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최신뉴스 GAM 라씨로
KYD 디데이
정치 국회·정당

속보

더보기

[KYD 폴리티션 스토리](상) 박용진 "역사 잃은 지혜, 잔꾀로 흐르고 민심 없는 정치, 술수로 흐른다"

기사입력 : 2025년01월14일 17:00

최종수정 : 2025년01월14일 17:00

1971년 전북 장수 출신, "학업에 열중 안했지만 나서는 아이"
전교조 결성 당시 고등학교 세 차례 교내 시위 주도, "가장 큰 충격"
학생 운동 거쳐 진보정당 운동, 민주당에서도 소신 지켜

[서울=뉴스핌] 채송무 기자 =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전 의원이 뉴스핌 KYD(Korea Youth Dream) '폴리티션스토리'에 출연해 어린 시절과 정치 입문 과정 및 가치관에 대해 이야기했다.

박 전 의원은 14일 오후 유튜브 채널 '뉴스핌TV'를 통해 공개된 폴리티션스토리에서 어린 시절에 "막 나서는 아이였다"고 회상했다. "학업에 열중하지는 않았지만 친구 관계는 좋았다"고 말했다.

박 전 의원은 고교 시절 은사였던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이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 당시 구속된 이후 세 번의 교내 시위를 주도한 것에 대해 "저에게 가장 큰 충격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최장수 대변인이었던 본인의 마지막 논평이었던 '역사 없는 지혜는 잔꾀로 흐르고, 민심 없는 정치는 술수로 흐른다'는 문구에 대해 "그런 원칙을 잘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살았다"고 말했다.

그는 1971년 전라북도 장수 출신으로, 집성촌이 있는 장계면에서 거주하다가 부친의 근무지 이동에 따라 전주시 태평동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진북초등학교를 다니다 1979년 부친이 서울로 이동하면서 서울화계초등학교에 전학해 졸업했다. 이후 신일중학교, 신일고등학교를 거쳐 현재까지 서울 강북을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다.

[서울=뉴스핌] 채송무 기자 =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전 의원. 2025.01.13 dedanhi@newspim.com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 당시 그의 은사였던 이수호 선생이 구속된 이후 세 번의 교내 시위를 주도했고, 1990년 성균관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한 이후 1991년 대학 선배인 김귀정 씨가 시위 도중 숨지는 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1994년 성균관대학교 총학생회장, 이후 서총련 산하 북부총련 의장직을 역임했다.

전역 후 진보정당 건설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정치부장과 1997년 9월 국민승리21의 언론부장 등을 지냈고, 대선 이후에도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와 함께 진보정당 운동을 이어갔다. 2011년 진보대통합 논의가 확발해진 이후 야권대통합을 주장하면서 민주당에 합류했다.

2011년 9월 '혁신과통합' 상임운영위원을 맡았고, 이후 20대와 21대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이건희 삼성회장의 차명계좌 문제와 현대자동차 문제를 지적해 리콜 결정을 이끌고 유치원 3법 등의 성과를 내면서 의정 활동으로 눈길을 끌었다. 

다음은 박 전 의원과의 폴리티션 스토리 인터뷰 전문이다.

-(채송무 기자, 이하 채 기자) 안녕하세요. 정치인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미래를 살펴보는 kyd 방송의 폴리티션 스토리. 저는 진행을 맡은 정치부 채송무 기자입니다. 옆에는 함께 진행을 맡아 주실 스웨덴 린넨대의 최연혁 교수님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연혁 교수, 이하 최 교수) 안녕하십니까?

-(채 기자) 오늘은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전 의원님을 모시고 정치 역정과 철학에 대해 이야기를 좀 나눠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박용진 전 의원, 이하 박 전 의원) 예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교수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채 기자) 의원께서는 그동안 진보 정당 활동과 민주당에서도 오랜 기간 진보의 그 소신을 지켜오신 정치인이십니다. 이는 어린 시절부터 쌓여 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어린 시절에 어떤 소년이었나요.

▲(박 전 의원) 약간 이렇게 막 나선다 라고 해야 될까요. 친구들이 볼 때는 약간 꼴뵈기 싫은 아이일 수도 있고요. 예를 들면 봄이면 선생님을 조르고 애들 선동해서 야외 수업하도록 하고 첫 눈 오면 수업 땡땡이 치고 선생님 첫사랑 이야기 해달라고 조르고. 교실 분위기를 학구적이지 않게 만드는 데 앞장섰던 사람인 것 같아요.

생활 기록부를 보면 리더십이 있고 이렇게는 쓰여져 있더라고요. 학업에 열중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고, 친구 관계는 다 좋았던 것으로 기억해요. 사는 것이 순탄치 않아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7년 6월 항쟁 과정이어서 사회 변화에 대한 관심은 상당히 많았던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최 교수) 장수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바로 서울로 전학을 온 케이스였는데요. 지금 살고 계신 곳에서 오랫동안 계셨더군요.

