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가 향나무 뒤에서 서낭제사 지내는 모습 보고 갔다"....죽변항 사람들이 펼치는 공동체 秘儀
"세시간의 전통의례가 다지는 죽변항 주민들의 통합과 평안"...죽변어촌계가 주도·울진군·울진죽변수협·한울본부 지원
엄격한 금기와 유교적 제의절차... 초헌 조학형 수협장·아헌 방학수 어촌계장·종헌 조경철 총대
정월보름 드는 자시에 진행...죽변항 어업인들 대거 참여
[울진=뉴스핌] 남효선 기자 = 정월대보름을 하루 앞둔 23일 밤 9시. 동해안의 최고의 어업전진기지인 경북 울진군 죽변항을 지키는 죽변 성황사가 불을 환하게 밝히고 정월대보름 마을제사 준비로 부산하다.
방학수 죽변어촌계장과 조경철 죽변어촌계 총대가 정성껏 마련한 제수를 성황당에 진설하고 있다.
제수를 진설하는 손길이 조심스럽다. 얼굴에는 엄숙함이 잔뜩 서려있다.
[울진=뉴스핌] 남효선 기자 = 23일 밤 10시30분경에 치러진 '정월대보름 죽변성황제사의 상차림'.2024.02.24 nulcheon@newspim.com |
이날 죽변 성황제사에는 소고기와 방어, 가오리, 복어, 열기, 대구, 문어, 조기 등 울진 죽변 앞바다에서 갓 잡힌 싱싱한 어물과 죽변항의 특간물인 '울진대게'와'백고동', '전복'이 올랐다. 또 백설기와 과일, 유과와 돼지머리가 진설됐다.
젊은 어촌계원들이 성황사에 이웃한 제수장만 식당에서 제수를 담은 제기를 양손으로 받쳐들고 분주하게 드나든다.
성황사로 들어가는 문 앞에 짚단이 발갛게 불씨를 날리며 타고 있다. 정월보름 고사를 무탈하게 지내기위한 '부정치기'의례이다. 성황사 주변에는 빨간 황토가 뿌려져 있고, 성황사와 연접한 500년은 족히 넘었을 향나무에 금줄이 둘러 있다.
'울릉도에서 떠내려 왔다'는 전설이 전승되고 있는 죽변성황사 옆 향나무는 지난 1964년 1월31일 천연기념물 제158호로 지정됐다.
정월고사가 예정된 밤 10시10분경이 되자 성황사 앞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발자욱소리를 죽이며 모여든다. 표정들이 엄숙하다.
성황사 안에는 의관을 갖춘 제관들이 진설을 마치고 정숙한 표정으로 성황제사를 올리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울릉도에서 파도를 타고 죽변항에 닿아 뿌리를 내렸다는 죽변 후정리향나무(천연기념물 제158호) 품에 안긴 듯 좌정한 성황사에 향촉(香燭)이 밝혀지자 엄숙하면서도 비밀스런 제의가 시작된다.
[울진=뉴스핌] 남효선 기자 = 정월대보름을 앞둔 23일 밤 10시30분에 울진군 죽변항 죽변성황사에서 진행된 '정월보름 죽변성황제사'에서 초헌관인 조학형 울진죽변수협장이 초헌례를 치르고 있다.2024.02.24 nulcheon@newspim.com |
갑진년 '용의 해' 정월보름 죽변 성황제사 초헌관은 조학형 울진죽변수협장이, 아헌관과 축관은 방학수 죽변어촌계장이, 종헌관은 조경철 죽변수협 총대가 맡았다.
죽변성황사에 모셔진 신은 남(男)서낭과 여(女)서낭이 함께 모셔진 부부성황이다. 죽변사람들은 이들 부부 신이 죽변항과 자신들을 지켜준다고 믿으며 친근하게 '서낭할배' '서낭할매'라고 부른다.
죽변사람들은 정월보름 밤 치러지는 성황제사를 '서낭제사' '정월보름고사'라고 부른다.
죽변사람들은 남신인 '서낭할배'는 마을의 안녕을 지키고, 여신인 '서낭할매'는 용왕신으로 죽변사람들의 생업터전인 바다를 관장한다고 여긴다.
'서낭할매'라고 친근하게 부르는 여신은 본래 이곳 죽변 성황사가 아닌 용추곶에 모셔졌다.
용추곶은 죽변항을 감싸고 있는 등대산이 바다로 뻗친 끄트머리 부분으로 사람들은 '용의 머리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여서낭은 일제강점기인 1935년 여서낭당 인근의 암석을 채취하면서 지금의 죽변성황사로 옮겼다.
죽변 성황사(당)가 관장하는 마을은 죽변1리, 죽변2리, 죽변 4리, 후정3리, 골장동 등 5개 권역이다.
또 지난 1997년부터 '3년마다 지내던 풍어굿(동해안별신굿)'을 폐지하고 각 마을 단위로 지내오던 '정월보름 마을제사'를 모두 통합해 지금의 '죽변성황 정월보름제사'로 규모를 늘여 전승하고 있다.
