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뉴스핌] 백운학 기자 = "경로당 말고, 이젠 직장이 있어요."
12일 오전 충북의 한 전통시장 인근 작업장. 위생모를 눌러 쓴 어르신들이 둘러앉아 산처럼 쌓인 마늘 꼭지를 정성스레 다듬는다.

예전 같으면 경로당에서 TV를 보며 시간을 보냈을 이들은 이제 이곳을 "아침마다 출근하는 직장"이라고 부른다. "노인들 아침 출근이 여기예요, 직장이에요." 한 참여자는 "아침 8시 반이면 다들 먼저 나와서 자리 잡고 9시 시작하면 빈자리가 없다"며 웃었다.
하루 1시간 30분에서 3시간 남짓 이어지는 작업이지만, 이들에게는 단순한 '소일'이 아니라 '내가 할 일이 생겼다'는 신호다.
이날 충북도에 따르면 '일하는 밥퍼' 누적 참여 인원은 사업 시행 1년 9개월 만에 50만 명을 넘어섰다. 도내 11개 시·군 193개 경로당과 작업장에서 약 4천 명이 매일같이 이런 '출근길'을 이어가고 있다. 작업장에서는 농산물 손질부터 공산품 단순 조립, 상품 포장까지 각 지역 실정에 맞는 일감이 쉴 새 없이 돌아간다.
어르신들이 받는 실비는 온누리상품권과 지역화폐다. 하루 최대 1만5000원, 시간당 5000원 안팎의 상품권이 손에 쥐어지면 사용처는 대부분 바로 발길이 닿는 전통시장이다.
한 참여자는 "들기름도 바꿔 먹고 반찬도 사 먹으니 요새는 반찬 걱정은 없다"며 "그동안 받기만 하던 신세에서 조금은 도와주는 사람 된 것 같다"고 했다.
충북도는 이런 구조를 '봉사를 통해 경제를 순환시키는 신개념 복지'라고 설명한다. 취약계층 노인과 장애인에게 소일거리를 제공하고 그 대가를 지역에서만 쓸 수 있는 상품권으로 지급해 복지 재원이 다시 지역 상권으로 돌아가도록 설계한 것이다.
'일하는 밥퍼'가 만든 가장 큰 변화는 시간표다. "그냥 공원에서 시간을 때웠다"던 노인들은 이제 시계를 보며 일정을 맞춘다. 한 실버봉사단장은 "대부분 공원이나 경로당에서 하루를 보내던 분들이 일을 하러 모이면서 표정부터 달라졌다"고 전했다.
현장에서는 이런 정서적 변화를 뒷받침하기 위해 안전교육과 건강관리 프로그램, 계절별 질환 예방 교육이 함께 진행된다. 웃음치료와 소규모 소통 프로그램도 더해져 단순 작업장을 넘어 노인·장애인의 '사회적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
충북도는 3월 중 시범적으로 인공지능(AI) 교육도 시작할 계획이다. 이 사업은 노인에서 장애인으로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장애인 대상 '일하는 밥퍼'는 올 1월 청주·충주·보은 등에서 시작됐는데 하루 150명 안팎이 참여할 정도로 호응이 크다. 일부 작업장은 휠체어나 보행 보조기 이용자가 편히 드나들 수 있도록 출입구를 정비하고 앉아서 할 수 있는 작업 위주로 일감을 구성했다.
'일하는 밥퍼'는 경로당 시범 운영과 전통시장 중심 확산을 거치며 참여 규모를 빠르게 키워왔다. 사업 초기에 10만 명을 채우는 데 약 10개월이 걸렸지만, 이후 40만 명을 추가하는 데는 9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현장의 입소문과 "한 번 해보니 계속 나오게 된다"는 체감이 수치를 끌어올린 셈이다.
충북도는 늘어나는 수요에 맞춰 종교 시설·복지관 등 유휴 공간을 작업장으로 추가 개소하고 도 내부 TF를 통해 기업·농가·소상공인의 일감을 발굴하고 있다.
김영환 충북지사는 "일하면서 동시에 건강을 되찾고 자존감을 회복하는 운동이 지금 우리 사회에 꼭 필요했다"며 "이 모델을 전국으로 확산해 대한민국 어르신 모두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50만 명 돌파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현장에서 효과가 검증됐다는 반증"이라고 강조했다.
충북도 관계자는 "어르신들이 스스로 '밥값을 번다'고 말씀하신다"며 "작은 일거리지만 경제적 도움, 자존감, 사회 참여 기회를 동시에 제공한다는 게 '일하는 밥퍼'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국무총리실 산하 범정부 자살대책추진본부도 이 사업을 노인 자살 예방 정책의 선도 사례로 꼽으며 사회적 고립 완화와 정서적 안정, 고령층 정신 건강 증진에 긍정적 영향을 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현장에서 만난 한 어르신은 "젊었을 땐 회사 출근이었고 지금은 밥퍼 출근"이라며 "나이 들어도 내가 할 일이 있다는 게 이렇게 고마운 줄 몰랐다"고 했다.
baek3413@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