▲(박 전 의원) 아버지가 경찰이셨어요. 당시 서울에 인구가 펑펑펑 늘어나고 있을 때잖아요. 경찰서를 새로 지어서 전국에서 인원을 차출하셨는데 아버지가 어떻게 보면 운 좋게 서울로 오시게 된 것이죠. 아버지 때라서 온 가족이 서울로 왔구요. 장수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 입학은 전주에서 입학을 했어요. 전주 진북 초등학교라고 유명한 학교가 있습니다. 전주 진북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서울 화계 초등학교를 2학년 때 전확을 왔어요.

그 동네에서 화계초등학교, 신일중학교, 신일고등학교를 나왔고, 대학교도 제알 가까운 곳이 성균관대학교더라고요. 군대도 갔다 오고 결혼도 거기서 하고, 아이도 거기서 낳고 국회의원도 거기서 하고 지금도 그냥 계속 살고 있어요.

-(최 교수) 각자마다 어렸을 때의 인생 스토리가 하나씩 있거든요 기억에 남는 사람 혹은 이벤트가 있을까요.

▲(박 전 의원) 공부를 별로 안 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했어요. 아마 중학교 때부터 반장도 하고 고등학교 2학년 때 부학생회장이 되고, 사실상 총학생회장 역할을 다 했어요. 임기를 마치고 나도 이제 공부하자 했을 때 1989년도에 전교조가 결성이 된 것이에요. 전교조 결성 한 달 전부터 낌새는 알았고, 학생회 활동도 했었고, 부학생회장으로 역할에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전교조를 지지하고 호응하는 액션을 해보자는 제안이 안팎에서 많이 왔었어요. 당시 전교조 위원장도 하고 민주노총 위원장도 했던 이수호 선생님이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이셨어요.

친구들한테 선생님을 지지하기 위한 보호하기 위한 무엇인가를 하자고 타협안을 제시하고 선생님들이 교무회이하실 때 자율학습 시간 30분 동안 아이들을 다 밖으로 끌어내서 집회를 하기로 한 거죠. 이제 그렇게 하려니까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더라고요 방송반 반장을 불러다가 '너 방송반 열쇠 있지 그 스위치 켤 수 있지'를 다 물어보고 그때 고3 학생회장한테는 이러이러한 내용의 성명서를 쓰도록 해서 읽도록 하고 또 각 반의 반장들하고는 몇 시 몇 분에 이 방송이 나오면 그걸 신호로 '다 나와라'고 했어요.

30분 안에 이것을 다 만들어 내야 되는 일이잖아요. 그거를 했던 과정이 되게 지금도 기억에 남아요. 지금도 친구들하고 만나면 그때 얘기해요. 어떤 느낌이었는지 얼마나 두렵기도 하고 흥분됐었는지를 이야기하고 '박용진 다시 봤다'고 하는 친구들도 많았어요. 그런데 당황했어요. 어쩌면 이렇게 친구들이 일사분란하게 다 같이 움직이나. 짜기는 같이 짰지만 5분, 10분 안에 1200명이 싹 다 교문 앞으로 소리 소문 없이 움직인 것이에요.

1200명이 다 교문 앞으로 모여서 교무실에서 선생님도 몰랐대요. 수위 아저씨가 교무실로 연락해서 그때서야 선생님들이 쫒아나오셔서 '들어가라'고 난리가 났었죠. 전교조 결성이 일요일이었는데 저희가 월요일 아침 8시에 집회를 했거든요. 전교조 결성을 지지하는 고등학생의 첫 번째 집회로 기록돼 있어요. 교내 시위를 두 번 더 했었어요.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나죠. 저한테는 가장 큰 충격이었고요.

-(최 교수) 고등학교 때부터 정치에 입문을 한 셈이네요.

▲(박 전 의원) 그게 무슨 정치겠어요. 그냥 해야 하니까 한다는 느낌이었고요. 저희가 아들이 셋이어요. 큰 형 두 분과 저, 밑에 여동생이 있는데 아버지는 딸을 갖고 싶어하셨는데 계속 아들만 나오니까. 그런데 셋째 아들이 늘 말썽인 거에요. 형들은 다 같이 신일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얌전하고 학교에서 있는 듯 없는 듯, 공부 잘하고 했는데 저만 유독 튀고 그러니까 어머니 부탁이 '제발 졸업만 해라'고 부탁하셨어요.

