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억엔 투입키로..회생 안될 경우 피해 국민들에게로
[뉴스핌=김윤경 국제전문기자] 한때 찬란했던 일본의 전자 및 반도체 산업은 지금 깊은 수렁에 빠져 있다. 엘피다는 결국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에 팔렸고, 생존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는 세계 최대 자동차용 마이크로 콘트롤러 칩 생산업체 르네사스 일렉트로닉스는 정부로부터 공적자금을 투입받아 겨우 숨을 이어가게 됐다.
11일 일본 언론들에 따르면 르네사스에 투입되는 공적자금 규모는 1500억엔(18억달러)에 이른다. 이렇게 되면 르네사스의 주인은 정부로 바뀐다. 국유화되는 것이다. 정부와 대기업이 공동 출자해 만든 펀드인 산업혁신기구(INCJ)가 르네사스 지분의 약 70%를 갖게 된다. INCJ가 3자배정 형태로 발행되는 르네사스 주식을 주당 120엔에 총 1383억5000만엔 규모를 사들이며, 민간에서는 도요타와 닛산, 캐논, 파나소닉 등 8개 사가 5.82%의 지분을 갖게 된다.
전 세계적인 불황으로 반도체 수요가 줄어든 가운데 삼성전자 등과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르네사스는 계속해서 막대한 손실을 내고 있다.
이런 사망 직전의 르네사스에 정부가 산소호흡기를 댄다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반도체 산업계가 어둠 속에 잠기면서 엘피다를 외국에 팔아야 했던 '아픈' 경험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 정부의 확고한 방침이었기 때문. 르네사스가 외국에 넘어갈 경우 기술유출은 물론, 도요타 등 일본 자동차 업체들이 더 이상 안정적으로 부품을 공급받을 수 없어 제조업의 기반이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작용했다. 르네사스에 미국계 사모펀드 KKR이 군침을 흘렸던 것도 공적자금 투입을 서두르게 한 계기로 보인다.
일본에선 이처럼 기업 및 산업이 어려움에 빠지면 공식처럼 공적자금 투입이 이뤄지곤 한다. 금융권에선 그동안 대상이 은행과 신용금고에만 한정됐던 것을 증권, 보험사까지 확대할 방침이며, 대대적으로 흘러들고 있는 공적자금의 수혈이 멈출 경우 증시가 망가질 수 있을 것이란 얘기까지 나온다. 늪에 빠진 전자업계에서도 하나 둘 정부 자금에 손을 벌리고 있다. 지난해 동일본 지진 및 원전 사고 등으로 어려워진 기업과 은행들에도 공적자금이 '정답'인 것처럼 신속히 투입됐다.
공적자금의 신속한 투입으로 산업 시스템 붕괴를 막는 것은 중요한 정부의 임무다. 일본항공(JAL)의 경우 공적자금 투입으로 살아나 증시에 재상장하며 부활한 '좋은 예'이기도 하다. 그러나 공적자금을 투입한 기업이 회생하지 못할 경우 막대한 적자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일본 재정은 크게 악화될 수 있다. 지난 9월 말 현재 일본 중앙정부의 부채는 983조2950억엔(1경3477조원)으로 사상 최고액을 기록하고 있다.
일본은 이미 공적자금 투입의 '나쁜 예'를 경험하기도 했다. 1990년대 후반 부동산 버블이 꺼지면서 금융대란이 밀려오자 일본 정부는 95~98년 4년간에만 9조3000억엔에 이르는 공적자금을 투입했지만 대형 은행들이 연쇄파산하면서 막대한 재정적자가 누적되는 후유증을 앓아야 했다. 또한 미국발 금융위기를 통해서도 '대마(大馬)는 죽도록 해선 안된다'는 게 정답이 아님을 알았을 법하지만 일본은 계속 공적자금 카드로 버티고 있다.
공적자금 투입의 역사는 과거 '도쿠세이(德政)'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여진다. 도쿠세이는 본래 천재지변이나 역병 같은 것이 군주의 부덕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여겨 그것을 막아내고자 가난한 사람들의 채무를 면제해주거나 한 선정(善政)과 인덕(仁徳)있는 정치를 실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이 가마쿠라(鎌倉) 시대 이후엔 쇼군(將軍)이 직속 무사 즉 고케닌(御家人)에게 특혜를 주는 것처럼 변질되었다. 고케닌에게 돈을 빌려주고 영지를 담보로 잡고 있던 상인들이 갑자기 저당잡은 영지를 그냥 내줘야 했던 1273년의 `고케닌 영지회복령`이 대표적이다. 상인들은 엄청난 손실을 겪어야만 했다.
공적자금은 납세자들이 만든 돈이다. 이 돈을 정부가 부실기업과 산업을 살리기 위해 무작정 푼다면, 그리고 그것이 성공하지 못하고 막대한 부실로 이어지게 될 경우엔 결국 피해는 납세자들에게 돌아오게 돼 있다.
르네사스는 올해에만 7000명의 인원을 감축했고 3년 내에 일본내 18개 공장 가운데 8개를 팔거나 폐쇄할 방침이다. 이외에도 다양한 비용절감 방법을 구상중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내년 3월 끝내는 회계연도에는 210억엔의 영업이익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다. 또 추가로 공적자금을 요구해 인수합병(M&A)을 통한 해외 진출을 꾀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비용절감 같은 구조조정과 공적자금 지원으로 일단 숨을 돌리는 것만이 능사인 지는 아직 장담하기 어렵다. 결국 회생하지 못하고 주저앉는다면 피해는 일본 국민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또 IHS 아이서플라이 도쿄의 한 관계자는 자금 공급에 고객사들의 돈을 받는 것이 결국 발목을 잡힐 여지를 주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이 관계자는 "도요타 같은 고객사들까지 함께 돈을 공급하는 것은 르네사스에게 일단은 도움이 되겠지만 이들의 입김이 세지면서 르네사스의 해외 사업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뉴스핌 Newspim] 김윤경 국제전문기자 (s914@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