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김홍군 기자]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주주총회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지난달 초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의 반대로 시작된 ‘삼성합병 전쟁’의 클라이막스다.
엘리엇은 그동안 삼성을 줄기차게 공격하며 지지세력을 결집해 왔다. 글로벌 투자자문사인 ISS와 지배구조원구원 등 국내외 투자자문기관들도 엘리엇의 입장을 지지하며 힘을 실어줬다.
이에 맞서 삼성은 이재용 부회장부터 말단 직원에 이르기까지 총동원 돼 세력을 끌어 모으고 있다. 이 부회장은 해외 출장 일정을 연기하면서까지 해외 투자자들에게 영향력을 갖는 네덜란드 연기금 관계자를 직접 만나 지지를 호소했으며, 삼성물산 임직원들은 수박을 사 들고 전국의 소액 투자자들을 찾아 나섰다. 삼성물산 CEO인 최치훈 사장은 주총을 코앞에 둔 지금까지도 홍콩 등 해외에 머물려 외국인 주주들을 설득하느라 여념이 없다.
다행히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던 국민연금이 합병 찬성 쪽으로 기울면서 삼성으로서는 한고비를 넘긴 상황이지만, 마냥 안심할 수만은 없다. 과거 SK그룹의 소버린 사태 때나 최근의 SK-SK C&C 합병 사례에서 보듯 투표율이 80%를 넘길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 경우 삼성은 53.33%의 우호지분을 확보해야 한다.
현재 삼성이 확보한 지분은 국민연금과 KCC를 포함해 약 30.99%다. 여기에 삼성합병에 찬성표를 던질 것으로 예상되는 국내 기관투자자(11.05%)를 합치면 42.04%다. 개인 소액투자자와 해외 기관투자를 합쳐 15% 가량의 지분은 확보해야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아직은 그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소액투자자 설득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김신 삼성물산 사장이 15일 삼성 수요사장단 회의에 참석, 소액주주들을 향해 “단 한표가 중요한 상황이다”고 호소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번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은 누가 보더라도 허점이 많은 게 사실이다. 현행법(자본시장법)을 위반하지는 않았지만, 대주주인 이재용 부회장 일가의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기 위한 합병이라는 반론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게 현실이다. 엘리엇의 문제제기처럼 삼성물산 주주들이 누려야 할 가치가 상당부분 훼손됐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경실련 조사에서도 일반 국민의 절반 가량이 삼성 오너의 지배구조 강화를 위한 것으로 이번 합병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면 삼성과 제일모직의 합병이 무산되는 게 바람직할까. 합병이 무산되면 엘리엇은 자신들이 목적으로 하는 투자수익을 얻기 위해 지속적으로 삼성물산 경영에 관여하고, 나아가 삼성의 핵심인 삼성전자를 겨눌 것이다. 이는 얼핏 기업의 투명경영을 위해 필요한 일로 비춰질 수 있지만, 오너경영 체제를 통해 성장해 온 우리 기업들의 역사를 고려할 때 정답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투자자 차원에서도 합병 무산은 이득이 아니다. 일부 개인 투자자들은 합병이 무산되면 삼성과 엘리엇의 지분 경쟁으로 주가가 올라 이득을 볼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지만, 전문가들의 생각은 다르다.
이번 합병은 오너가의 지배구조 강화라는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으로, 삼성이 합병비율을 재조정할 가능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삼성과 엘리엇의 지분경쟁이 본격화 할 가능성도 높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삼성-엘리엇 사태를 지켜보며 몇 해 전 인상 깊게 본 헐리웃 영화에 등장한 한 노교수의 대사가 생각났다. 영화 속 교수는 전 우주의 자산인 지구를 망가뜨린 인간을 멸종시키기 위해 찾아온 외계인을 향해 “인간은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쳤을 때 진화한다”며 선처를 호소한다.
삼성은 이번 사태를 겪으며 오너의 이익도 중요하지만 기업을 바닥에서 떠받치고 있는 주주들의 가치도 소중하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으로 믿는다. 배당확대와 거버넌스위원회 설치 등을 약속한 삼성은 더 진화할 것이다.
[뉴스핌 Newspim] 김홍군 기자 (kiluk@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