학교에서도 그렇고 외부 압력이 들어와서 '이런 식으로 하면 졸업 못합니다'는 위협이 있었을 것 아니에요. '검정고시 치죠'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어머니가 전라도 표현으로 기함을 하시면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가서 데모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대학을 가서 데모하니까 '데모 그만해라'고 그러시긴 했는데 아무튼 부모님 속 썩이는 일들은 참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채 기자) 대학 시절에도 학생 운동을 하셨잖아요. 의원님이 학생 운동을 하던 시기는 약간 쇠퇴기에 빠지는 시기였던 것 같아요. 당시 학생운동이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박 전 의원) 그때는 전대협 세대에서 한총련 세대로 바뀌었어요. 전대협과 한총련의 가장 큰 차이는 전대협은 그야말로 국가와 민족, 민중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지를 고민하기 위한 대표자들의 회의인데 한총련은 그야말로 생활, 학문, 투쟁의 공동체라고 이야기를 해서 대학생으로서 찾아야 할 권리, 자신의 위무 등을 잘 성실하게 할 수 있도록 할 것이냐라고 하는 학생회 본연의 역할에 집중하자. 대학 발전과 교육 재정의 확보, 이런 쪽에 집중하자고 더 넓기도 하고 문턱이 낮은 단체를 지향했어요. 이미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이에요.

학생들이 투표로 정치 권력을 견제하거나 바꿀 수 있다라는 것을 국민들이 알고 있는 마당에가두투쟁, 돌멩이와 화염병이 난무하는 방식으로 정치적 의사를 전달할 필요는 이제 없다고 다들 느끼고 있었던 시절인데, 이상하게도 다른 거는 다 앞서가던 학생운동 세력이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뒤진 거죠. 나만 옳다고 생각하고 이 변화가 두렵기도 하고 '이것은 가짜다 우리가 속지 말아야 된다'라고 하는 자기 아집이 교차되고 있었던 시절이에요.

제가 총학생회장이 되니 1 2학년 때 봤던 그런 학생들이 아니고 그런 정국이 아닌 것이에요 대통령도 노태우에서 YS로 바뀌었고요. 야당은 큰 소리치고 국민들도 투표로 여기도 혼냈다 저기도 혼냈다를 몇 번 해보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에 대한 고민을 꽤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총학생회장을 하는 중에는 답을 못 얻었고 오히려 군대를 가서 느꼈거든요. 평범한 친구들이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대학 1학년이 되자마자 온 혹은 대학을 다니지 못하고 바로 직장을 갔던 친구들과, 저보다 나이 어린 친구들과 같이 있었을 것 아니에요

제가 5학년을 하다가 군대를 가서 25살에 갔으니까. 20살, 21살로 나보다 한참 어린 친구들이 나보다 고참인데, 이들이 하는 고민을 들어보면서 '세상이 달라지고 있고, 이들의 고민은 되게 구체적인데 나는 추상적인 것만 이야기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학생 운동하다가 총학생회장을 하고 잡혀자기도 하고 구속도 됐잖아요. 군대를 안 가도 됐어요. 빠질 방법이 여러 개가 있었죠. 그런데 우리 어머니가 또 '제발 군대는 좀 가라'고 하셨어요. 웬만한 부모님들은 군대 안 갈 수 있으면 안 가게 하려고 그러셨는데 우리 어머니는 그런 것이 아닌 거야.

큰 아들 군대 갔다 왔지, 작은 아들도 갔다 왔지, 그래서 아들 군대 보내면서 서운하고 아련한 것은 다 겪어본 것이에요. 뭐라고 하시냐면 "내가 너 때문에 제 명에 못 살 테니까 마지막 효도한다고 생각하고 군대 가라"는 거에요. "나 군대 안 갈 방법이 많은데"라고 했더니 "아 시끄러워. 군대 갔다 와"라고 해서 갔는데 생각해보니까 어머니 말씀 듣기를 잘한 것 같아요. 정치하면서도 떳떳하기도 하고 군대를 가서 오히려 못 봤던 것을 많이 봤거든요.

저는 되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하고 에너지가 좀 넘치는 타입이거든요.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라도, 감옥에 들어갔어도 늘 즐거웠어요. 즐겁고 매일매일 바쁘게 움직이고 아침 6시에 일어나서 할 일을 제깍제깍 다 해내면서 살았고, 군대에서도 그랬던 것 같아요. 군대에서도 적극적으로 하고, 못 봤던 것, 잘 만날 수 없었던 사람을 만나고, 저보다 어린 사람을 상관으로 모시면서 당하는 수모나 이런 것들도 저에게는 좋은 기억으로 승화시키려고 하는 것이 있었던 것 같아요. 군대에 가서 학생운동에 대한 정립, 제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가다듬었던 것 같아요.

-(최 교수) 중요한 고비고비마다 어머님의 역할이 크셨는데 아버지의 역할은 무엇이었나요.

▲(박 전 의원) 불편했죠. 아버지는 대공과 형사도 하셨는데 아들은 데모해요. 총학생회장이에요. 이른바 운동권 우두머리야. 제가 처음 총학생회장 당선되고 학교 총장과 저녁 자리가 있지만, 관할 경찰서 서장과도 식사 자리를 한번 하더라고요. 동대문경찰서 서장과 자리를 했는데 제가 "윗사람들에게 좀 전해줘라. 나 때문에 우리 아버지가 혹시라도 피해를 보거나 괴롭힘을 당하거나 하면 내가 가만히 안 있을 것"이라고 엄포 비슷한 것을 했던 것이 기억이 나요. 그런데 아머지는 평범한 경찰 공무원으로 지내셨는데 제가 처음 총학생회장을 하다가 노동자들 파업 지원 투쟁을 하다가 잡혀간 거였어요.

