다.
‘손님 – 식당 종사자’의 공식은 기본적으로 사람 대 사람의 구조이다. 반면에 ‘손님 -> ㅗ출벨 -> 식당 종사자’의 공식은 손님과 식당 종사자 사이에 호출벨이 끼여 그것이 식당 종사자를 콜하는 형식을 취한다. 사람 대 사람의 구조가 사람 대 기계의 구조로 바뀐 것이다.
실제로 저 사진에서 호출벨의 의미를 보자. 호출벨이 없을 때와 비교하면 보다 가시적일 것이다. 가령 저 호출벨의 설치로 인해 손님이 위치한 공간과 식당 종사자가 위치한 공간은 이전과는 성격이 조금은 달라질 것이다. 호출벨 하나로 인해 공간이 분리된 듯하고 경계선이 선 듯하다. 게다가 경계선 이쪽 저쪽의 기운이 다소 달라 보인다.
식당에서의 커뮤니케이션 또한 손님과 손님 사이로 국한될 경향이 생기게 된다. 전통적으로 손님과 식당 종사자는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친해지기도 하고 단골 개념도 생긴다. 우스개 소리도 하고 농을 걸기도 한다. 호출벨이 들어섰다고 해서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러움이 어느 정도는 훼손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스위치는 통상 기계를 조작하는 용도로 쓰여 왔다. 그러던 것이 사람을 향하도록 쓰인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의도는 선의적이며 좋은 효과도 있다. 편하고 불필요한 요소들이 제거되고 쿨한 면도 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따지고 들면 전화나 승용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야기할 내용이 있으면 직접 찾아가 말로 하거나 누군가를 모시고 싶다면 가마를 동원하는 것이 기계가 중간에 끼는 것보다 인간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을 다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말한 것 같은 일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손님은 도구를 대할 때와 비슷하게 부지불식간에 식당 종사자를 대하게 된다. 식당 종사자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서비스의 댓가로 돈만 받으면 된다는 마인드가 강해질 수 있다.
식당 종사자가 테이블 아래로 무릎을 꿇다시피 앉아서 주문을 받는 경우까지 생겼다. 테이블의 호출벨을 누르면 그와 같은 풍경이 연출되는 것이다. 그 식당 주인의 자유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가령 그 식당에 어린이가 동반된다면 그는 무엇을 배우겠는가. 민망해지고 아찔함이 생긴다.
스위치는 문명의 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단순하면서도 부재의 경우를 생각하면 절대적인 필수품처렴 여겨진다. 그러나 스위치 문화가 보편화되면서 우리 인간이 지녀온 소중한 것들이 망각되거나 상실될 우려도 있는 만큼 그런 것들에 마음을 기울이고 철학화하는 것 역시 필요할 것이다.
이명훈 (소설 ′작약도′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