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양창균 기자] "김범수 카카오 의장이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대표 모바일 메신저는 수년전에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여러 차례 위기의 순간이 닥칠 때마다 김 의장이 직접 발로 뛰고 직원들을 독려하면서 지금까지 이끌어 왔습니다." 김범수 카카오 의장을 잘 아는 지인의 전언이다.
최근 ICT업계의 화두는 김범수 의장이다. 한국형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카카오톡의 카카오와 포털업계 2위사업자인 다음커뮤니케이션의 합병결정 뒤 김 의장은 연일 언론과 여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고 있다.
카카오와 다음커뮤니케이션이 합병키로 결정하면서 김 의장은 최소 1조6000억원대의 주식부호에 등극하게 됐다. 단번에 IT업계 주식부호 1위인 김정주 넥슨 회장(주식가치 1조 7392억원)을 위협하는 수준이다.
김 의장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단지 IT업계 주식부호로 부각되기 때문은 아니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발자취가 녹록치 않았기 때문이다. 고난과 시련 그리고 여러 차례의 좌절을 겪으면서도 단 한번도 주저앉지 않았다.
이러한 김 의장의 뚝심이 국민 모바일 메신저 카카오톡을 운영하는 카카오를 만든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 고난과 위기의 순간들
김범수 카카오 의장의 삶은 순탄치는 않았다. 그의 삶 자체가 굴곡과 시련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김 의장은 1966년 3월 2남 3녀 중 맏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김 의장은 어렸을 때 할머니를 포함해 여
덟 식구가 단칸방에 살 정도로 가난했다고 한다. 특히 부모님 모두 돈을 버느라 바빴기 때문에 그는 어려서부터 스스로 자기 일을 처리해야만 했다. 한참 어리광을 부릴 시기였지만 김 의장에게 사치에 가까웠다. 어쩌면 김 의장의 현재 두둑한 배짱과 뚝심도 이 때쯤 형성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한번은 어렸을 적 친구의 집에서 백과사전을 보다가 1부터 100까지 더한 합이 얼마인가에 대해 가우스가 내놓은 해답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너무나 인상 깊어 지금까지도 기억한다고 한다. 이것을 계기로 문제 해결 방식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쳤다고 한다.
김 의장은 1년 재수한 뒤 1986년에 서울대 산업공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같은 학과 대학원에 진학해 PC통신 관련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딴 뒤 1992년 삼성SDS에 입사했다.
1998년 사표를 쓰고 나와 '한게임'이란 게임회사를 세웠다. 이 때 김 의장이 뛰어든 첫 사업의 시련이 찾아오게 된다. IMF 외환위기 직후였던 탓에 금방 자금난에 빠지게 된 김 의장은 PC방이 뜨기도 전인
당시 한양대 앞에 국내 최대 규모의 PC방을 열었다. 또한 김 의장은 PC방사업에 만족하지 않고 PC방 고객 관리 프로그램을 만들어 다른 PC방에 파는 사업도 같이 진행했다. 항간에는 김 의장이 당시 본업이었던 PC방보다 PC방 관리 프로그램으로 더 많은 이익을 냈다는 후문이다.
PC방 사업으로 쌈짓돈을 만든 김 의장은 다시 한게임에 투자, 게임사업의 초석을 다졌다. 이후 김 의장은 회색사업에 도전장을 던졌다. 회색사업이란 도박은 아니지만 고포류(고스톱 포커) 웹보드게임과 같이 도덕적인 논란을 안고 있던 사업이다. 하지만 김 의장은 문제없이 사업을 키우기 시작했다.
특유의 영업전략도 구사했다. 한게임을 설치하면 고객관리 프로그램을 무료로 주는 영업방식을 통해 사업을 확장해 나간 것이다. 불과 1년만에 1000만명이 한게임에서 고스톱을 치기 시작했다. 수익 모델은 없는데 사용자가 급격히 늘어 적자가 나기 시작했다.
지난 2000년 늘어나는 트래픽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한게임과 수익모델이 부족했던 네이버가 만나 합병을 결정했다. 초창기 때 NHN을 먹여 살린 것은 한게임이었다. 2001년 게임에서 사용할 아이템을 파는 것이 대박이 나면서 NHN(현재 네이버와 NHN엔터테인먼트로 분리)를 단번에 국내 포털업계 1위로 등극시켰다.
김 의장은 2004년 NHN 단독대표로 나서면서 한국게임산업협회 초대회장과 벤처기업협회 부사장을 맡아 대외 활동으로도 폭을 넓혔다. 2007년 미국 시장 개척을 위해 NHN USA 대표로 자리를 옮겼지만 이듬해 회사를 떠나 벤처기업 ‘아이위랩’(현 카카오)을 인수했다. 이 직전 김 의장은 NHN대표에서 물러나고 한게임 창업 멤버들과 회사를 떠나면서 이 의장과 동거는 끝이 났다.