장안동 대공분실, 남영동은 유명한데, 장안동에도 그런 시설이 있는데 거기서 사장님으로 표현되든지 대표로 표현되는 분이 있었는데 아마 경찰서장쯤 되는 모양이에요. 무역상사로 외부는 위장이 돼 있고요. 거기 가서 조사를 한참 받고 있는데 잠깐 나오라고 해서 갔더니 사장 대공분실장이 가운데 앉고 소파가 있는데 아버지가 그 앞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계시더라고요. 제가 들어왔는데 아버지가 이 사람한테 허리를 계속 조아리면서 "죄송하다. 자식을 잘못 가르쳐서 이렇다"고 순간 아버지한테 미안한 것도 있는데 막 화를 냈어요.

아버지께 "아버지가 무엇을 잘못했는데,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데 이 사람한테 아버지가 이렇게 조아리고 계시냐"고 했더니 "용진아 앉아라"고 하셨어요. 저한테 별로 따뜻한 분은 아니셨거든요. 아들 둘이 있으니 셋째가 눈에 보이시겠어요. 밑에는 딸이 또 있으니까 막내 아들이 눈에 보이시겠어요. 그냥 집에나 들어오고 밥이나 먹고 다니면 다행이라고 생각을 하셨던 것 같고 저도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날 그 사람한테 조아릴 때 너무 속이 안 좋았고, 가시다가 저랑 헤어지는데 주머니에서 3만원을 꺼내서 딱 주셨어요. 그때 3만원은 아버지의 일주일 용돈이었을 것이에요. 이걸 주시면서 두 가지를 이야기하시더라고요. '매 맞지 마라. 괜히 골병 든다' 그리고' 밥 굶지 마라'. 그러고 가시더라고요. 한참을 혼자 울었네. 그리고 이제 서울 구치소로 넘어갔을 때 아버지가 면회를 오셨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아버지가 나가시더라고요. 그리고 어머니랑 이야기하다가 다음 면회 때 어머니가 오셔서 "어제 아버지가 오셔서 파란색 수위를 입은 것을 보고 눈물이 나서 나갔다"고 그러시더래요.

나가서 우셨다고 그래서 "왜요"라고 했더니 당신이 죄 지은 사람들을 잡아다 감옥에 넣고 나면 그 옷을 입고 다시 경찰서에 가서 조사 받는 모습을 봤는데 당신 아들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저 옷을 입고 있나 싶으니까 화도 나고 내가 왜 경찰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드셨대요. 그래서 나와서 막 우셨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지금은 아주 효도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때 불효를 많이 해서 너무 죄송하고, 아버지 사랑합니다.

-(최 교수) 말씀을 아주 잘하시는데 어디서 배우셨나요. 아니면 어릴 때부터 좌중을 이끄는 능려깅 있었나요.

▲(박 전 의원) 대변인은 5년을 했어요. 우리 정치사에서 최장수 대변인일 거에요. 민주노동당에서 3년, 민주당에서 2년을 했는데, 민주당에서 2년 한 것도 기록이었어요. 김대중 대통령 이후에 배지를 달지 않은 당 대변인을 2년 동안이나 했는데 그 동안 대표가 엄청 많이 바뀌었어요. 당 대표가 10번 바뀌는 동안 계속 당 대변이었어요. 다른 대변인은 계속 바뀌었는데 기자들이 박용진은 바꾸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기자들하고 인연도 깊고, 험난한 시절을 같이 겪으면서 큰 대과 없이 말 실수 없이 했던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껴요.

대변인들이 사실 파리 목숨이거든요. 말 한 마디 잘못하면 휙 하고 날아가는데 그런 무리함이 없었던 것은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요. 말을 잘하고 말고는 스타일이었겠죠.

부모님이 물려주신 성격상도 있는 것 같은데 제가 감옥을 좀 오래 갔었어요. 나중에는 2년 3개월 동안 있었는데 그때도 계속 독방이었어요. 하루에 편지지로 A4 용지 정도로 치면 거의 3장을 앞뒤로 빽빽하게 채워서 편지를 쓰거나 일기를 써서 밖으로 내보냈어요. A4용지로 보면 한 7장을 쓰는 것인데 어떤 내용으로 채울것인지를 머리 속에 정리해놓고 한 번에 쭉 써 내려가는 과정이 매일매일 훈련을 했다고 봐야해요. 아주 작은 일을 묘사하는 훈련도 되더라고요.

