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오영상 기자 = 미국 연방대법원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비상경제권한(IEEPA)을 근거로 한 관세 프로그램에 제동을 걸었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주요 교역 파트너들과 맺은 관세·무역 합의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못 박았다.
그러나 판결 이후 유럽연합(EU)이나 인도, 일본의 움직임을 보면, '법적 효력'과 별개로 각국이 협정을 어떻게 재해석하고 재조정하려는지 온도차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 미국 "관세는 계속, 합의도 그대로" 메시지
제이미슨 그리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22일(현지시간) CBS '페이스 더 네이션'에 출연해 "중국, EU, 일본, 한국 등과 맺은 양자 무역·관세 합의는 대법원 판결과 무관하게 유효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어느 나라도 '딜을 접겠다'고 말한 파트너는 없다"며, 이번 판결은 단지 IEEPA라는 특정 법적 통로를 막았을 뿐이고, 다른 법적 권한을 활용해 관세 정책을 이어가겠다고 강조했다.
백악관 고위 당국자는 "IEEPA 권한이 막히면서 기존 IEEPA 기반 관세는 글로벌 10%→15% 일률 관세(통상법 122조)로 대체되지만, 이는 '부과 수단의 변경'일 뿐 협정상 약속 그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 역시 "대법원은 '관세'를 부정한 게 아니라 특정 IEEPA 사용을 막았을 뿐"이라며, "대체 법률들이 오히려 더 강력하다"고 주장하며 15% 글로벌 관세를 선언했다.
요컨대 미국 측 논리는 "법적 통로는 갈아탔지만, 약속과 관세 정책의 방향성은 그대로"라는 것이다.

◆ EU "美 확약 있을 때까지 협정 비준 중단"
EU는 형식상으로는 "딜은 유효하다"는 미국의 메시지를 부정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입법 권한을 쥔 유럽의회, 그중에서도 무역위원회는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
유럽의회 국제무역위원회(ITC)의 베른트 랑게 위원장은 23일 긴급회의를 열고 이른바 '턴베리 합의'에 대한 입법 작업을 "포괄적 법적 평가와 미국 측의 명확한 확약이 있을 때까지" 중단하자고 제안하겠다고 밝혔다.
턴베리 합의는 EU가 미국산 공산품 등에 대한 관세를 낮추는 대신, 미국이 EU산 수출품 대부분에 15% 관세를 고정하고, 철강·알루미늄에는 50% 관세를 유지하는 구조다. 문제는 이 15% 관세 상당 부분이 IEEPA를 기반으로 설계돼 있었고, 대법원 판결로 그 법적 토대가 무효화됐다는 점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곧바로 통상법 122조를 근거로 한 '새 15% 글로벌 관세'를 도입했지만, 이는 150일 한시 조치로 의회 연장이 필요해 법적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랑게 위원장은 현재 상황을 "순수한 관세 혼돈"이라고 표현하며, 법적 근거와 적용 방식이 바뀐 이상 의회가 동일한 조건으로 합의를 비준하는 것은 무리라는 입장이다.
프랑스 등 주요 회원국에서도 "이 협정이 여전히 유효한지, 필요하다면 어떤 대응 조치를 취해야 할지 검토 중"이라는 목소리가 나오면서, EU는 '합의 파기' 대신 '비준 보류·재평가' 전략을 택하고 있다.
결국 미국이 말하는 "합의는 그대로"와 달리, EU는 "법적·정치적 조건이 바뀐 이상, 비준을 멈추고 다시 따져본다"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는 셈이다.
◆ 印, 무역 협상 일시 중단..."협정 재조정 필요"
인도는 이번 판결 후 처음으로 '실제 행동'에 나선 아시아 국가다. 인도 대표단은 미국과의 무역 협정 최종안을 확정하기 위해 23일부터 워싱턴을 방문하기로 했지만, 협상을 일시 중단하기로 했다.
이번 협상은 미국이 러시아산 석유 구매와 연계해 일부 인도산 수출품에 매긴 25% 징벌적 관세를 18%로 낮추는 대신, 인도가 향후 5년간 5000억 달러 규모의 미국산 에너지·항공기·기술 제품 등을 구매하는 패키지 딜이었다.
인도 상공부는 대법원 판결과 그 직후 발표된 10→15% 글로벌 관세 조치의 영향을 "면밀히 평가 중"이라며, 방문 연기 배경으로 "관세 체제를 둘러싼 불확실성"을 꼽았다.
상공부 관계자는 "양측(인도와 미국)은 인도 수석 협상 대표단의 방문이 최근 상황과 그 의미를 평가할 시간을 가진 후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이라며 "상호 편리한 날짜로 다시 일정을 잡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 다른 정부 관계자는 "미국이 법적 구조를 파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협상이 일시 중단됐다"며 "무역 협정의 윤곽을 다시 다듬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이미 발효된 협정을 둘러싼 EU와 달리, 아직 '막바지 조율' 단계였던 인도는 미국의 "딜은 그대로" 주장과 별개로, 판결 이후의 환경에서 조건을 다시 계산하겠다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볼 수 있다.

◆ 日 "합의 유지" 기조 속 5500억 달러 투자 계속
일본은 미국과의 합의를 흔들지 않겠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와 맺은 양자 무역 합의에 따라, 일본은 5년간 5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고, 가스 화력발전, 석유·가스 수출 터미널, 합성 다이아몬드 제조 등 1호 프로젝트도 이미 선정했다.
대법원 판결 이후 일본 정부는 "판결과 트럼프 행정부의 대응 내용을 면밀히 검토하고 적절히 대응하겠다"고 언급하면서도, 합의 자체를 재검토한다는 신호는 내지 않고 있다.
수출 품목 관세 체계가 IEEPA 기반에서 122조 기반 15% 글로벌 관세로 바뀐다 해도, 일본 입장에서는 이미 고율 관세와 각종 예외·쿼터 협상을 전제로 한 합의를 택한 만큼 "동맹·투자 레버리지"를 유지하는 쪽에 무게를 두는 모습이다.
일본은 미국의 "딜은 그대로"라는 주장에 가장 가깝게 발을 맞추는 쪽에 서 있지만, 동시에 향후 투자 실행과 세부 협상을 통해 실질 부담을 조정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결국 이번 판결 이후 핵심 질문은 '협정이 법적으로 무효가 됐느냐'가 아니라 "새로운 법적·정치적 환경에서 그 협정을 어떻게 재해석·재조정할 것인가"가 되고 있다.
미국의 "그대로 간다"는 선언과 달리, 주요 교역 상대국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판결 이후의 딜'을 다시 계산하는 중이다.
goldendog@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