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환의 문화의 향기<16> 상상력과 창의력 충전소, 그림과 건축의 세계(상)
누군가 ‘그림을 감상하려는 마음이 생길 때는 상상력을 채우고자하는 욕구가 생길 때’라고 말했다. 또 그림을 그리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생길 때는 어떤 대상에 대한 강렬한 자극이나 감동을 받았을 때라고 했다.
파블로 피카소도 이렇게 말했다. “그림은 애초부터 완벽하게 고안되어 확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생각이 바뀌는 것처럼 그림도 변화한다. 그림은 완성되고 난 후에도, 이를 관람하는 사람의 기분 상태에 따라 계속 변화한다. 그림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자신의 삶을 살아가며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바와 같은 변화를 겪는다. 이는 매우 당연한 것이다. 그림은 이를 관람하는 인간을 통해서만 생명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그림은 상상력을 자아내는 예술이다. 물론 고대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를 통해서 원시인들도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을 상상하고 추구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회화는 기독교문화가 융성하면서부터라 할 수 있다. 화가들은 하나님의 세계 즉 천국과 지옥을 상상력을 통해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세속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더욱 성실하게 믿도록 하는 상징물을 만들어내었다. 이후 르네상스시대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조각했다. 그러나 사진술이 발명되면서부터는 그림이 도전을 받게 된다. 더 이상 사실적인 화풍은 커다란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이끌어내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미술은 대상을 단순히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 대상의 궁극적인 선과 본체를 표현하는 것이다. 즉 자연의 원래 모습을 탐구하여 재해석, 재창조한다는 정신적 의미가 더 강하다. 그리고 미술가들은 자신이 속해있는 시대와 사회, 그리고 정치적 상황에 대한 관심을 극대화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한다.
이제 미술이 사람들을 어떻게 힐링해 주는지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알아보자. 혹시 현실의 삶이 너무나 어려워 탈출하고 싶거나 현실의 무게 때문에 잠 못 이루고 있다면, 샤갈을 만나보기를 권한다. 꿈꾸듯 펼쳐지는 샤갈의 그림 속에서 짙게 배어나는 삶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 샤갈은 현대인들의 정서에 꿈과 환상을 안겨주는 작가로서 삶의 즐거움, 성공, 행복한 꿈을 그려내는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샤갈은 ‘눈 내리는 마을’로 우리에게 알려진 ‘마을과 나’라는 그림을 그렸다.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 무언가 낭만적으로 들리는 이 표현은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까페와 노래와 시로 널리 알려진 이 표현의 매력은 샤갈이라는 화가가 갖고 있는 환상적인 그림의 특징 때문일 것이다. 어디선가 마주쳤을 샤갈의 그림은 강한 이미지로 우리 뇌리에 깊숙이 박혀있다.세상을 거꾸로 보는 곡예사들, 어릿광대의 바이올린, 하늘에서 내리는 눈, 모두 황홀한 꿈속의 세상이다.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은 따듯하다. 꿈과 사랑 그리고 환희가 가득하다. 시인의 감성이 눈송이처럼 점점 묻어난다.
샤갈은 1958년 시카고 강연에서 “나는 그림을 선택했다. 나에게 그림은 빵과 마찬가지로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된다. 나에게 그림은 창문이다. 나는 그것을 통해 다른 세계로 날아간다. 인생에서나 예술에서나 모든 것이 변할 수 있다. 우리가 아무 스스럼없이 사랑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낼 때, 모든 것은 변하게 된다. 진정한 예술은 사랑 안에서 존재한다. 그것이 나의 기교이고 나의 종교이다”라고 하였다.
기억하는 것은 아름답다. 그래서 그에게 '눈 내리는 마을'은 그가 떠나온 고향이자, 아득한 희망이었으며 끝내 갖지 못한 낭만이 됐다. 샤갈이 기억하는 그의 마을은 시(詩)가 되고, 우리는 그 시를 기억하며 샤갈의 잊혀진 그 마을을 막연히 동경해 본다.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네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김춘수-
살아생전에 행복한 삶을 살았던 샤갈과 달리 반 고흐는 지독히 불행한 삶을 살았다. 지금은 온 세계가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의 정열적인 작품이 생전에는 끝내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예술을 통해 인류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의 창조력을 깨달으면서 자신감을 되찾게 되었다.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제작된 그의 작품들은 강렬한 색채, 거친 붓놀림, 뚜렷한 윤곽을 지닌 형태를 통하여 그를 자살까지 몰고 간 정신병의 고통을 인상 깊게 전달하고 있다.