제가 결혼하고 6개월 만에 잡혀가서 감옥에서 2년 3개월 있다 나왔거든요. 와이프한테 얼마나 미안해요. 매일매일 반성문을 와이프에게 써서 보냈는데 매일 사랑해요. 미안해요 이야기만 쓸 수는 없으니까 '내가 혼자 방에 있는데 거미 한 마리가 지붕에서 내려와서 집을 짓는 과정을 쭉 지켜보는 거에요. 거미줄에 햇살이 스쳐지나가고 먼지가 흩날리는 과정, 겨울해와 여름해의 비교, 아침 공기에 까치가 날아가는 모습, 까치가 바람을 타는 모습을 혹시 보셨어요? 바람을 타면 그네를 타는 것 같아요. 까치가 바람을 거슬러 가는 것을 보면서 '까치가 오늘 그네를 타네요'라고 쓴다거나 작은 푷션을 미세하게 쓰려고 하는 과정이 필력에는 도움이 크게 됐던 것 같아요. 그래서 논평을 쓸 때도 길게 안 쓰고 어떤 때는 짧게 해버렸어요.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호가 일해에요. 날일 자에 바다 해자인데 그분의 고향인 합천에서 공원이 지금도 있다고 해요.

그 공원이 일해공원으로 이름을 짓고 비석을 세운다고 했는데 다른 당에서는 군사 반란 수괴에 공원 이름을 붙이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역사적인 반동행위라고 내는데 제가 냈던 논평을 '일해라고 한은 말은 횟집에나 어울린다'는 것으로 끝났어요. 더 욕할 필요도 없고, 일해라고 하는 말을 공원에 붙이지 말라는 걸로 그냥 끝났어요. 간략하게 하는 연습을 그때 감옥에 있을 때 했어요. 가장 힘들고 어려워도 나주에 다 좋게 해석하고, 그러려고 되게 노력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최 교수) 역사 잃은 지혜는 잔꾀로 흐르고 민심 없는 정치는 술수로 흐른다는 말을 남기고 이런 말을 남기고 대변인직을 내려놓았습니다.

▲(박 전 의원) 말이 멋있잖아요. 원래는 원문이 뭐냐면 '역사 잊은 지혜는 잔꾀로 흐르고 민심 잃은 정치는 술수로 흐른다'예요.그런데 제가 쓸 때는 둘 다 없는 것으로 맞췄어요. 그래서 역사 없는 지혜는 잔꾀로 흐르고 민심 없는 정치는 술수로 흐른다가 됐는데 이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1988년에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사계절 출판사에서 벽초 홍명희 선생의 임꺽정 광고를 지하철에 이렇게 붙여놨어요. 그 옆에 카피가 딱 그거였어요. '역사를 잊은 지혜는 잔꾀로 흐르고 민심을 잃은 정치는 술수로 흐른다'고. 우와 가슴에 확 박히더라고요. 좋은 말이야 하고 기억을 하고 있었어요.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갈 때 그것을 딱 내걸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역사와 민심 팀이에요. 그리고 평생 그것을 했어요. 역사와 민심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나는 그냥 술수와 잔꾀로 흘러갈 거야. 그렇게 하면 안 돼. 원칙 잘 지켜야 돼. 이런 생각을 늘 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민주당으로 와서 2012년에 당대표 선거를 나갔어요. 한명숙, 박지원, 이인영, 박영선, 김부겸 문성근 이렇게 출마를 했어요. 이렇게 짱짱한 분들과 했는데 제가 컷오프를 통과했어요. 중앙위원회에서 박용진이 5등으로 통과했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결과는 안 알려주지만 박용진이 최고위원은 되겠구나 하고 난리가 한번 났었는데 그때 궁금해지더라고요. 이 카피 내용이 책 안에 있는 줄 알았더니 없어요. 그래서 사계절 출판사에 전화를 했죠. 그랬더니 자기도 모른데요. 사장님이 아실까요 했더니 연결을 해주더라고요.

그때가 2012년인데 제가 상황을 설명하고 제가 누구라고 했더니 '어떻게 그것을 기억하시냐'고 그러는데 "남편이 원래 사장이었는데 돌아가셨대요. 그리고 대표를 맡으셨는데 남편이 벽초 홍명희 선생의 임꺽정을 발행하실 때 그냥 거기다 쓴 카피였대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글을 뽑아내셨는지 모르겠다. 어디서 보신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자기는 모르고 아마 남편이 본인이 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 그 문구를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박용진 쓴 걸로만 나와요.

아마 사계절 출판사 사장님이 처음 쓰셨을 것 같아요. 말씀 그대로 저는 역사와 민심을 가지고서 정치를 해야지 잔꾀와 술수를 부리면 지금 당장은 어떻게 보면 살아날 수 있다고 봐요.지금 당장은 배지 잃지 않고 뭐 재선 3선 4선 5선 6선 선수는 쌓여 나갈 수 있겠죠. 그런 선수가 쌓이면 뭘 합니까. 잔꾀와 술수로 평가돼 버리면 끝이지. 어릴 때 고등학교 2학년 때 봤던 글귀를 지금까지 잊지 않고 계속 해가고 있어요.

