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의 정치가 사라진 2013년 정기국회 풍경을 보며
“산에는 골산(骨山)과 육산(肉山)이 있다. 골산은 바위가 많고 계곡이 깊은 산이고 육산은 흙이 많고 둥근 산을 말한다. 내 관상은 육산보다는 골산에 가까워 수염으로 조림(造林)을 하면 주변사람들에게 주는 인상이 더 편안해질 것 같다는 말에 수염을 기르게 됐다.”
‘박근혜정부의 설계자’로 불리는 유민봉 국정기획수석이 24일 청와대 출입기자 몇 명과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수염을 기른 이유를 묻자 대답한 말이다.
유 수석에게 수염으로 조림을 하라고 권유한 사람은 지난 2011년 입적한 봉철스님이다. 청불회장(청와대 불교신자들의 모임)을 맡고 있는 유 수석이 불교에 입문하게 된 계기도 1977년 성균관대 행정학과 2학년 재학 중 봉철스님을 만나면서다. 유 수석은 당시 행정고시 공부를 위해 경북 영주 소백산 양백정사를 찾았다가 봉철스님을 만나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유 수석은 “성균관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책을 쓸 때는 집중할 필요가 있어 스님 곁에 머물며 집필을 하곤 했다. 2005년 안식년을 맞아 글을 쓰기 위해 스님을 다시 찾아뵀는데 그때 해주신 말씀이 골산과 육산”이라고 소개했다.
남달리 몸에 털이 많은 편인 유 수석은 당시 글 쓰는 데 집중하다보니 자연스레 면도를 하지 않아 수염이 얼굴을 가리게 됐다. 이를 본 봉철스님이 유 수석에게 수염을 길러 ‘조림’을 하면 나무가 부족한 ‘골산’의 단점을 가리게 돼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가 더 편안해질 것이라고 권유했다는 것이다.
이때 집필 중이던 유 수석을 찾아온 부인과 딸이 수염 기른 가장의 모습을 보고 “괜찮다”고 칭찬을 한 것도 ‘청와대 백발도사’ 유민봉이 탄생하게 된 계기가 됐다. 10년 전 같은 상황에서 수염을 기른 가장의 모습에 대해선 자못 비판적이었던 부인과 딸의 변심이다. 혹은 세월이란 선물이 유 수석을 수염이 어울리는 넉넉한 남자로 변신시킨 것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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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봉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이 지난 5월 3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 대웅전에서 열린 제15대 청불회(靑佛會·청와대 불교신자 모임) 회장 취임 법회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사진제공: 조계종] |
36년 전 시작된 유 수석과 봉철스님 간의 관계는 유 수석이 ‘유발상좌’(머리를 기르는 불가의 제자)가 되면서 더욱 돈독해진다. 봉철스님으로부터 배운 참선으로 집중력을 배가시킨 유 수석은 1983년 23회 행정고시에 합격했으나 이듬해 공부에 뜻을 품고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대에서 정책학을 공부하고 오하이오주립대 대학원에서 행정학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유 수석의 평생 스승인 봉철스님은 하버드대 출신의 눈푸른 수행자 현각스님도 제자로 키웠다. 양백정사가 있는 경북 영주 일대에서는 ‘욕쟁이 스님’으로 알려졌을 정도로 격식을 따지지 않았다.아무튼 수염 있는 남자로 변신하며 단점을 상쇄시킨 덕분인지 유 수석은 교수로 재직한 성균관대나 청와대에서 꽤 인기 있는 남자로 통한다. 칭찬에 인색한 청와대 출입기자들도 넉넉함이 느껴지는 유 수석에게 상당한 호감을 표시할 정도다.
유 수석의 수염을 길게 얘기하는 이유는 지난 2일 시작된 정기국회가 공전하고 있는 작금의 정치현실이 꼭 조림되지 않은 골산을 보는 것 같아서다. 청(靑)은 청대로, 여(與)는 여대로, 야(野)는 야대로 타협이란 조림에는 관심이 없고 내가 가진 바위의 크기와 단단함만 재고 있는 풍경이 안타깝다.
박근혜정부 청와대 분위기도 굳이 비유하자면 ‘육산’보다는 ‘골산’에 가깝다. 아무래도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나서 선친 박정희 전 대통령이 했던 산림녹화사업을 정치권으로 확산시켜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골산론’을 마친 유 수석은 청와대 내의 엄숙한 분위기 때문인지 수염을 기르는 것이 조심스럽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래선 안 된다. 안 그래도 골산인 청와대에 ‘조림된 수석’이라도 있어야 사람 사는 맛이 나지 않겠는가!
[뉴스핌 Newspim] 이영태 정경부장 (medialyt@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