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장윤원 기자] 무대분장을 지운 그의 얼굴은 날카로운 카리스마가 아닌 부드러운 미소로 가득하다. ‘무대 위 카리스마’란 말이 딱 어울리는 배우, 서범석을 만났다. 대기실에서 마주본 그는 장난기 엿보이는 미소와 진심이 듬뿍 배인 자화자찬으로 인터뷰 시작부터 큰 웃음을 줬다.
“무대 위 카리스마라 하면 또 저죠(웃음). 그 동안 연기하면서 악역을 많이 제안 받았고, 그 때마다 좋은 평가를 얻은 건 강한 인상 덕인 것 같아요. 하지만 부드럽고 인간적인 역할도 소화할 수 있는 얼굴이지 않나요?”
1994년 뮤지컬 ‘번데기’로 데뷔한 지 어느덧 20년이 훌쩍 지났다. 오래도록 잔상을 남기는 연기력과 폭발적인 가창력, 강렬한 카리스마로 20년 넘게 연기생활을 이어온 서범석이 현재 뮤지컬 ‘아리랑’으로 관객을 만나고 있다.
서범석은 뮤지컬 ‘아리랑’에서 일제 치하 시절 목숨을 내놓고 독립운동에 앞장선 양반 송수익 역을 맡았다. 나라를 위해 재산까지 털어 힘을 보태고 동네 사람들을 위해 서당을 짓고 가르침을 주기도 한 애국자 중 애국자, 송수익. 그를 연기하는 서범석은 “자신이 오늘 죽을 지도 모르면서 그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건 제정신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평했다. 지난 달 초연해 관객에 뜨거운 울림을 주는 뮤지컬 ‘아리랑’은 이제 막 공연 중반을 지났다.
“지금도 매일 새로운 느낌이에요. 매 공연 ‘내게 처음 일어난 일이다’ 생각하려고 애쓰죠. 분명 대사할 때 익숙해진 부분이 있을 겁니다. 그렇기에 저는 (익숙함을 지양하고자)대사를 완전히 암기해서 몸에 익히기 보단, 실수하지 않을 만큼만 외운 뒤 무대에서는 상황의 흐름에 따라 그때 그때 다르게 하는 스타일이죠. 장기공연을 하다 보면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데, 이를 극복하는 저만의 방법이에요.”
20여 년 연기 생활을 해온 배우가 공개한 그만의 노하우. 물론 그 역시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대본을 통으로 외우고, 덜덜 떨면서 무대에 오르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경력이 쌓일 수록 대범함과 자신감이 생겼고, 이제 무대에 있으면 펀안함을 느낀다. 서범석은 “이제 무대에서는 편안한데, 카메라만 들이대면 그렇게 불안하다”며 껄껄 웃었다.
사실 서범석은 지난 1월 소극장 연극 ‘취미의 방’ 이후, 한동안 무대가 아닌 드라마 출연에 매진했다. 드라마 활동을 이어간 것은 현실적인 이유에서였다. 잘 알려진 배우가 연극이나 뮤지컬에서도 주인공을 하는 세태가 굳어진 요즘, 무대에서 꾸준한 활동을 이어가려면 드라마 출연을 통해 인지도를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소극장과 대극장을 가리지 않고 좋은 작품을 택해온 그가 무대 복귀작으로 ‘아리랑’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했다. 올해 초연 개막하는 단 하나의 창작 대형 뮤지컬. 바로 그 점이 서범석을 ‘아리랑’으로 이끌었다.
“언제부턴가 우리 뮤지컬계가 대형창작을 만들 수 없는 풍토가 돼 버렸어요. 우리의 말로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 우리 뮤지컬이 마치 ‘뮤지컬이 아닌 것’처럼 돼 버린 거예요. 다 외국에서 수입하죠. 어떻게 보면 창작뮤지컬 제작에 앞장서는 윤호진 대표(에이콤인터네셔날), 그리고 ‘아리랑’ 제작을 결정하신 박명성 대표(신시컴퍼니)가 정말 대단한 겁니다.”
윤호진 대표는 뮤지컬 ‘영웅’(2009년 초연) ‘명성황후’(1995년 초연) 등 웰메이드 대형 창작 뮤지컬을 제작한 에이콤인터네셔날의 수장이다. 그를 언급하는 서범석의 표정에서 창작뮤지컬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엿보였다.
“사람들이 창작이라고 하면 일단 안 보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다가 작품이 잘 되면 그제야 관심을 갖기 시작하죠. 뮤지컬 ‘서편제’의 경우도 원년에 너무 힘들었지만, 지금은 얼마나 잘 만든 작품인지 모두가 알잖아요. ‘명성황후’도 지금 잘되고 있고. ‘아리랑’도 내년 후년에는 관객이 더 많이 들 거예요. 왜? 재미있다고 소문이 나거든(웃음).”
뮤지컬 ‘아리랑’은 조정래 작가의 12권 분량 동명 대하소설을 뮤지컬로 옮긴 작품이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파란의 시대를 살았던 민초의 삶과 애환, 투쟁의 역사를 그린다. 극본과 연출의 완성도는 출중하고, 전달하는 메시지는 심금을 울린다. 그렇다면 서범석이 생각하는 뮤지컬 ‘아리랑’의 매력은 무엇일까.
“일단 연극성이 강하죠. 중요한 건, 다른 어떤 뮤지컬보다 모든 배우들이 굉장히 잘해요. 에너지가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느낌입니다. 배우들 캐스팅에 구멍이 없어요. 배우들이 채워주는 에너지, 그리고 연극성이 이 작품의 매력이라 생각합니다. 혹자는 저 방대한 분량(조정래 작가의 원작소설 12권 분량)을 어떻게 무대에 옮기겠냐 우려의 시선을 던지지만, 딱 아리랑 선율이 흐르기 시작하면 눈이 번쩍 떠져요. 내 핏줄에 숨쉬고 있었던, 나 조차도 몰랐던 아리랑을 알게 되죠. 그런 힘이 있는 뮤지컬입니다.”
‘아리랑’은 매회 무대에 설 때마다, 온몸이 망치로 맞은 듯한 육체적 후유증을 남긴다. 하지만 매회 가슴이 벅차고, ‘좋은 작품이 맞구나’란 확신을 갖게 한다. 매 커튼콜 빠지지 않고 객석에서 터져나오는 기립박수, 눈물 짓는 관객의 얼굴이 서범석에게 큰 힘을 주고 있다.
“공연마다 에너지를 죄다 써요. 신기하게도, 제가 에너지를 안 쓰고 싶어도 절제가 안 돼요. 마치 한일전 축구 경기에 흥분하는 것처럼요. 아, 정말 그래요. ‘아리랑’에 오르는 건 한일전을 뛰는 기분인 것 같네요(웃음).”
서범석을 비롯해 안재욱, 김성녀, 김우형, 카이, 윤공주, 임혜영, 이소연, 이창희, 김병희 등이 출연하는 ‘아리랑’은 오는 9월5일까지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한다.
[뉴스핌 Newspim] 글 장윤원 기자(yunwon@newspim.com)·사진 신시컴퍼니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