-(최 교수) 그 말의 출처에 대해서는 오늘 처음 들었습니다. 

dedanhi@newspim.com

[뉴스핌 베스트 기사]

사진
[트럼프 100일 승부] 뉴욕증시 '경고음' [서울=뉴스핌] 이홍규 기자 = 최근 미국 금융시장에서 금리와 주가가 함께 요동치는 상황은 트럼프 1기 행정부의 집권 2년 차였던 2018년을 상기시킨다. 당시 뉴욕증시의 가격 부담은 높아져 있었다. 미국의 강한 경제가 되레 금리 우려를 부추겨 증시를 압박하던 차에 트럼프발 무역전쟁이 가세했다. 결국 그해 가을 S&P500 지수는 20%나 떨어져 약세장에 진입했다. [글싣는 순서] 트럼프 100일의 승부1. 규제 대못 뺀다…AI·자율주행·은행업 '더 쉽고 빠르게'2. 압도적 격차를 향한 전격전...MAGA 휘날리며3. 우크라 전쟁 100일 만에 끝내고 북미 대화 실마리4. 에너지 패권을 향해 '드릴, 베이비 드릴'5. 만능 치트키 관세...역대급 중국 압박6. 뉴욕증시 지진계 '경고음 요란'...2018년의 기억7. 증시 불확실성 MAGA 수혜주로 돌파..끝판왕은8. 관세와 달러, 복잡한 함수 관계9. 높아지는 미국의 만리장성...反이민 장애물도 산적 현재 뉴욕증시 여건과 시장이 직면한 위험은 당시와 닮았다. 시장에서 2018년을 반추하며 올해 뉴욕증시도 유사한 길을 걷지 않을까 하는 우려섞인 관측이 대두하는 이유다.특히 2018년 급락장에 앞서 출현한 충격파의 전조가 이번에도 포착되고 있다. 그 지진계의 수치가 이례적인 수준으로 치솟아 불안감은 더 크다. 바로 '블랙스완지수'로 불리는 시카고옵션거래소(Cboe)의 스큐지수다. 1. 3주 전 신호 스큐지수는 S&P500의 극단적인 하락 가능성에 대한 옵션시장의 우려를 보여주는 지표다. 개략적으로 말하면 주가 폭락에 대비한 풋옵션 수요가 높을수록 그 값은 올라간다. 주가가 크게 하락하는 시나리오에서만 가치가 있는, 그래서 당장은 가치가 없어 싼값에 거래되는, 즉 '외가격 풋옵션'이 높은 가격에 사들여진 결과다. 외가격 중에서도 가치의 무의미함이 큰 풋옵션 수요가 클수록 상승한다. 평소에는 헐값에 팔렸던 우산이 폭풍우가 예상되자 비싸져도 수요가 생기는 현상과 비슷한 셈이다. *스큐지수는 단순히 OTM 풋옵션뿐 아니라 OTM 콜옵션도 산출 대상에 포함된다. 구체적으로는 양자의 프리미엄 시세를 역산해 산출한 내재변동성이라는 개념을 통해서다. 다만 실제 산출 과정에서는 OTM 풋옵션의 내재변동성의 비중이 더 크다. 급격한 시세 변동을 염두에 둔 헤지 상품의 수요는 가파른 가격 상승을 기대한 콜옵션보다 가파른 하락에 대비하려는 풋옵션에 집중되기 떄문이다. 따라서 산출 과정에서 자연스레 OTM 풋옵션의 내재변동성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   통상 스큐지수는 100~135 사이에서 변동한다. 135를 넘어서게 되면 옵션시장 참가자들이 급격한 하락 가능성에 대해 종전보다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얘기가 되고 150이 넘어가면 극단적인 하락 가능성을 매우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뜻이다. 현재 스큐지수는 154다. 지금부터 3주 전인 지난달 24일에는 180으로 솟구쳤다. 두 달 전부터 수위를 높이더니 급기야 180이라는 새로운 기록을 썼다. 지금은 이때보다 낮아졌지만 추세의 층위는 과거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형성돼 있다. 옵션시장 참가자들이 들어 올린 '가드'의 높이가 한층 더 올라갔다는 얘기다. 스큐지수의 수치에 내재된 '극단적인 폭락' 가능성은 대략 30일 내 실현을 상정한다. 스큐지수를 산출하는 데 사용되는 옵션의 잔존만기 대부분이 30일 안팎이기 때문이다. 예로 잔존만기가 20일인 근월물과 48일인 차근월물이 있다면 관련 만기의 옵션에 내재된 변동성(옵션의 프리미엄 시세를 역산해 산출)을 소위 보간하는 방법을 통해 30일치를 구한다. 그렇다면 현재 옵션시장에서는 2월 중순 안에 폭락장이 올 것으로 보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정말 그렇게 될까. 2. 2018년의 잔상 2018년 여름이 앞을 내다볼 수 있는 거울이 될지도 모른다. 2018년을 문두에 꺼낸 것은 당시와 현재 상황이 유사해서다. 2018년은 올해와 마찬가지로 전년도 주가 상승률이 19%가 넘어 주식시장이 활황을 보였던 해의 이듬해다. 트럼프의 법인세 감면이나 규제 완화책, 인프라 투자 확대책을 반영한 결과다. 트럼프의 고율관세 공약은 '엄포' 정도로만 생각했다. 