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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 박현주, 위기에서 건진 승리

기사입력 : 2008년02월07일 15:31

최종수정 : 2008년02월07일 15:31

박현주 미래에셋회장의 휴먼스토리 <2>

[뉴스핌 Newspim]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은 살아있는 자본시장의 최고 스타다. 여의도 증권가는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자금시장의 물꼬가 그의 행보에 따라 뒤바뀐다.

10여년 샐러리맨 생활을 청산하고 회사를 만든지 불과 10년. 박현주 회장이 사실상 한국 자본시장을 완전 접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그는 금융권 샐러리맨의 우상이다. 너도 나도 그의 성공스토리에 주목한다.

잘 나가던 대기업도 줄줄이 나자빠지던 IMF시절 소규모 금융회사를 차려 탄탄대로를 달렸고 지금 최고가 된 박현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존경심을 갖고 벤치마킹을 시도한다.

증권가에서, 자산운용가에서 가장 가고 싶은 직장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많은 이들이 주저하지 않고 미래에셋을 꼽는다. 그 때문인지 이제 미래에셋은 금융계의 사관학교라고 할 정도로 우수한 인력을 보유하게 됐고 또 배출하고 있다.

그 중심에 박현주 회장이 있다.

고도성장을 이루며 자본시장에서 신화적 인물로 자리잡은 그는 어떤 사람일까. 그의 시장에 대한 통찰력과 비즈니스 마인드는 태생부터 부여받은 천부적인 기질일까.

화려한 무대 이면에는 일반인들이 보지 못하는 곳이 있게 마련이다. 거대한 업적뒤에는 드러나지 않은 스타들의 고민과 상처가 배어있다. 그를 신화로 이끈 동인들, 최고라는 단어 이전에 그가 겪어온 행보들, 지금의 자리에 서기까지 그를 지켜봤던 시장의 평판들을 들어봤다.

이번 기획은 그의 성공스토리라기 보다는 인간적인 휴먼스토리에 초점을 뒀다. 6회에 걸친 기획 시리즈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기대와 성원을 바란다.<편집자주>

<시리즈 목차>

①한국의 워렌버핏, 박현주 회장
② 위기에서 건진 승리
③ 과묵했던 소년 박현주...그가?
④ 박현주의 무노조 경영
⑤ 박현주회장의 7년전 꿈은 어디로...
⑥ 박현주의 사람들




[뉴스핌=홍승훈 기자]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1997년 10월은 잊을 수가 없다. 60년대부터 고도성장을 이룩하며 실패를 모르고 살아온 우리에게 처음으로 IMF라는 환란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내로라하는 대기업과 중견기업이 부도를 냈고 증권가는 풍비박산이 났다. 숱한 샐러리맨들이 길거리에 내몰렸다. 지금도 "한때는 떵떵거리며 살았는데..."라고 하소연하는 이들의 상당수가 당시 자산이 거덜나거나 반토막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박현주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냈다.

동양종금증권을 거쳐 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을 거치며 최연소 지점장, 최연소 임원, 전국 최고약정 등의 증권가 신화를 써가며 승승장구하던 그는 외환위기가 닥치기 불과 3개월 전인 97년 6월 지금의 '박현주 사단'으로 불리는 몇몇 선수들과 함께 회사를 그만둔다.

이 때부터 박현주는 '맨땅에 헤딩'을 시작했다.

당시 동원증권에선 사장부터 임직원까지 나서 박 회장을 잡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그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당시 박 회장과 함께 일했던 관계자는 "박 회장이 나가면서 중앙지점 약정의 절반 이상이 빠져 나갔다. 타격이 상당했던 것으로 기억된다"고 회상했다.


◆ 위기를 기회로 '도약'

미래에셋을 설립한 지 3개월도 채 안돼 외환위기가 도래했다. 금융시장도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박 회장은 달랐다. 증시폭락과 금리인상, 채권가격 급등을 예상하고 채권에 풀 배팅한 것이다. 98년 초 시중금리가 연 30%를 향해 치달을 때 미래에셋은 운용자금 200억원을 채권에 풀 베팅해 큰 수익을 거뒀다.

박 회장이 2003년 신동아를 통해 밝힌 당시 소회에 따르면 당시 채권에 베팅한 것은 경제구조상 금리가 더 오르긴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같은 해 3월 예상대로 시중금리가 20%대로 급락하면서 채권 값이 급등했고 덕분에 50억원을 벌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시대흐름과 큰 장이 서는 때를 감지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이 힘을 발휘한 것.

이후 업계 최초로 뮤추얼펀드를 만들어 실명을 내건 '박현주 펀드'를 출시했고 이것이 대박을 터뜨리며 상승가도를 달렸다. 99년 24억원을 투자했던 '다음'이 6개월만에 주가가 폭등하며 1000억원에 가까운 매매차익을 거둔 것은 지금까지 시장에서 회자되고 있다.

이어 지난 2000년에는 미래에셋증권을 출범시키며 위탁수수료 인하라는 승부수로 증권업계 혁명을 주도했다. 최근 들어선 업계 최초로 아시아 등 세계 곳곳에 해외법인을 만들어 공격적으로 진출하는 등 단기 급성장의 신화를 이어가고 있다.

