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핵심 요약
beta- 북경 798은 2003년 예술가들이 들어가 살렸다.
- 2005년 문화창의산업지구로 지정되며 세계적 명소가 됐다.
- 그러나 임대료 상승으로 예술은 다시 외곽으로 밀려났다.
!AI가 자동 생성한 요약으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어요.
버려진 공간은 언제나 두 가지 운명 앞에 선다. 철거되거나, 다시 숨을 쉬거나. 그리고 그 두 번째 가능성이 열리는 순간에는 대개 예술가가 먼저 들어간다. 임대료가 낮은 곳, 규격화되지 않은 공간, 아무것도 강요 받지 않는 자리. 예술가는 본능적으로 그런 공간의 냄새를 맡는다.
처음 북경에 발을 디딘 건 2003년이었다. 환율이 1200원을 갓 넘던 시점, 미술계 인사들이 북경으로 몰려가기 시작하고 중국 미술이 유럽 전역 미술관과 영향력 있는 공간에서 대형 전시를 열던 시절이었다. 선배의 제안으로 낯선 북경 798을 처음 방문했을 때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막 개발되는 촌스러운 동네에 갑자기 극도로 세련된 현대 미술이 펼쳐지는 기이한 경험이었다. 부서져 가는 공장, 말도 안 되는 높이와 크기의 공간, 정비되지 않은 길거리, 그 위에서 벌어지는 설치와 퍼포먼스들. 이 버려진 공장지대는 산업화 시대의 흔적과 현대 예술이 뒤섞여, 다른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독특한 게니우스 로키를 뿜어내고 있었다.

798이 자리한 곳은 북경 차오양구 다산쯔(大山子) 지역이다. 이곳은 냉전 초기인 1950년대, 동독의 지원으로 건설된 대규모 군수 공장 단지였다. 동독 데사우의 건축 기관이 설계를 맡아 바우하우스 공법을 적용했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798의 건축적 시그니처이기도 한 거치형(锯齿形) 경사 지붕이다.
톱니 모양으로 연속된 북향 채광창은 직사광선을 차단하면서도 균일한 빛을 실내로 끌어들이는 구조로, 드넓은 무주(無柱) 공간을 가능하게 한 당시 가장 선진적인 공업건축 공법이었다. 이 공간이 훗날 예술가들을 불러들인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바우하우스는 원래부터 예술과 기술의 통합을 꿈꿨던 사상이었으니.
2000년대 초, 해외 유학 경험이 있는 작가들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이 빈 공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798 조직위원장을 맡은 황루이와 프랑스인 앙그레미는 해외 경험을 살려 공간을 가꾸고 작가와 갤러리들을 이끌었다. 국가나 자본의 개입 없이 예술가 커뮤니티가 유기적으로 형성된 이 흐름은, 2003년 철거 위기를 맞았을 때도 스스로 "재조(再造)798" 운동을 조직해 공간을 지켜냈다.
원래 2008년 북경 올림픽을 앞두고 이 일대는 아파트 단지로 개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예술가들의 끈질긴 저항과 국제적 관심이 중국 정부의 판단을 바꾸었다. 2005년, 798은 베이징시 문화창의산업 집적지로 공식 지정되었다. UCCA, 페이스 갤러리 등 세계적 기관이 입주했고 중국 당대미술 거래의 중심지로 급부상했다. 전 세계 미술인들이 반드시 방문하거나 전시하고 싶은 곳으로 798의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버려진 공장지대가 예술 공간으로 변모하면서 지역이 살아나는 사례는 비단 북경에만 있지 않다.
1981년까지 런던에 전기를 공급하던 뱅크사이드 화력발전소는 폐쇄 후 철거 논란 끝에 스위스 건축 사무소 헤르조그 & 드 뫼롱의 설계로 2000년 테이트 모던으로 다시 태어났다. 낙후된 사우스워크 구에 1억 파운드의 경제 효과와 3,000여 개의 일자리를 창출했고, 현재 연간 450만 명 이상이 찾는 영국 최대 현대미술관이 됐다. 템스강 건너 세인트폴 대성당과 마주보는 굴뚝이 그대로 서 있는 것이 이 공간의 핵심이다. 산업의 흉터를 지우지 않고 예술의 언어로 옮겨낸 것.
1986년 폐광된 독일 루르 지방의 졸페라인 탄광 단지는 다른 속도를 선택했다. 철거 대신 보존, 그리고 기다림. 수십 년에 걸쳐 디자인 스쿨, 루르 박물관, 스케이트 파크, 야외 공연장으로 천천히 전환된 이곳은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공간이 스스로 용도를 찾도록 서두르지 않은 것이 전략이었다. 예술가가 아니라 지역 공동체와 행정이 함께 속도를 조율하며 밀도를 쌓았다는 점에서 798과는 전혀 다른 문법이다.