이듬해 경제도 좋았다. 연방준비제도(연준)의 정책금리 인상과 시장금리 상승 우려가 부담됐지만 강한 경제가 버텨주리라는 믿음이 더 컸다. 전형적으로 '우선 먹고 배아픈 건 나중에 생각하자'는 식의 장세였다. 2018년 스큐지수는 꾸역꾸역 고도롤 높여갔다. 당해 3월 트럼프 행정부가 국가 안보상의 이유로 철강·알루미늄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한 것을 시작으로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관세 수위를 끌어올리며 중국과 무역전쟁을 벌였다. 2018년 3월 하순 120이 채 안 됐던 스큐지수는 7월 150을 넘어서더니 8월 160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올라섰다. 한 달 뒤 급격한 시세 하락을 예상한 스큐지수의 경고는 적중했다. 9월 2900선을 기록했던 S&P500은 11월 2600대까지 하락해 10% 떨어졌고, 그 뒤 하락세를 재개해 12월 2300선까지 추가 하락했다. 석 달 만에 20%가 무너졌다. *S&P500은 2018년 1~2월 당시 10% 떨어져 조정 국면에 진입한 적이 있다. 주가 하락의 발단은 고용통계 호조에 따른 장기금리 상승과 연준의 정책금리 인상 우려였다. 다만 그 떄 주가 하락은 빠른 시차를 두고 격렬하게 전개됐는데 그 배경에는 당시 시장에서 인기를 끌었던 변동성 하락 베팅 관련 상품(크레디트스위스의 VIX 선물 가격 역추종 상품<XIV>)가격이 붕괴해 시세 변동성을 증폭시킨 일이 있었다. 소위 '볼마게돈'으로 불리는 일이다. 공교롭게도 당시에도 스큐지수는 한 달 전 135를 넘어 시세 하락을 예고했었다. 3. 진짜 '오싹'할 떄는 스큐지수의 경보음이 격렬해지는 순간은 그 수치가 오히려 지금처럼 하락할 때다. 주가 하락이 시작하면 스큐지수 산출 대상에 있던 외가격 풋옵션 비중이 자연스레 작아져 스큐지수의 값은 하락한다. 흔히 '공포지수'로 알려진 VIX는 주가가 떨어져야 그제서야 반응한다. VIX는 주로 ATM(등가격) 부근 옵션의 프리미엄 시세를 바탕으로 산출되기 떄문에 이미 멀찍이 있던 외가격에서 경보음을 낸 스큐지수보다 한발 늦다. ATM 옵션은 현재 주가와 행사가격이 '거의 같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당장 옵션시장의 주가 상승과 하락에 대한 '양방향 베팅' 상황을 보여준다. 스큐지수가 건물의 '화재감지기'라면 VIX는 화재가 난 뒤에 내부 온도를 보여주는 '온도계'와 같은 셈이다. '스큐지수의 하락→S&P500의 급락+VIX 급등'의 순서는 2018년 8월의 급락장에서도 동일하게 실현됐다. 최근 스큐지수가 최고치를 찍고 하락한 것은 주식시장이 이 패턴을 따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VIX는 스큐지수가 최고치를 찍었던 지난달 24일 14를 기록했다가 현재 19.5로 올라선 상태다. 아직은 주식시장의 높은 변동성을 예고한다는 '20'을 넘어선 단계는 아니지만 방향성 자체가 위를 향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S&P500도 지난달 6일 사상 최고가에서 4% 떨어지는 등 상기의 연쇄 흐름에 동참한 모습이 역력하다. 물론 스큐지수가 과거의 폭락장이나 거친 시세 흐름을 항상 예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연준의 정책금리 인하 지연 우려와 시장금리의 급등, 위안화 약세, 주식시장의 높은 밸류에이션, 조만간 출범하게 될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의 관세 염려 등 주가 하락을 시사하는 퍼즐들이 짜맞춰지고 있다는 점에서 급격한 시세 변동 위험이 현실화될 개연성을 높인다. 특히 위안화 약세의 파급력은 2015년 갑작스러운 평가절하나 2018년 중반 급격한 약세, 2019년 '7위안 돌파' 등의 사례를 통해서 목도한 바 있다. 옵션시장의 우려가 단순한 기우가 아닐 수 있음을 뒷받침하는 재료들이다. 4. 실질금리의 중력장 1월 중순에 진입한 현재는 불안감이 들불처럼 번지기 쉬운 시기라는 점에서 스큐지수 경고에 담긴 의미를 배가시킨다. 과거 통계상 계절적으로 주식시장의 변동성이 확대되는 구간의 초입이다. 페퍼스톤에 따르면 2000년부터 2023년까지 VIX 추이를 월별로 평균해 연중 추이로 그려본 결과 1월 중순부터 3월 중순까지 상승세가 두드러진다. 