[울진=뉴스핌] 남효선 기자 = 정월대보름을 앞둔 23일 밤 8시, 경북 울진군 죽변면 죽변3리 봉개마을 제관들이 봉개마을 성황신인 '할배당'에서 정월보름 성황제사를 지내고 있다.2024.02.24 nulcheon@newspim.com |
[울진=뉴스핌] 남효선 기자 = 정월대보름을 앞둔 23일 밤 8시, 경북 울진군 죽변면 죽변3리 봉개마을 제관들이 봉개마을 포구인 봉수항에 자리한 '할매당'에서 정월보름 성황제사 소지를 올리고 있다. 2024.02.24 nulcheon@newspim.com |
이 중 같은 죽변리에 속하는 죽변3리 봉개마을은 죽변 성황사 대신 봉개마을과 봉수항(봉개포구)에 자리한 '할배당'과 '할매당'에서 정월보름 고사를 독립적으로 지낸다.
이들 봉개마을의 정월보름 고사는 보름 전날 밤 8시무렵부터 진행된다.
◇ 정월보름 사흘 전부터 엄격한 비의(秘儀)의 세계로
정월보름이 다가오면 죽변성황제사를 주관하는 죽변어촌계는 마을제사 준비로 부산해진다.
죽변어촌계장의 주도로 제사가 치러지는 사흘 전부터 성황당 주변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금줄을 둘러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한다. 또 성황당 입구와 주변에는 붉은 황토를 뿌린다. 이때부터 사실상 엄격한 비의(秘儀)의 세계로 들어가는 셈이다.
정월보름 성황제사에 들어가는 제비(祭費)는 죽변어촌계 기금과 울진죽변수협, 선주들의 찬조기금으로 마련한다.
지난 2005년부터 한울원자력본부가 일부 예산을 지원하며 울진군과 문화재청이 지역문화유산 보존 기금을 지원한다.
울진죽변수협도 정월보름 성황제사 비용 일부를 지원한다.
이들 기관들이 성황제사 비용 등을 지원하는 것은 정월보름 세시기간 죽변성황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성황제사 등의 일련의 제의가 지역사회의 통합과 결집, 죽변지역의 주된 생업인 어업과 연계된 독특한 제의를 지닌 전통문화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변성황 정월보름제사는 '성황제사'와 '용제'로 짜여있다.
성황제사는 엄격한 기준을 통해 선정된 삼헌관이 엄격한 유교적 제의절차에 따라 진행한다. 헌작과 독축, 유식, 소지, 음복의 절차를 진행된다.
올해 초헌관으로 선임된 조학형 울진죽변수협장이 성황신에게 첫 잔을 올리는 것과 동시에 성황사 맞은 편에 펼쳐있는 '불가(바다 백사장)'에서 '용제'가 진행된다.
[울진=뉴스핌] 남효선 기자 = 23일 밤 10시30분경에 치러진 '정월대보름 죽변성황제사'의 '용제' 제물인 조밥.2024.02.24 nulcheon@newspim.com |
◇ 성황제사 첫 잔 오르면 불가에서 '용제' 진행..."바다에 조밥 뿌리며 풍어 기원"
올해 용제의 제관은 죽변어촌계 간사인 김순명씨가 주재했다.
용제의 제수는 큰 대접에 담긴 '좁쌀밥(조밥)'이다. 성황신에게 초헌례가 치러지는 것을 기점으로 '용제' 제관이 미리 준비해 놓은 조밥을 바다에 뿌리며 "풍어와 어민, 주민들의 안녕과 건강"을 기원한다.
'조밥'을 바다에 뿌리는 것에 대해 방학수 어촌계장은 " '좁쌀 알갱이 처럼 많은 고기가 그물에 걸려들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울진=뉴스핌] 남효선 기자 = 정월대보름을 앞둔 23일 밤 10시30분에 울진군 죽변항 죽변성황사에서 진행된 마을 공동체 비의(秘儀)인 '정월보름 죽변성황제사'에서 축관인 방학수 죽변어촌계장이 고축을 하고 있다.2024.02.24 nulcheon@newspim.com |
방학수 죽변어촌계장은 고축을 통해 "성황신이시여 합의동심하시여 정성들여 빚은 제물을 흠향하시고 갑진년 한 해 죽변항 선적을 둔 어민들에게 무사고와 만선의 기쁨으로 가정에 웃음꽃이 피도록 복을 내려주시고 죽변면민의 화합과 무궁한 발전, 울진원자력이 무사고로 운영될 수 있도록 해주시소"라며 죽변항을 지키고 가꾸는 어민들과 주민들의 안녕과 평안, 풍어를 기원했다.
삼헌관의 헌작과 고축이 끝나고 제관들은 정갈하게 갈무리한 성황소지와 제관소지, 동민소지,선주소지를 말아 소지의례를 치룬다.
