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되는 반전카드, 결국은 '이기는 게임' 판단
[시드니=뉴스핌 권지언 특파원] 그리스와 유럽의 운명이 달린 국민투표를 앞두고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가 이번에는 신규 구제금융안과 함께 채권단 요구 수용 의사를 밝혔다. 나라 경제가 국가부도(디폴트) 상황을 맞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연거푸 무리수를 던지고 있는 그가 진짜 노리는 것은 무엇인지 관심이 모아진다.
치프라스 총리는 지난주 구제금융 협상 막판에 국민투표 실시를 선언하며 채권단의 합의 기대를 꺾어버린 데 이어, 국제통화기금(IMF) 부채 상환과 구제금융 종료 시한 몇 시간을 앞두고서는 갑자기 신규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채권단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새로운 협상카드를 들이밀던 그는 1일 밤 국제 채권단이 앞서 제시했던 요구조건을 대부분 수용할 의사가 있다는 내용의 서한을 전달했다.
물론 유로존 재무장관 협의체(유로그룹)에 정식으로 전달된 이 서한에 적힌 양보안은 채권단의 마음을 돌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고, 유럽 채권단 측은 오는 5일 국민투표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신규 구제금융에 대한 협상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다시금 강조했다.
하지만 개혁 양보 제스처로 한 걸음 물러나는 듯하던 치프라스 총리는 같은 날 국민투표를 강행할 것이라며 국민들에게 구제금융 반대표를 던질 것을 촉구하는 뻔뻔함을 보였다. 그는 심지어 "막판까지 몰고가니까 채권단이 양보를 하더라. 국민들이 반대해야 더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쯤되면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며 그리스와 글로벌 경제를 뒤흔들고 있는 치프라스 총리가 진짜로 노리는 최종 목적은 무엇인지 그의 머릿속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급변하는 치프라스의 입장은 그만큼 상황의 절박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동정론을 펼치고 있지만, 실은 작금의 그리스 사태가 치프라스가 원하는 시나리오대로 가고 있는 것이라는 주장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 국민투표, 결과 무관하게 '손해 볼 것 없는 장사'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치프라스 총리가 승부수로 띄운 국민투표가 결과에 상관 없이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란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우선 채권단이 바라고 국민 여론이 좀 더 기울어 있는 구제금융 찬성 결과가 나올 경우를 살펴보자. 이 경우 치프라스 총리의 '국민의 결정'이라는 이유를 들고 협상 테이블로 복귀할 것이다. 체면은 살리면서 자국 경제에 대한 책임은 채권단과 국민에게 고스란히 떠넘기게 되는 셈이다.
물론 긴축 반대라는 집권 공약에 실패한 책임을 물어 사퇴 압력이 고조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장 구제금융 지원을 받아내야 하는 시급한 상황에서 조기 총선과 새 정부 수립을 위해 시간이 소요되는 만큼, 당장 사퇴하는 것도 쉽지는 않아 보인다.
치프라스 총리 스스로도 국민투표 실시 결정을 밝히는 자리에서 국민들이 찬성표를 던진다면 어쩔 수 없이 (채권단이 제시한) 긴축 결정을 따르겠노라 밝혔을 뿐 반대표가 나올 경우의 수는 언급하지 않았다.
국제문제 전문가로 글로벌 스트래티지 프로젝트(GSP)를 설립한 마르코 비센지노는 '치프라스가 국민투표를 원하는 진짜 이유' 제하의 칼럼에서 "그리스의 장기적 국가 안위보다는 자신과 시리자당의 운명을 더 우위에 두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만약 치프라스 총리가 애초부터 국가의 이익을 고려했다면 채권단과의 진지한 논의는 집권 직후인 1월 말부터 시작됐을 것이며, 국민투표 역시 구제금융 프로그램이 종료되기 이전인 5월 중에 실시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한편, 국민투표에서 구제금융 반대 결론이 나도 치프라스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다.
그리스 국민들이 더 이상의 긴축은 안 된다고 결론짓고 반대표를 던진다면 당장 유럽중앙은행(ECB)은 그리스 시중은행의 자금줄이 되던 긴급 유동성 지원(ELA)을 철회할 가능성이 높다.
또 자금난이 급속히 악화된 그리스는 유로존 잔류 여부를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07년 '리스본조약'에 따라 재정불량국이라도 유로존이 강제로 회원국을 탈퇴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구제금융 반대표로 그리스가 유로존 탈퇴(그렉시트) 수순을 밟게 되면 치프라스는 긴축 반대라는 집권 명분을 살리면서 그리스 경제 회생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물론 회생의 길이 순탄치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경제 기반이 더 탄탄해 질 가능성도 크다.
사이먼 닉슨 월스트리트저널(WSJ) 칼럼니스트는 지금까지의 상황 전개를 보면 치프라스의 최종 목적은 '그렉시트'일지 모른다며, 채권단이 받아들이지 않을 제안을 거듭 제시한 것은 협상 지체에 따른 비난의 화살을 채권단으로 돌리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사실 '그렉시트'는 유로존을 떠나든 잔류하든 뼈아픈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그리스 경제보다는 통합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유럽에 더 큰 타격이 될 수 있다.
치프라스의 지속적인 돌발 행동에도 끄덕 않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그렉시트 만큼은 막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뉴스핌 Newspim] 권지언 기자 (kwonjiun@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