캐나다 토론토의 디스틸러리 디스트릭트는 또 다른 경우다. 19세기 굿어햄 앤 워츠 위스키 증류소 단지를 2001년 민간 개발사가 매입해 빅토리아 시대 벽돌 건물 45채를 보존하며 갤러리·공방·카페·극장 복합지구로 전환, 2003년 문을 열었다. 정부 지원 없이 민간이 주도했고, 상업성과 예술성의 균형을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설계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예술이 먼저 들어온 것이 아니라, 예술과 상업이 동시에 기획됐다. 798이 걸어온 길과는 출발점부터 달랐다.
세 곳의 공간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공장의 시간을 되살렸다. 그러나 그 어느 곳도 798이 통과한 세 개의 문을 모두 지나지는 않았다. 도시이론가 찰스 랜드리가 말한 '창조도시'의 씨앗은 예술가들이 자발적으로 빈 공장을 점거하던 순간에 심어졌고, 리처드 플로리다가 주목한 '창조계급'의 집결은 UCCA와 페이스 갤러리가 들어서고 세계의 컬렉터들이 몰려들던 시절에 완성됐으며, 샤론 주킨이 경고한 '젠트리피케이션의 역설' — 예술이 공간을 살리지만, 살아난 공간이 예술을 내쫓는 구조 — 은 임대료가 작업실을 밀어내던 바로 그 시간에 조용히 작동하기 시작했다. 자발, 제도화, 브랜드화. 이 세 단계를 하나의 공간이 압축적으로 통과한 사례는 세계 어디에서도 798만큼 선명하지 않다.
나는 798의 가장 극적인 분기점인 2004년부터 2012년까지 북경에서 일하며 이 공간의 변모를 현장에서 온몸으로 겪었다. 초창기의 798은 날것 그대로의 생생함과 경계 없는 시도로 가득했다. 카페 옆에서 수다를 떠는 이들이 장샤오강, 팡리준 같은 당대 최고의 작가들이었고, 외국계 대형 공간에서는 아니쉬 카푸어, 다니엘 뷔렌 같은 세계적 작가들이 친구처럼 맞이해주는 시절이었다. 예술과 생활이 분리되지 않았고, 실험과 실패가 같은 공간에 공존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날것 같던 공간들이 정비되고, 카페와 상점이 들어서고, 자본으로만 세워진 색깔 없는 대형 갤러리들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임대료가 치솟았다. 작가들의 작업실은 외곽으로 밀려났다. 나 역시 그 시기 두 개의 공간을 관리하고 컨설팅을 했지만, 끝내 높아진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예술가 스튜디오 밀집 지역인 헤이차오(黑桥)로 옮겼다.

그럼에도 798의 변모가 가져온 긍정적인 흐름도 있었다.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한 작가들과 대안 공간들이 차오창띠(草场地), 헤이차오, 송장(宋庄) 같은 외곽으로 이동하면서, 특히 농촌 지역이었던 송장에는 대규모 예술 단지가 새롭게 형성됐다. 2005년 예술특구 공식 지정 이후 갤러리는 2년 만에 19개에서 87개로 늘었고, 중국 당대 작가들의 해외 초청, 중국 회화 경매 최고가 경신 등 중국 미술 시장은 전례 없는 호황을 맞이했다.
방문객은 주로 외국인과 미술계 전문가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2024년 기준 1,200만 명이 찾는 798은 다른 공간이 되어 있다. 중국 유수 브랜드의 집결지이자 팝업 스토어와 현장 체험 이벤트가 펼쳐지는 마케팅과 상업의 공간. 어떤 면에서는 성수동과 닮아 있다. 예술이 만든 공간을 자본이 완성한, 그 익숙한 풍경.
공간의 시간은 그렇게 흐른다. 날것의 에너지가 밀도를 만들고, 밀도가 가치가 되고, 가치가 자본을 부르고, 자본이 날것을 지운다. 지금의 798은 그 순환의 고리 안에서 어디쯤 서 있을까? 흘러가는 풍경 너머로 깊은 질문이 남는다.(2편에서 계속)
*전혜연은 여성인권·미디어아트·도시교류를 통해 예술을 사회변화의 도구로 만드는 행동하는 큐레이터다. 2014년 글렌데일 '위안부의 날 특별전'을 시작으로 소녀상 지키기 국제 연대전을 이끌었고, 2017년부터 글렌데일시 공식 행사로 승격, 8개국 100여 명 작가가 참여했다. 국내에선 《여성인권이야기: 행진》을 성북, 부산, 보은, 고성, 포항, 인천, 김포, 파주 등 지방정부와 함께 이어가고 있다. 2018 평창올림픽 미디어아트 기획을 계기로 공공 미디어아트의 사회적 소통 가능성을 열었고, 수원문화축전·국립극장 등에서 지역 역사와 장소성을 담은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김포-글렌데일 교류전은 '경계'와 '자유'를 주제로 일상 공간에 공공미술을 설치했으며, 2024년에는 김포의 지역 의제를 다룬 '다양성'이란 전시로 네 지역을 아우르는 28명 작가 참여한 대규모 미디어아트전도 기획했다. 최근에는 사이버불링을 여성인권 의제로 삼아 국회 논의·전시·온라인 캠페인을 준비 중이다. 그는 예술이 비판에서 그치지 않고 실질적 대안과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다. 현 국제예술생태연구협회 대표, 귀주사범대 동아시아미디어센터 책임연구원, 비영리 단체 문화유목민 대표, 전시 기획사 SR Comm 대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