그의 그림에서는 모든 것이 살아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은 그가 고갱과 다툰 뒤 자신의 귀를 자른 사건 이후 프랑스 생레미의 요양원에 있을 때 그린 것이다. 그가 그린 밤하늘에서는 구름과 대기, 별빛과 달빛이 폭발하고 있다. 하늘은 굽이치는 두꺼운 붓놀림으로 불꽃 같은 사이프러스와 연결되고, 그 아래의 마을은 대조적으로 평온하고 고요하다. 이 작품이 사람들에게 주는 이미지가 너무 강렬했기에 결국 노래로도 만들어지게 된다.
Now I understand
What you tried to say to me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They would not listen they did not know how
Perhaps they'll listen now
Stary, Stary night
이젠 깨달았어요
당신이 나에게 뭘 말하려고 했었는지
얼마나 영혼이 아팠는지
얼마나 그들로부터 자유를 갈망했는지
그들은 어떻게 듣는 지도 모른 채, 들으려 하지 않았죠
지금은 아마 귀를 기울일거에요
별들이 빛나는 밤에
그러나 미술사에서 최고의 걸작품은 O·헨리의 소설에서 노화가 버먼이 그린 ‘마지막 잎새(The Last Leaf)’가 아닐까? 그는 그 그림을 통해 어린 한 소녀에게 생명에 대한 희망을 줌으로써 죽어가고 있던 목숨을 건져내었다. 이는 물론 소설 속의 한 장면이지만 너무 감동적인 화가와 그림의 이야기다.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한 아파트 꼭대기 방에 수와 존시라는 젊은 소녀화가들이 공동화실을 마련했다. 그 시기는 한여름인 6월이었다. 그런데 찬바람이 부는 11월의 어느 날, 느닷없이 다가온 폐렴은 가난한 화가 존시를 병석에 눕히고 사경을 헤매도록 만들었다. 그녀는 삶에 대한 희망을 잃고 친구의 격려도 아랑곳없이 창문 너머로 보이는 담쟁이덩굴 잎이 다 떨어질 때 자기의 생명도 끝난다고 생각한다.
수는 그런 그녀에게 바보처럼 굴지 말라며 삶의 의욕을 갖도록 위로하나, 존시는 그런 그녀의 충고를 듣지 않는다. 수는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무명의 늙은 예술가인 버먼을 만나게 된다. 그 노인은 항상 걸작을 그리겠다고 큰소리를 치지만 사실은 전혀 그러하지 못했다. 약간의 돈을 벌 뿐이고 그 돈마저도 술을 사 마시는 데 탕진했다. 수에게서 존시의 이야기를 들은 버먼은 눈물을 흘리며 존시의 어리석은 생각을 안타까워한다.
그날 밤은 비가 몹시도 많이 내렸다. 그런데 이제는 마지막 잎새밖에 남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존시가 커튼을 걷어 달라기에 수는 마음을 졸이며 커튼을 올렸다. 그런데 암록색 담쟁이가 그대로 꼭 붙어 있었다. 그렇게 죽음을 준비하던 존시도 그 잎새가 떨어지지 않은 것을 보고는 삶에 대한 의욕을 되찾는다. 드디어 존시는 점점 회복되어가고 마침내 완전히 회복된다. 그 날, 수는 존시한테 버먼이 오늘 병원에서 죽었다는 말을 한다. 비가 몹시 내렸던 그날 밤, 버먼은 마지막 잎새가 떨어진 것을 보고 그 자리에 똑 같이 생긴 잎새를 그려 놓은 것이다. 그러다가 병을 얻은 것이다. 결국 버먼은 사람의 생명까지도 살린 걸작품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철환 하나금융연구소 초빙연구위원·단국대 경제과 겸임교수 ('아름다운 중년, 중년예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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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인가 '조선'인가 호칭 논쟁
[서울=뉴스핌] 김현구 기자 = 최슬아 숭실대 교수는 29일 "북한이라는 호명이 상대방을 한반도의 일부처럼 위치시킨다면 조선이라는 호명은 하나의 독립된 행위자로 인정하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최 교수는 "북한을 인정해야 된다는 주장은 어떤 온정적인 제안이 아니라 상대를 인정함으로써 불안을 낮추고 관계를 보다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굉장히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국정치학회(회장 윤종빈)는 이날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평화 공존을 위한 이름 부르기:북한인가 조선인가' 주제로 특별학술회의를 열었다. 통일부는 관련 논의를 공론화한다는 취지에서 이번 학술회의를 후원했다.