연초에는 기관투자자가 새로운 투자 전략을 실행하거나 기존 포지션을 조정하고, 또 관련 기간에는 기업의 결산 보고가 맞물려 있어 시세가 각종 재료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많다. 모든 위험자산군의 시세를 주무르다시피하는 '실질금리'가 뜀박질을 재개한 점은 계절성의 현실화 가능성에 무게를 더한다. 미국 물가연동국채 10년물 금리로 본 실질금리는 지난달 초순 1.89%에서 중순 2.25%로 급히 올라섰다가 이달 초 숨고르기를 거친 뒤 최근 7일여만에 2.32%로 '레벨업'했다. 지난달 초순부터보자면 한 달 만에 43bp가 오른 셈이다. 통상 장기국채의 명목 금리가 오른다고 해도 대게 인플레 전망을 반영해 상승한 결과여서 실질금리 상승폭은 상쇄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실질금리 변동성이 작은 편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한 달 만에 43bp라는 상승폭은 상당하다고 할 수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의 마이클 하트넷 전략가의 표현을 빌려쓰자면 최근의 금융시장 상황은 '터너(전환점)' 임박을 시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앞서 하트넷 전략가는 실질금리 2.5%를 주시해야 할 지점으로 꼽은 적이 있는데 2.5%에 도달하면 금융시장의 위험자산 회피 성향이 더 강해질 것으로 봤다. 2.5%는 2023년 10월 하순에 기록한 최근 10년 기준 전 고점에 해당한다. 당시 실질금리는 같은 해 7월 1.48%에서 2.5%까지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같은 기간 S&P500의 시세를 10% 떨어뜨린 배경이 됐다. 하트넷 전략가에 따르면 현재 실질금리는 이미 지난달 중순부터 2%대로 올라섰음에도 불구하고 종전까지 주식시장의 시세가 어느 정도 방어가 됐던 것은 '강한 경제 펀더멘털이 실질금리 상승의 부정적 영향을 상쇄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종전의 고점을 넘어서는 새로운 영역으로 진입하면 내성 역할을 해왔던 투자자들의 믿음에 균열이 가해질 수 있다고 봤다. 스큐지수의 급등과 급락이라는 전조가 보여준 경고는 실질금리 2.5% 돌파와 함께 현실화될지도 모를 일이다. bernard0202@newspim.com 2025-01-13 14:12
사진
"엔비디아 주요 고객, 블랙웰 주문 연기" [뉴욕=뉴스핌] 김민정 특파원 = 엔비디아의 주요 고객사들이 최신 인공지능(AI) 칩인 '블랙웰(Blackwell)'의 주문을 연기하고 있다고 13일(현지시간) 정보기술(IT) 전문 매체 디 인포메이션(The Information)이 보도했다. 매체에 따르면 마이크로소프트(MS)와 아마존닷컴의 클라우드 부문, 알파벳의 구글, 메타플랫폼스 등 소위 하이퍼 스케일러 기업들은 엔비디아 블랙웰 GB200 랙의 일부 주문을 줄였다. 하이퍼 스케일러는 대규모 클라우드 컴퓨팅 및 데이터 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을 의미한다. 인포메이션은 이들 기업이 100억 달러어치의 블랙웰 랙을 주문했다고 전했다. 블랙웰 [사진=블룸버그] 이들 기업이 블랙웰 주문을 연기하는 것은 출고 초기 발견된 과열과 작은 결함 때문으로 알려졌다. 인포메이션은 일부 고객사들이 차후 버전을 기다리거나 엔비디아의 기존 AI 칩 구매를 계획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있는 시설에 최소 5만 개의 블랙웰 칩을 탑재한 AI 가속기 GB200을 설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주문 지연이 발생하면서 마이크로소프트의 주요 협력사인 오픈AI는 엔비디아의 기존 세대 칩인 '후퍼(Hooper)'를 탑재한 가속기를 제공해줄 것을 요구했다. 블랙웰은 엔비디아의 향후 실적과 관련해 투자자들의 관심이 집중된 제품이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11월 4분기 블랙웰 매출이 기존 목표치를 초과할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날 엔비디아의 주가는 약세를 보이고 있다. 미국 동부 시간 오전 10시 54분 엔비디아는 전장보다 2.69% 내린 132.25달러를 가리켰다. mj72284@newspim.com 2025-01-14 00:58
안다쇼핑
Top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