금융자본의 영화산업 첫 진출도 박 회장의 투자 혜안을 보여준 사례다. 2001년 한국 영화계를 들썩이게 한 영화 '친구'의 투자사로 큰 이익을 남겼다.

영화 '친구'는 미래에셋이 코리아픽쳐스라는 투자배급사를 통해 일궈낸 작품. 당시 코리아픽쳐스는 미래에셋 박현주 대표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으면서 '친구' 대박을 터뜨린 것.

다만 이후 작품들이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자 작은 손실에도 인내하지 못하는 금융자본의 실상은 곧 드러났다.

2001년 하반기에 투자를 시작한 미래에셋은 2003년초 일체의 투자 활동을 중단했다. 이는 '친구'를 통해 수백억원 대의 이윤을 남긴 지 불과 1년 반만의 일이다.

당시 이에 관여했던 한 지인은 "주식시장에선 적립식을 통해 장기 투자를 외치고 유도하면서 정작 미래에셋은 영화쪽에 2년도 채 투자를 안했다. 금융자본의 회의를 절감했던 때다"고 토로했다.

한편 미래에셋그룹은 최근 계열사인 미래에셋캐피탈과 미래에셋벤처투자 등을 통해 100억원 규모의 영화 펀드를 운용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경쟁자가 없었다

미래에셋이 공격경영을 펼치며 승승장구할때 당시 국내 투신업계는 뭘 했나. 방만한 경영으로 헤매고 있었다는 것이 가장 근접한 평가다. 이 또한 미래에셋 급성장의 주요 배경이었다.

교보투신 김석규 대표는 "당시 박현주 회장보다 실력 있는 사람도 많았다. 다만 대형투신사들은 관료적인 시스템에 길들여져 선수를 키울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고 전했다.

결국 낙하산 인사로 일관하며 임기 채우기에 바빴던 3투신이 오너 이자 매니저로서 의사결정이 빠를 수밖에 없는 미래에셋에 자리를 내준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소위 박현주 펀드로 한 건 올린 박 회장은 뮤추얼펀드가 위기를 맞자 이번엔 적립식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미래에셋 성장의 발판으로 국민은행 등 은행을 꼽는 경우가 많은데 2002~2003년 국내 최대 점포망을 갖춘 국민은행 등에 적립식펀드를 깔아뒀고, 이후 장이 오르면서 미래에셋은 금융권 다크호스로 부각됐다.

당시 박 회장은 펀드의 90% 이상을 팔던 은행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은행내 광주일고 실세들이 펀드를 많이 사줘 이후 펀드를 2000억~3000억원씩 모으는 동력이 됐다는 얘기도 있다. 당시 박 회장의 형 태성씨와 고교동창인 김정태 국민은행장의 도움도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한국투신 한 펀드매니저는 "한투 내부에서도 적립식을 추진하자는 말이 상당히 많았지만 경영진의 의사결정이 안 떨어졌다. 사실 적립식은 매달 조금씩 들어가기 때문에 고객들이 수익률에 둔감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이를 자산기반 확충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지만 낙하산 인사로 점철된 당시 관례 속에서 경영진의 책임있는 의사결정력은 전무했다"고 꼬집었다.


◆ 옛 동료들이 말하는 박현주

과거 박 회장과 함께 지점 등에서 일해왔던 이들은 그를 어떻게 기억할까. 취재도중 만난 사람들은 10여년 이상 세월이 흘렀음에도 박 회장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것들을 또렷이 기억해냈다. 인상깊은 상사였다는 얘기다.

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 시절 중앙지점에 함께 근무했던 이의 전언이다.

"당시 직원들에게 기업탐방을 시키고 리포트도 직접 쓰게 했다. 당시엔 이런 지점이 거의 없었다. 주 1회 리포트를 내는데 이를 자세히 본다. 감각을 통한 매매는 절대 못하게 했으며 철저한 분석에 의한 투자를 지시했다. 또 신입사원에게 기업탐방을 시켰는데 이게 허를 찌른 책략이다. 고참들이 이미 다 아는 것으로 판단하고 놓치는 부분을 신입들은 격의 없이 모두 적어온다. 박 회장은 이같은 내용을 참고했고 베팅에 활용했다."

물론 그도 인간인데 실수가 없었겠는가. 박 회장의 단점을 묻는 기자에게 한참을 생각하던 그는 "본인이 꺼렸거나, 아니라고 판단했던 종목이 오를 땐 회의 자체를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자존심이 강했다. 물론 시장흐름과 자신의 견해가 안 맞다고 판단해 불참함으로써 직원들의 견해를 존중했던 측면도 있다"고 기억했다.

인간적으로는 어떠했을까. 또 다른 지점 관계자의 말이다.

"카리스마가 아주 강했다. 직원들을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그의 지시나 말에 토를 다는 이들이 하나도 없었다. 반면 회식자리에선 발라드 위주의 신곡을 즐겨 불렀고, 여성들과 블루스도 잘 추는 등 분위기를 주도했다. 부하들 진급에도 항상 신경을 써줬다. 때문에 동기들 중 그의 밑에 있는 직원들은 항상 먼저 승진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를 더 잘 따랐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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