사회를 맡은 권만학 경희대 명예교수는 "호칭은 기본적으로 식별 기능을 갖지만 정치적 호칭이 되는 순간 이데올로기를 담게 된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북한은 '대한민국'을 공식 명칭으로 부르며 남쪽을 외국으로 재정의했다"면서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북한' '북측'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며 토론 필요성을 강조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 들어서며 도어스태핑을 갖고 최근 북한 '핵시설' 발언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사진=뉴스핌DB]
◆ 김성경 "호칭은 분단 산물…'조선' 관계 전환 출발점"
김성경 서강대 교수는 "북한이라는 호명은 비공식적·약칭적 표현이지만 분단 80년 동안 누적된 정치적 의미를 가진 것"이라면서 "북한을 계속 북한이라고 부르는 한 우리 안에 북한이 계속 갇힐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학계에서는 (북한을) 조선, 북조선으로 부르는 경향이 좀 있었다"며 "남과 북의 국가 정체성이 이미 상당히 공고화돼 있는 현 상황에서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 맺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북한을 계속 유지한다는 것이 평화공존이나 통일에 더 도움이 된다는 논리적 근거를 찾기 어렵다"면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통일은 남북이 서로를 인정 존중하고 그 맥락 안에서 관계를 맺고 남북 주민이 통일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제시했다.
◆ 권은민 "국호 사용, 국가 승인 아냐…정치가 먼저, 법은 따라간다"
권은민 김앤장법률사무소 변호사는 "북한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또는 'DPRK'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것이 꼭 국가 승인이나 정부 승인을 구성하지는 않는다"면서 "국가 승인은 정치적 행위이고 국가 의사 표시다. 그렇게 부르더라도 국가 승인과는 무관하다라고 선언을 하면 정리가 되는 문제"라고 진단했다.
권 변호사는 "남북관계는 법률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정치의 영역에 가까운 것 같다"면서 "과거에도 정치가 큰 틀을 규정하고 법과 제도가 따라가는 변화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권 변호사는 "남북 기본합의서 제1조는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고 돼 있다"면서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것이 그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권 변호사는 "국호 사용은 상호 주권을 존중하는 취지의 기존 합의를 계승하는 것"이라면서 "당사자 표기는 상대방이 원하는 공식 국호를 불러주고 그것이 국가 승인은 아니다라는 것을 전제로 하면 된다"고 제언했다.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 북한 국무위원장 김정은이 군수공업을 담당하는 제2경제위 산하 중요 군수공장을 방문했다고 관영 조선중앙통신이 12일 보도했다. 사진은 김정은이 이 공장에서 생산된 권총으로 사격하는 모습. [사진=북한매체 종합] 2026.03.12 yjlee@newspim.com
◆ 이동기 "독일도 경멸적 호칭 쓰다 공식 국호 전환…출발은 이름"
이동기 강원대 교수는 "서독은 동독을 경멸적 표현으로 불렀지만 긴장이 격화되면서 더 큰 평화 정치에 대한 구상이 폭발했다"면서 "국제 환경이 좋지 않을수록 평화 화해 논의가 공존에 대한 요구나 필요를 폭발할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이 교수는 "독일 정치권에서는 헤르베르트 베너 전독문제부(통일부) 장관이 가장 먼저 동독 공식 국호를 사용했다"며 "당시에는 언론의 융단 폭격을 받았지만 시간이 해결해줬다. 국제법적으로는 여전히 인정하지 않았지만 실질적으로는 국가로 승인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원칙을 고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인내만으로도 부족하다"면서 "결국 원칙 고수와 실용주의가 결합하는 모든 출발은 국호의 제대로 된 호명이고, 동시에 장기적으로는 근본 전환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 "호칭 변경, 굴복 아닌 공존 가능성 넓히는 정치적 전략"
패널 토론에서 전문가들은 조선 호명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제시했다.
김태경 성공회대 교수는 "젊은 세대에는 '둘의 우리'가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시점"이라며 "우리가 조선을 일종의 주권 국가로서 인정하는 과정은 결국 우리에 대한 자기 인정과 그들에 대한 인정이 같이 결합되는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김주희 국립부경대 교수는 "핵심은 인정과 통일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라면서 "실질적으로 가는 데 있어서는 담론과 제도, 정치 차원에서의 접근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제언했다. 김 교수는 "호칭을 바꾸는 것은 굴복이 아니라 적대를 줄이고 공존의 가능성을 넓히는 하나의 정치적 전략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hyun9@newspim.com
2026-04-29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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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알發 쇼크에 리츠업계 초긴장
[서울=뉴스핌] 정영희 기자 = 국내 1호 해외 부동산 공모 리츠인 제이알글로벌리츠가 자산 가치 하락과 유동성 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상장 리츠 가운데 사실상 첫 디폴트 사례가 발생하면서 시장에 적잖은 충격을 주고 있다.
