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장주연 기자] 언젠가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본인 인생 최고의 사치는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작업이라고. 무슨 말인가 싶어 되물었더니 “마음 맞는 감독, 작가와 여유롭게 일하는 게 가장 즐겁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정확히 기억하건대 그때 그 행운(?)의 명단에는 이 사람이 있었다. 이재용. 지금 그가 치를 떠는 ‘죽여주는 여자’ 이재용 감독 말이다.
배우 윤여정(69)이 신작 ‘죽여주는 여자’를 선보였다. 6일 개봉한 이 영화는 가난한 노인들을 상대하며 먹고 사는 소영이 죽고 싶은 고객들을 진짜 죽여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제66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파노라마섹션 월드 프리미어에 초청됐으며, 제20회 몬트리올 판타지아영화제에서 각본상과 여우주연상을, 제17회 이탈리아 아시아티카영화제에서 작품상을 받았다.
“베를린에서 처음 봤죠. 소재가 무거워서 칙칙하고 끔찍하면 어쩌나 했는데 따뜻한 구석도 있고 잔잔하더라고요. 깨끗하고 담백하게 풀었다고 생각했어요. 촬영은 힘들었지만(웃음). 사실 시나리오 받았을 때는 별걱정 안했죠. 물론 성매매 신에 대해서는 약간 걱정했으나 이재용 감독이니까 날 그렇게 혹독하게 부릴까 했던 거예요. 근데 인생은 항상 배신이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거 찍고 임상수 감독 만나서 그랬죠. ‘넌 고맙다. 이재용이 날 죽였다’고(웃음).”
그의 말이 엄살은 아니다. 극중 박카스 할머니 소영을 열연한 윤여정은 성매매 장면을 촬영하면서 전에 없던 고통을 겪었다. 참다 참다 촬영 중이던 여관방을 뛰쳐나가기도 했다.
“나는 물론이거니와 그걸 해본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그래서 놓친 부분이 많았는데 이재용 감독은 디테일을 요구했죠. 감독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끔찍했어요. 악을 썼죠. 세 번 NG를 내고 네 번째에 소리를 빽 지르고는 뛰쳐나갔어요. 그랬더니 이재용 감독이 나 헤어 담당하는 애한테 저분 드라마 할 때도 저러냐고 농을 던지더라고(웃음). 근데 감독 말을 듣는 게 맞긴 해요. 내가 그 인물에 대해서 아무리 연구했다고 해도 난 내 것만 보거든요. 놓치는 게 많을 수밖에 없죠. 근데 감독은 전체를 봐요. 내 경험으로는 감독 말이 90%가 맞아요. 그러니 절대적으로 들어야죠.”
물론 힘든 건 특정 장면만이 아니었다. 소영의 삶을 연기한다는 것, 그 자체가 고통이었다. 우울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들도 나랑 똑같이 누군가의 소중한 딸로 축복받으면서 태어났을텐데 그렇게 내몰린 거잖아요. 그게 스스로 선택한 길은 아니라고 보죠. 그 할머니들은 딴 일을 할 게 없어요. 도우미? 나이 칠십 넘은 할머니를 누가 써줘요. 나라도 안써요. 이게 현실이죠. 인생이 불공평하고 불평등하다는 걸 알면서도 참 그렇더라고요. 그러면서 난 이 두 달을 못견뎌서 우울증에 빠지는 데 진짜 이렇게 살면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어떨까 싶었죠. 그렇다고 내가 뭘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누구를 탓할 수도 없고. 기분도 나쁘고 점점 우울해졌죠.”
‘죽여주는 여자’를 이야기하면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었다. 영화는 노인 성매매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결국 삶과 죽음에 관해 말한다. 영화 촬영과 상관없이 전부터 죽음에 대해 생각해왔다던 윤여정은 죽음은 자연스러운 세상의 이치라고 했다.
