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장윤원 기자] 한 남자가 딸의 배웅을 받으며 호화로운 집을 나선다. 경호원의 호위를 뒤로한 남자는 고급 리무진 '홀리 모터스'에 오른다. 그렇게 오늘도 이 남자는 혼돈의 소용돌이로 한 걸음씩 빠져 들어간다.
홀리 모터스에서 내릴 때마다 남자 오스카(드니 라방)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각양각색의 역할을 '연기'한다. 그는 허리가 굽은 걸인이 돼 구걸을 하다가도, 딸을 마중나가는 아버지로 변신한다. 잔혹한 암살자가 되나 싶더니, 어느새 애꾸눈의 광인이 돼 있다.
오스카의 진짜 삶과 연기를 구분짓는 것은 그의 족적을 열심히 따라가는 와중에 어느 샌가 의미가 없어진다. 관객들은 오스카가 연기를 하는 것인지, 맡은 역할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처한다.
'현실'과 '연기'는 분리되는 듯 하면서도 수시로 겹쳐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이 문제는 우리 삶과 맞닿아 있다. 우리도 오스카와 마찬가지로 실제 삶과 가상의 삶 사이에서 헤매고 있지 않나. 어디까지가 우리의 진짜 경험인지, 무엇이 진정한 '나'인지 혼란스러운 시대. 영화 '홀리 모터스'는 우리 시대와 삶의 단면을 대변한다.
'홀리 모터스'의 오스카 역을 맡은 드니 라방은 1982년 '레미제라블'로 데뷔 후, '소년 소녀를 만나다(1984)'를 통해 레오스 카락스 감독과 만났다. 그 후 레오스 카락스 감독의 '나쁜 피(1986)' '퐁네프의 연인들(1991)', 옴니버스 '도쿄!(2008)'에 이어 '홀리 모터스(2012)'까지 총 다섯 편의 영화를 함께 했다.
“만약 드니 라방이 거절했다면, 그 역할(오스카)은 론 채니 혹은 찰리 채플린 피어 로어, 미켈 시몬에게 제안했을 것이다.”
레오스 카락스 감독은 프랑스 평론가 쟝 미셸 프로동과 서면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가 언급한 론 채니나 찰리 채플린은 모두 사망했다. 드니 라방이 배역을 거절했다면 이 영화는 빛을 보지 못했으리란 것을 둘러 이야기한 것이다.
감독의 예감은 적중했다. '홀리 모터스'를 통해 1인11역을 거뜬히 소화한 드니 라방은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을 정도의 폭넓은 연기를 펼친다. '연기를 한다'기 보단 '가상의 인물로 살아간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드니 라방 외에 누가 이런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비로소 안도한다.
레오스 카락스 감독은 스물 두 살 나이에 첫 작품 '소년, 소녀를 만나다(1984)'로 프랑스 영화계에 데뷔, 천재성을 입증하며 뤽 베송, 장 자크베네와 함께 1990년대 프랑스 영화계를 대표해 온 거장이다.
'폴라 X(1999년)' 이후 레오스 카락스 감독이 13년 만에 세상에 내놓은 장편 영화 '홀리 모터스'는 칸영화제 젊은 영화상 수상을 시작으로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총 24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고 17개 부문 수상이라는 쾌거를 이뤘다. 또 프랑스의 저명한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 등 13개 매체가 선정한 '올해의 영화 TOP1'으로 뽑히며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다만 대중성이나 오락성과 거리가 먼 예술 영화의 범주에 속하는 만큼 대중의 반응이 어떨지는 두고 봐야 할 듯하다. 그러나 '홀리 모터스'는 놀라운 작품성은 물론 감독의 천재성이 빛나는 창의적이고 독특한 구성으로 또 한번 영화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뉴스핌 Newspim] 장윤원 기자 (yunwon@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