다만 업계에서는 이번 사안을 개별 리츠의 리스크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며, 전체 시장으로 확산되는 시스템 리스크 가능성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정부는 관련 시장에 대한 긴급 점검에 착수하는 한편, 필요 시 유동성 지원과 함께 구조 개선을 병행하는 등 시장 안정화 대책을 추진할 방침이다.
[AI 그래픽 생성=정영희 기자]
◆ 무너진 해외 부동산 가치…유동성 위기 예견됐나
30일 리츠업계에 따르면 제이알투자운용의 기업회생 절차 돌입으로 인해 투자자들의 긴장감이 시장 전반으로 확산하는 모양새다. 국내 대형 독립계 리츠 자산관리회사인 제이알투자운용이 2020년 국내 최초로 유가증권시장에 안착시킨 해외 부동산 공모 리츠다.
벨기에 브뤼셀 중심부에 위치한 파이낸스타워와 미국 뉴욕 맨해튼의 498세븐스애비뉴 등 대형 상업용 오피스 빌딩을 기초 자산으로 편입해 운용해 왔다. 그러나 금리 상승 등의 영향으로 벨기에 브뤼셀 파이낸스타워 가치가 떨어지면서, 단기사채 400억원을 상환하지 못해 지난 27일 서울회생법원에 회생 절차 개시를 신청했다. 한국거래소는 전일 매매 거래를 정지하고 관리종목으로 지정했다.
이번 사태는 어느 정도 예견된 수순이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제이알글로벌리츠는 지난 1월 12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공시했으나 해외 자산의 감정평가서 수신 지연 등을 이유로 한 달 만인 2월 이를 자진 철회했다.
핵심 자산인 벨기에 파이낸스타워의 감정평가액이 급락하면서 현지 대주단과 약정한 담보인정비율을 초과했다. 임대료 등으로 발생한 현금 흐름을 대출 상환에 우선 충당하도록 묶어두는 캐시트랩(Cash Trap, 현금 동결)이 발동되더니 기업회생으로 이어졌다.
박광식 한국기업평가 수석연구원은 "올 들어 차입 만기 도래에 따른 차환 부담이 지속되는 가운데 환헤지(환율 고정 상품) 정산금 명목으로 약 1000억원의 추가적인 자금 조달이 시급하다"며 "캐시트랩 해소를 위해서는 약 7830만유로(한화 약 1354억원)의 현지 차입금 상환을 위한 추가 재원 조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일제히 꺾인 리츠주…시스템 리스크 확산은 기우?
이 같은 악재에 상장 리츠 전체에 대한 투자 심리가 급격히 악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고개를 든다. 실제로 한국거래소 거래 동향을 살펴보면 이날 리츠 종목들은 일제히 곤두박질쳤다. 마스턴프리미어리츠가 큰 폭으로 미끄러진 것을 비롯해 한화리츠, 삼성FN리츠, SK리츠, 코람코라이프인프라리츠 등이 급락세를 면치 못하며 시장의 불안감을 드러냈다.
뚜렷한 성장 가도를 달리던 리츠 업계는 발을 동동 구르는 처지가 됐다. 한국리츠협회 통계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종가 기준으로 국내 증시에 상장된 25개 리츠의 시가총액은 9조7778억원을 기록했다. 리츠 시장은 지난해 1월 8조103억원 수준에서 같은 해 9월 9조2048억원을 돌파했고 5개월 만인 지난 2월에는 10조원을 넘어서는 등 몸집을 불려왔다.
그동안 일반 주식에 밀려 상대적으로 소외됐지만, 최근 코스피 강세장 속에서 안정적인 피난처로 주목받은 결과다. 법적으로 배당 가능 이익의 90% 이상을 의무적으로 배당해야 하는 구조적 특성 덕분에 확실한 현금 흐름을 선호하는 투자 자금이 대거 몰린 것도 호재 원인 중 하나로 제시됐다.
그러나 이번 사태의 파장이 전체 금융 시장으로 퍼질 것이란 예측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국내 상장 리츠 22개사 중 해외 자산을 보유한 비중은 14.3%이지만, 전체 자산 기준으로 환산하면 해외 자산 비중은 1.2%에 불과하다. 국내 상장 리츠의 총투자 자산 대비 해외 자산이 차지하는 파이가 극히 작아 전이 가능성이 낮다는 뜻이다.
