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최원진 기자= 제39대 미국 대통령을 지낸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간) 향년 100세로 사망했다.
카터 재단에 따르면 카터 전 대통령은 이날 고향인 남부 조지아주 플레인스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지난 몇 년 동안 간과 뇌로 퍼진 흑색종을 포함한 여러 건강 문제를 겪던 카터 전 대통령은 2023년 2월부터 치료를 중단하고 가정에서 호스피스 의료 서비스를 받고 있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사진=로이터 뉴스핌] |
카터 전 대통령의 아들인 칩 카터는 성명에서 "저의 아버지는 저뿐만 아니라 평화, 인권, 이타적인 사랑을 믿는 모든 이에게 영웅이셨다"라며 "저희 형제와 자매, 저는 이런 공통의 신념을 통해 전 세계와 부친을 공유했다. 우리는 이런 공통의 신념에 따라 살면서 부친을 기리는 여러분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그는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100세를 맞이해 가장 장수한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카터 전 대통령의 장례식은 워싱턴DC와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국장으로, 공개적으로 진행될 예정이며, 그 후 조지아주 플레인스에서 비공개 안장이 거행된다.
1924년 10월생 남부 조지아주 출신인 그는 1946년 미 해군 사관학교 졸업 후 해군에 입대해 냉전 시기 잠수함 장교로 복무했다. 1953년 부친의 죽음으로 현역에서 물러나 1961년까지 대위 계급으로 해군 예비군으로 있었다. 그는 고향에서 선친의 농장을 물려받아 땅콩과 면화 재배로 성공해 '땅콩 농부'란 별명이 생겼다.
카운티 교육 감독위원회 등 지역사회 활동을 해오던 그는 1962년 조지아 주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계에 발을 들인다. 1971년에는 한 번의 낙마 끝에 조지아주 주지사에 당선됐으며, 1976년 현직 제럴드 포드 대통령을 제치고 민주당 후보로 제39대 대통령이 됐다.
그의 대표적 업적으로는 중동 평화 협상 중재 성공이 꼽힌다. 1978년 9월 당시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와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평화 협정을 체결, 이는 이듬해에 양국이 서로 적대행위를 끝낸다는 조약으로 이어졌다. 미국과 중국 외교관계 수립도 그해 이뤄졌다.
1977년 8월 15일 당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우)이 헨리 키신저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함께 오찬 미팅하는 모습. [사진=로이터 뉴스핌] |
그의 임기는 치적보다는 실책이 더 많았단 평가가 많다. 대표적인 그의 외교 실패는 1979년 주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이다. 이란 이슬람 혁명 후 강경파 대학생들이 미국 대사관을 점거, 대사관 직원 등 50여 명을 무려 444일간 억류한 사건이다. 당시 자국에서 보호하고 있던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 이란 국왕을 본국으로 송환하라는 이란 혁명 정부의 요청을 카터 정부가 거부하면서 강경파들의 분노를 샀고, 특수부대를 투입해 구출 작전을 벌였지만 미국인 8명이 숨진 후였다.
이 사건에 더해 1970년대 경기침체로 물가가 오르고 실업률이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까지 겹치면서 그의 지지율은 급락했고, 1980년 대선에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란 슬로건을 내세운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후보에게 패배했다.
그의 업적은 퇴임 후에 빛났다. 1982년 애틀랜타에 비영리 기구 카터 재단을 설립해 국제적 분쟁의 조정과 인권 신장, 질병 퇴치 활동에 공을 세우면서 200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1994년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를 선언해 북핵 위기가 도래하자 카터 전 대통령은 직접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만나 평화 중재자 역할을 했으며 2010년 2차 방북 때 북한에 억류된 미국인 아이잘론 말리 고메스 석방 및 귀환을 성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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