[울진=뉴스핌] 남효선 기자 = 정월대보름을 앞둔 23일 밤 10시30분에 울진군 죽변항 죽변성황사에서 진행된 마을 공동체 비의(秘儀)인 '정월보름 죽변성황제사'에서 제관인 제물을 정성스레 한지에 싼 후 500년이 넘도록 죽변성황사를 지켜온 향나무(천연기념물 158호) 밑에 뭍고 있다.2024.02.24 nulcheon@newspim.com |
이어 차려진 제물을 한지에 조금씩 떼어내 성황사를 감싸고 수 백년을 지키고 서 있는 향나무 앞에 진설하고 재배와 함께 비손한다.
마지막 절차로 성황제사에 참석한 참제자들인 선주와 주민들이 성황사로 들어와 성황신에게 술잔을 올린다.
이때 선주와 어업인들은 정성껏 마련한 제비를 제사상에 놓인 '돼지머리'에 꼽는다.
[울진=뉴스핌] 남효선 기자 = 정월대보름을 앞둔 23일 밤 10시30분에 울진군 죽변항 죽변성황사에서 진행된 '정월보름 죽변성황제사'에서 죽변항을 무대로 삶을 이어가는 죽변 어업인들과 울진죽변수협 관계자들이 죽변성황신에게 술잔을 올리며 "죽변항의 번성과 풍어, 건강"을 기원하고 있다.2024.02.24 nulcheon@newspim.com |
죽변항 성황제사는 군비와 국비가 일부지원돠는 이른바 '정부지원' 전통의례라는 점에서 해마다 울진군수가 배석했으나 올해는 마침 내린 폭설 대응으로 손병복 군수 대신, 죽변면장과 울진군의 문화재 관계자가 참석해 헌작례를 치루며 "울진군민들의 안녕"을 기원했다.
특히 올해 경우, 죽변항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죽변 바다를 지키고 가꾸는 선주와 젊은 어업인, 죽변지역 사화단체 대표들이 대거 참제자(參祭者)로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성황제사에 참석한 한 선주는 "매년 정월보름 성황제사에 참석한다"며 성황할배와 할매에게 잔을 드리고 비손하면 한 해 조업이 무탈하고 풍어를 가져다 준다"고 말했다.
또 대를 이어 배 사업을 잇고 있는 한 젊은 어업인은 "해마다 성황제사에 참석하고 다음날 조업에 나서면 항상 만선을 이뤘다"며 "예전 성황제사를 지낼 때면 '호랑이가 향나무 뒤에서 제사 지내는 모습을 보고 갔다'는 옛 어른들의 이야기가 전해온다"고 말했다.
[울진=뉴스핌] 남효선 기자 = 정월대보름을 앞둔 23일 밤 10시30분에 울진군 죽변항 죽변성황사에서 진행된 마을 공동체 비의(秘儀)인 '정월보름 죽변성황제사'에서 성황제사를 주관하는 방학수 죽변어촌계장이 죽변면민과 어민, 죽변항의 번영과 안녕을 담은 소지를 올리고 있다.2024.02.24 nulcheon@newspim.com |
◇ 조학형 울진죽변수협장 "성황제사는 전통문화 넘어 죽변주민 결속.통합의 상징물"
이번 성황제사에서 초헌관을 맡은 조학형 죽변수협장은 "성황제사는 단순한 전통문화를 넘어 죽변항을 무대로 살아가는 어업인들에게는 자신을 지켜주는 믿음을 주고 죽변주민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결속과 통합의 상징물"이라고 말했다.
어업인들이 줄지어 성황사에서 헌작례를 진행하는 동안 방학수 어촌계장은 성황사 앞에서 소지를 올렸다. 성황제사를 올리는 동안 조금 전 까지도 거세게 불던 바람이 잦아들면서 소지들이 하늘로 곧게 오르며 한 해의 풍어와 무탈, 안녕을 예고했다.
방 어촌계장이 제관소지와 동민소지,선주소지 등 소지를 차례로 올린 후 마지막에 축문을 태웠다.
[울진=뉴스핌] 남효선 기자 = 방학수 죽변어촌계장이 정월보름을 앞둔 23일 밤 11시경 마을 공동체 비의(秘儀)인 '정월보름 죽변성황제사'를 모두 마치고 성황사의 문을 닫고 있다.2024.02.24 nulcheon@newspim.com |
밤 11시10분. '소지올리기'를 끝으로 엄숙한 공동체 비의((秘儀)인 성황제사가 마무리되자 제관들과 참제자들은 제수를 장만한 식당에서 음복을 나누며 "죽변항의 번영과 죽변주민들의 안녕'을 담은 덕담을 나누고 성황제사에 올린 제물을 고르게 분배했다.
죽변사람들은 정월대보름에 치러지는 죽변성황제사에 참석하고 제사에 올린 제물을 가족과 함께 나눠 먹으면 "성황신이 발복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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