지난달 말 자산 구성 및 투자 유형별 포트폴리오 비중을 보면 주택이 44.0%로 가장 컸다. 오피스는 35.3%에 머물렀으며 리테일 6.4%, 물류 6.4%, 혼합형 3.6%, 기타 3.2%, 호텔 1.1% 순으로 나타나 이번 위기의 진원지인 해외 오피스 리스크와는 거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수희 LS증권 연구원은 제이알리츠의 최근 기준 발행 잔액이 약 4000억원으로 전체 크레딧 시장 규모와 비교하면 찻잔 속의 태풍 수준이라고 일축했다. 일반 크레딧물과 달리 리츠가 발행한 회사채는 개인 투자자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아 기관 투자자 중심으로 굴러가는 국내 크레딧 시장 심리에 타격을 주기는 구조적으로 어렵다는 판단이다. 김은기 삼성증권 연구원 역시 이번 이벤트가 단기사채 미상환으로 불거진 만큼 단기 자금 시장 경색이 회사채 시장으로 파급될까 우려하는 시각이 존재하지만 최근 풍부한 단기 자금을 바탕으로 기업어음 금리가 안정적으로 낮게 유지되고 있어 과거의 신용 위기와는 양상이 완전히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 국토부 방화벽 구축 총력전…상장리츠, 자산 다각화 과제로
다만 해외 부동산 자산에 직간접적으로 투자하는 리츠 종목들은 당분간 위축된 행보를 보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현재 해외 부동산 자산에 투자하는 상장 리츠는 KB스타리츠, 미래에셋글로벌리츠, 마스턴프리미어리츠, 신한글로벌액티브리츠, 디앤디플랫폼리츠, 이지스레지던스리츠 등이다. 이 중 해외 자산 구성 비중이 100%인 곳이 3개사, 50% 이상이 2개사, 50% 미만이 3개사로 파악됐다.
대표적으로 디앤디플랫폼리츠는 일본 소재 아마존 물류센터에 간접 투자 중이며 이지스레지던스리츠는 미국 소재 임대주택 및 대학 기숙사에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이은미 나이스신용평가 수석연구원은 "해외 자산의 장부 가치 비중이 각 리츠 총자산의 5~30% 수준에 그쳐 전반적인 쏠림 현상은 없다"면서도 "해외 자산을 보유한 개별 리츠의 경우 현지 대출 약정 위반에 따른 현금 흐름 통제와 국내 채무 차환 부담이라는 이중고를 동시에 겪을 수 있어 리스크 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글로벌 부동산 시장의 한파도 부담이다.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주요 도시 상업용 부동산 가격은 전년 동기 대비 4.7% 떨어졌다. 고점을 찍었던 2022년과 15%나 증발했다. 런던과 베를린 등 유럽 주요 도시의 상업용 부동산 가격은 30% 넘게 폭락했다.
정부도 사태의 엄중함을 인지하고 발 빠르게 방화벽 구축에 나섰다. 국토교통부는 이날 오후 김이탁 제1차관 주재로 금융위원회, 한국부동산원, 금융감독원 등 관계 부처를 긴급 소집해 점검 회의를 열었다. 리츠 시장 전반의 현황을 점검하는 한편, 투자자 보호를 위한 대응 방향을 집중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자리다.
국토부 관계자는 "제이알글로벌리츠의 부실화 과정에서 불거진 각종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전일 합동 검사에 착수했으며, 불법 행위가 적발될 경우 엄정 대응할 방침"이라며 "시장 안정을 위해서 대기업이나 공기업이 최대주주가 되는 앵커리츠를 공급하고, 변동성이 통제 수준을 넘어설 경우 채권 및 자금 시장 안정 프로그램 규모를 즉각적으로 늘릴 수 있도록 비상 대응 체계를 가동하겠다"고 말했다.
시장 전문가들은 사태 수습을 넘어 리츠 시장의 근본적인 체질 개선과 신뢰 회복이 시급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상장 리츠의 주가를 궤도에 올려놓고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투자자의 신뢰를 되찾는 것이 급선무라고 지적했다.
김필규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정보의 투명성이 담보된 상태에서 시장 상황에 맞게 자금 조달의 유연성을 높여주고, 우량 자산 편입과 리츠 간 합병을 통해 자산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는 정책이 뒤따라야 한다"며 "자산관리회사 역시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운용 현황과 배당 전략 등을 공개하고, 적극적으로 소통함으로써 정보 비대칭으로 인한 불신을 거둬내야 한다"고 제언했다.
chulsoofriend@newspim.com
2026-04-30 06: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