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릴케가 사랑했던 장미부터 블레이크의 장미까지
사랑하는 이에게 한 번쯤 선물하는 '꽃 중의 꽃'
때로는 한 송이 장미가 백만 송이 장미보다 강하다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오월이 되면 붉은 망토를 걸친 점령군처럼 밀려드는 꽃이 있다. 장미(薔薇)다. 울타리마다 선홍빛 꽃들이 넝쿨을 이루면서 보는 이를 황홀하게 한다. 그 앞에서 시인의 언어는 무력해진다. 황홀한 장미의 자태를 넘어설 수 있는 어떤 시어(詩語)도 떠올리기 힘들다.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장미는 꽃 중의 꽃이지만 가시가 있다. 그래서 문학에서 여성에 비유되기도 한다. [사진 = 오광수] 2024.05.20 oks34@newspim.com |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그토록 많은 눈꺼풀 아래/ 누구의 것도 아닌 잠이고 싶은 마음이여.'
라이너 마이너 릴케는 직접 쓴 묘비명에서 장미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장미 가시에 찔린 것이 원인이 되어 세상과 작별한 시인답다. 그에게 장미는 치명적인 꽃이었다.
'오 장미여, 너는 병들었구나/ 거센 폭풍우 속을/ 날아다니던/ 저 보이지 않는 밤의 벌레가// 선홍빛 쾌락의/ 너의 침대를 찾아냈구나/ 이제 어둡고 은밀한 사랑으로/ 너의 생명을 끊는구나.' - 윌리엄 블레이크 '병든 장미'.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릴케는 묘비명에서 장미를 예찬했지만 죽음의 단초가 됐다. [사진 = 오광수] 2024.05.20 oks34@newspim.com |
블레이크는 사랑과 쾌락이 질병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장미에 비유했다. 산업사회의 그늘에서 고통받은 여성의 삶을 벌레 먹고 병들어가는 붉은 장미의 운명에 빗대에 노래한 것이다. 우리에게도 한때 영화 제목에 '벌레 먹은 장미'가 등장했던 시절이 있었다.
장미는 바라보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일찍이 클레오파트라는 장미 향수를 즐겨쓰면서 장미꽃잎을 띄워놓고 목욕을 즐겼다고 한다. 서태후에게도 장미는 빼놓을 수 없는 미용 제품이었다. 장미는 지금도 여전히 사랑받는 향수와 화장품의 원료다. 세계 어디서든 장미정원은 사람들을 불러모은다. 이 때문에 정원사에게 장미는 중요한 꽃이다. 베르사이유의 장미부터 에버랜드의 장미 등 오월 축제의 한가운데는 장미가 있다.
사랑하는 이에게 장미꽃을 바쳐보지 않았다면 실패한 인생이다. '로미오와 줄리엣'부터 수많은 러브스토리의 중심에 어김없이 장미꽃은 등장한다. 또 많은 명화 속에도 장미는 빠지지 않는다, "다른 이에게 장미를 건네주는 손에는 언제나 여향(餘香)이 있다"라는 중국 속담도 있다. 다섯손가락의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은 비가 오는 수요일이면 어김없이 소환되는 노래다. 이 노래를 작사·작곡한 리더 이두헌의 매력적인 중저음 보컬과 어우러져 듣는 이를 감상에 젖게 한다.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밤에 피어 있는 장미는 화사한 햇살 아래서 만나는 장미와는 사뭇 다르다. [사진 = 오광수] 2024.05.20 oks34@newspim.com |
이두헌에게 이 노래는 실연의 아픔을 불러낸다. 동국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이두헌은 한 여학생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가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정처 없이 걷다가 명동 근처에서 버스에 올랐는데 뒷좌석의 여고생들이 수다를 떨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수요일." "수요일이어서 비가 오나?" 문득 명동성당 근처에서 빨간 장미를 팔던 할머니도 떠올랐다. 순간 거북선 담뱃갑의 은박지를 뜯어내서 곡을 메모했다. 애당초 다섯손가락의 1집에는 이 노래가 없었다. 어느 날 음반기획자가 2곡이 더 필요하다고 해서 추가로 넣은 노래가 '새벽 기차'와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이었다.
장미가 지천으로 등장하는 노래도 있다.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수백만 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라고 노래하는 심수봉이 '백만송이 장미'다. 러시아의 가수 알라 푸가초바가 1982년 발표한 곡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 잇달아 리메이크되면서 원곡보다 더 사랑받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를 감동시키려면 수백만 송이의 장미보다 단 한 송이의 장미와 사랑하는 마음이면 된다.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장미는 무리지어 피지만 홀로 있을 때도 도도한 아름다움이 있다. [사진 =오광수] 2024.05.20 oks34@newspim.com |
올드팬이라면 그룹 4월과 5월이 부른 '장미'의 풋풋한 가사와 멜로디를 기억할 것이다.
'당신에게선 꽃내음이 나네요/ 잠자는 나를 깨우고 가네요/ 싱그런 잎사귀 돋아난 가시처럼/ 어쩌면 당신은 장미를 닮았네요/ 당신의 모습이 장미꽃 같아/ 당신을 부를 때 당신을 부를 때/ 장미라고 할래요.'
이정선이 작곡한 이 노래는 장미가 필 무렵이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명곡이다. 듣기만 해도 장미의 향기가 피어날 것 같다.
장미가 있어 위로가 되는 계절, 우리 생에 다시는 오지 않을 5월의 시간이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