“요즘에도 친구들과 죽음을 매일 논의하고, 관련 책도 많이 읽죠. 근데 해답은 없더라고요. 다만 내가 책과 우리 엄마를 보면서 느낀 건 인간은 유한하다는 거죠. 85세가 되면 정신적·육체적으로 내리막길이래요. 죽음에 가까워지는 거죠. 자연스러운 질서에요. 받아들여야지. 꽃도 피면 지기 마련인 걸요. 실제 스위스에는 조력자살을 해주는 곳이 두 곳 있다더라고요. 그래서 거기 사는 내 친구한테 잘 알아보고 있으라고 했죠(웃음). 생명이라는 게 삶에 대한 의지기에 막상 죽을 때 되면 더 살고 싶을 거예요. 근데 그럼 이미 판단력을 잃은 거죠. 내가 85세가 되면 도움을 받아서라도 죽고 싶어요. 나일 때, 윤여정일 때 가고 싶어요. 물론 이건 제 생각일 뿐, 모든 게 그렇듯 사람마다 다르겠죠.”
영화의 또 다른 화두인 소수자들에 관한 질문에는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놨다. ‘죽여주는 여자’는 장애를 가진 가난한 성인 피규어 작가 도훈, 트랜스젠더 티나, 코피노(한국인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자녀) 민호 등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 사회적 약자의 이야기를 함께 다룬다.
“미국서 살던 1970년대에는 제가 소수자였죠. 가면 국민학교 학생들이 쫓아오고 미군도 다 쳐다보고 그랬어요. 나도 오래 시간 소수자로 살아서 뭘 물어보거나 하진 않았어요. 물론 트렌스젠더랑 같이 일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죠. 근데 나도 그랬듯 그들도 똑같은 사람인데 뭐가 다르겠어요. 범죄자는 아니잖아요. 진짜 문제는 우리 사회가 그런 소수자를 범죄자 취급한다는 거죠.”
윤여정은 ‘죽여주는 여자’에 앞서 올봄 ‘계춘할망’으로도 관객과 만났다. 어쩌다 보니 둘 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작품. 매번 고된 촬영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기어이 도전하고 또 해내는 걸 보면 대배우답다.
“‘계춘할망’은 몸으로, 이건 마음으로 힘들었죠. 근데 세상에 쉬운 일이 없어요. 당하고 또 당해요. 세상 일에 공짜가 어디 있겠어요. 그래도 내가 예쁜 배우가 아니라서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어서 좋아요. 어렸을 때부터 개성 있고 독특한 역할이 많이 들어왔죠. 요즘에는 늙어서 초이스가 많진 않지만, 의식적으로 했던 연기는 피하면서 다른 역할을 하려고 나로서는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어요. 그게 남들이 말하는 도전일 수도 있고요. 사실 드라마는 그 역할을 잘하면 비슷한 캐릭터만 쭉 들어와요. 근데 그건 포기해야 하는 거죠.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목소리잖아요.”
연기 경력 50년 차, 모르긴 몰라도 그가 이렇게 롱런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도전정신’ 때문인 듯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후배들의 존경까지 받을 수 있었던 이유를 묻는다면, 그건 자만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리라.
“나보고 연기를 길게 했다는데 요즘엔 그 말도 부담스럽다고요. 연기는 오래 한다고 잘하는 게 아니거든요. 술은 50년 넘게 담그면 장인이 되는데 연기는 아니죠. 생생한 신인,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애들이 더 잘해요. 난 이미 오염됐죠. 타성이 많이 생겨서 두렵고요. 그래도 확실한 건 일하는 거에 있어서는 노력은 하겠다는 거죠. 최선을 다할 거고.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우두머리든 막내든 예쁘죠. 최선을 다해도 될까 말까 한 게 인생이기도 하고. 외로움이요? 늘 쓸쓸하죠. 하지만 그래도 인생은 고(GO)야. ‘외롭다, 외롭다’면서 커튼 붙잡으면 뭐가 달라져요? 어차피 인생은 외로운 것, 어차피 인생은 혼자 사는 건데. 외로우면 커튼 붙잡지 말고 나가 놀면 돼요.”
[뉴스핌 Newspim] 장주연 기자 (jjy333jjy@newspim.com) <사진=CGV아트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