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SK하이닉스·포스코·현대차 등도 경영권 방어수단 절실
<편집자> 삼성물산과 제밀모직 합병을 놓고 삼성과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 간 44일간 전쟁이 결국 삼성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합병성사가 삼성의 온전한 승리로 보기는 어렵다. 오너가 적은 지분으로 그룹전체를 지배할 때 생기는 위험성과 한계를 여실히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번 삼성물산 사례 뿐 아니라 삼성전자도 취약한 지배구조로 언제든 외국계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대상이 될 수 있고, 국내 대표기업인 SK하이닉스, 포스코, 현대차 등 경영권 위협에 언제든 노출될 수 있다. 이런 배경에서 차등의결권, 포이즌필 등을 골자로 하는 경영권 방어수단 제도화가 재계와 정치권을 중심으로 거론되고 있다. 경영권 방어수단 도입의 필요성과 효과, 부작용, 기업들의 선행조건, 해외사례 등을 살펴본다.
[뉴스핌=김연순 기자] "엘리엇은 아주 악랄한 헤지펀드다. 많은 돈을 이용해 불이익을 주려고 하는 것을 무방비 상태로 당하고 있어야 하겠는가."(삼성물산 A 사외이사)
"편법을 이용해서 재벌 3세가 기업을 계속 물려받다 보면 정당성 문제가 (언젠가는) 반드시 제기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업의 발전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번 삼성물산과 엘리엇매니지먼트 문제는 적대적 M&A에 해당하지 않는다."(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
최근 삼성 합병을 놓고 삼성물산과 엘리엇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의 44일간 치열한 혈전 과정에서 제기된 '경영권 방어장치 도입'이 합병 통과 이후 재계의 뜨거운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삼성물산 뿐 아니라 삼성전자·SK하이닉스, 포스코 등 초우량 기업도 외국인 지분이 절반을 넘어 언제든 경영권 위협에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우여곡절 끝에 합병에 성공했지만 이번 삼성과 엘리엇의 싸움은 크게 두 가지의 시사점을 던졌다. 우선 지배력이 약한 오너기업의 경우 엘리엇 등 벌처펀드(vulture fund)로 불리는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에 노출될 수 있다는 점과 막대한 비용을 치를 수 있는 경영권 방어 수단이 절실해졌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번 엘리엇 공격의 결과물이든 삼성 차원의 자발적인 대비책이든 주주환원정책 등 주주가치 제고는 경영권을 지키기 위한 기업들의 불가피한 수단이 됐다.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 회장이 엘리엇 사태의 교훈으로 언급한 것처럼 "주주들과의 소통과 교감 등이 중요해졌다"는 얘기다.
사실 이번 삼성과 엘리엇의 싸움이 '경영권 방어장치 도입' 논의의 기폭제가 되긴 했지만, 경영권 방어수단의 제도화 논의는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2003년 소버린 자산운용은 SK(주) 주식 14.99%를 매입해 2대 주주에 오른 뒤 본격적인 경영 개입을 시도하면서 한국 자본시장을 발칵 뒤집었다. 소버린 역시 SK그룹의 오너가 적은 지분만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허점을 파고들었고, 그들은 계열사 청산, 경영진 교체, 기업 지배구조 개선 등을 요구했다. 이에 맞서 SK는 적극적인 백기사 모집에 나서는 등 1조원 가량의 비용을 투입한 뒤 어렵사리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었다.
1년 후인 2004년에는 이번 엘리엇 사태의 당사자인 삼성물산이 영국계 헤르메스 펀드의 공격을 받았다. 헤르메스는 삼성물산 주식 5%를 매집하고, 인수·합병하겠다는 간접적인 의사를 표시했다. 헤르메스는 공언한 것과 달리 삼성물산 지분을 모두 팔아 300억원의 차익을 거두고 떠나 '먹튀 논란'을 일으켰다.
이 같은 행동주의 펀드들의 공격 이후에는 어김없이 업계을 중심으로 '경영권 방어 수단' 필요성이 제기됐다. 경영권 분쟁을 통해 수천억원의 국부 유출 피해가 발생했다는 게 핵심 주장이다.
이번 엘리엇 공격의 파급력이 커진 것은 글로벌 초일류기업 삼성의 경영권 승계에 심각한 위협을 가했다는 점과 함께 주요 대기업들도 삼성과 사정이 다르지 않다는 점으로 분석된다.
삼성그룹의 핵심인 삼성전자(외국인 보유지분 52%) 뿐 아니라 SK하이닉스(외국인 보유지분 52%), 포스코(외국인 보유지분 54%), 현대차(외국인 보유지분 45%) 등 한국을 대표하는 주요 대기업들도 경영권 위협에 노출돼 있다. 일각에선 이들 기업이 외국인 투자자의 경영간섭 위험에서 벗어나려면 20조원 상당의 돈을 자기회사 주식 매입에 투입해야 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재계 뿐 아니라 정부와 국회에서 차등의결권, 신주인수선택권(Poison Pill:포이즌필)을 비롯해 경영권 방어제도 도입의 필요성이 거론되거나 검토되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허창수 전경련 회장은 경영권 방어 문제와 관련해 "앞으로 대한민국이 시장개방을 했으니까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을 많이 해야 하지 않겠나"며 "너무 무방비로, 보호장치가 없으면 우리 기업들에 문제가 많이 생기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상장사협의회 역시 최근 호소문을 내고 공정한 경영권 경쟁 환경조성을 위해 포이즌필, 차등의결권 등 경영권 방어수단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구용 상장협 회장은 "현행 우리나라의 M&A 관련 법제는 공격제에게는 유리하지만 방어자에겐 불리하다"며 "기업들이 적대적 M&A 위험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경영권 방어에 집중하면 외자유치에 걸림돌이 될 수 있고, 재벌의 부조리한 세습을 부추길 수 있다는 주장도 시민단체와 정치권 등을 통해 꾸준히 제기돼 왔던 것이 사실이다. 경영권 방어수단 도입을 위해선 주주권리 제고가 우선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안대선 LG경영개발원 경제연구원은 "공격과 방어의 균형 차원에서 경영권 방어장치 도입을 생각할 수 있다"면서도 "과도한 경영권 방어장치 도입에 대한 부작용도 감안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경영권 방어장치 도입을 전제로 대기업 지배주주를 통해 배당 증가 등 주주중시 경영과 소액주주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뉴스핌 Newspim] 김연순 기자 (y2kid@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