아이위랩을 통해 김 의장은 동영상과 사진 등 콘텐츠 공유 기능이 강한 부루닷컴과 집단지성의 기능을 가미한 추천정보 사이트 위지아닷컴을 선보였지만 시장의 반응은 신통지 않았다.
이석우 카카오 공동대표는 "2007년 부루닷컴과 이듬해 출시한 위지아 닷컴에서의 실패와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의 카카오톡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며 "질적인 면에서 떨어지지 않는 서비스였으나 사용자 중심이 아니었던 것이 결정적 실패 원인이었다"고 진단했다.
◆가우스에서 해답을 찾다
모바일로 방향을 완전히 전환한 아이위랩은 카카오톡을 출시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카카오톡은 2010년 1월 프리챌에서 메신저를 개발한 경험이 있던 이상혁 CSO(Chief Strategy Officer)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 2달의 개발기간을 거쳐 같은해 3월 선보였다.
카카오톡은 말 그대로 대박을 쳤다. 회원 수가 6개월 만에 100만명을 돌파했고 이후에는 더욱 가파르게 성장해 1년 만에 1000만명을 넘어섰다. 아이위랩은 아예 기업 이름을 ‘카카오’로 바꿨다. 같이 사업을 해 온 이제범 씨가 회사 대표를 맡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문제는 수익모델이었다. 마땅한 수익모델 없던 카카오톡 서비스는 금새 자금난에 봉착하게 됐다. 김 의장은 이곳저곳을 다니며 자금유치를 위해 발벗고 뛰어다녔다. 지금과 같은 상태가 지속된다면 카카오톡 서비스는 언제 중단될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위기순간으로 내몰리는 상황이었다.
2011년 청담동의 한 음식점에 철통 보안을 유지한 식당이 눈에 띄었다. 골목 입구에는 고급 외제차를 타고 온 게임업계 CEO(대표이사)들이 주변에서 배회하는 모습이 목격됐다.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국내 게임업계 대표들이 비밀회동 장소였다. 모임을 주관한 인물은 김 의장이었다. 이 자리에는 김정률 싸이칸홀딩스 회장과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 방준혁 CJ E&M 넷마블 고문, 김성수 온미디어 김성수 대표 등이 참석했다.
이를 계기로 김 의장은 카카오의 자금숨통을 틔여 줄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된다. 삼삼오오 김 의장의 카카오에 자금투자를 결정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얼마뒤인 2012년 김 의장은 대규모 투자유치에도 성공하게 된다. 김 의장은 중국 최대 게임기업인 텐센트 720억원과 위메이드 200억원등 총 920억원의 유치에 성공하며 자금난을 해소하게 된다. 카카오는 곧바로 일어서게 된다. 대규모 투자유치에 성공한
2012년 카카오는 '카카오 게임하기'를 흥행시키며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지난 2012년 70억원 흑자 전환에 성공한 카카오는 지난해에는 흑자 규모가 556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김 의장은 다시 새로운 실험을 시작했다. 국내 포털사업자 2위인 다음커뮤니케이션과 합병키로 한 것이다. 국내 모바일 메신저 시장은 카카오톡이 선점한 상태이나 글로벌시장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시점에서다.
업계에서는 두 회사의 합병법인 다음카카오가 시너지효과를 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카카오가 보유한 뛰어난 모바일 플랫폼, 다음이 보유한 국내 1위 모바일 광고 플랫폼과 검색광고 네트워크 등 우수한 마케팅 플랫폼을 기반으로 향후 글로벌 시장과 모바일 사업에 강력한 추진력과 발판을 확보하게 됐다는 평가다. 또 빠르게 변화하는 글로벌 트렌드에 신속히 대응, IT-모바일 산업을 선도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게 됐다는 분석도 곁들였다.
이에 따라 김 의장이 통합법인인 다음카카오를 글로벌시장에서 어떤 역경을 딛고 키워나갈지가 또 다른 관전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김범수 카카오 의장 학력과 경력>
◆ 경력사항
1986년 건대사대부고졸
1990년 서울대 산업공학과졸
1992년 同대학원 산업공학과졸
◆ 경력사항
1992년 삼성SDS 입사
1998년 한게임커뮤니케이션 설립ㆍ대표이사 사장
2002~2006년 NHN(주) 대표이사 사장
2002년 한국인터넷게임협회 회장
2003~2004년 한국게임산업개발원 이사
2004년 벤처기업협회 부회장
2004~2006년 한국게임산업협회 회장
2007년 NHN(주) USA 대표이사
2007~2008년 NHN(주) 비상근이사
2008년 아이위랩 등기이사
2010년 同대표
2011년 카카오 이사회 의장(현)
2011년 국가지식재산위원회 민간위원(현)
[뉴스핌 Newspim] 양창균 기자 (yangck@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