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소 5년 3개월만 1심 징역 2년·집유 3년 선고
전교조·통진당 사건 검토 지시 등 일부 유죄
"국민 신뢰 저하, 법원 구성원에도 자괴감 안겨"
[서울=뉴스핌] 이성화 기자 = 양승태 전 대법원장 체제 당시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이른바 '사법농단' 의혹의 실무 책임자로 재판에 넘겨진 임종헌(65·사법연수원 16기)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1심에서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지난 2018년 11월 기소 이후 약 5년3개월 만에 나온 법원 판단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6-1부(김현순 조승우 방윤섭 부장판사)는 5일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임 전 차장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기소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사진=뉴스핌DB] |
재판부는 임 전 차장이 법원행정처 심의관들에게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법외노조 통보 처분 사건 관련 고용노동부 측 재항고이유서 검토 ▲메르스 사태 관련 박근혜 정부의 법적 책임 검토 ▲홍일표 전 자유한국당 의원의 정치자금법 및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검토 ▲유동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검토 ▲옛 통합진보당(통진당) 지역구 지방의원들에 대한 제소 방안 검토 등을 지시한 행위를 유죄로 판단했다.
또 헌법재판소 파견 법관에 대한 사건 정보 및 자료 수집 지시, 공보관실 운영비를 불법 편성 받아 현금성 경비로 위법하게 사용했다는 위계공무집행방해 및 6120만원 상당의 업무상배임 혐의에 대해서도 유죄로 인정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사법부의 독립을 수호하고 재판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유지하는 사명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국가가 부여한 사법행정권을 사유화해 특정 국회의원이나 청와대를 위한 목적에 이용한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피고인의 이러한 범죄행위로 인해 사법부의 다른 국가권력으로부터 독립이라는 이념이 유명무실하게 됐고 사법부의 공정성과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저하됐을 뿐 아니라 법원 구성원에게도 커다란 자괴감과 실망을 안겨줬다"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사법부를 올바르게 이끌어가야 할 중대한 책무를 수행하는 사법행정권을 행사하는 법관들이 다시는 피고인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중대한 본문과 책무를 망각했던 피고인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물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다만 "수사 초기 사법농단이나 재판거래에 관한 중대한 의혹들은 수많은 검사들이 투입돼 수사가 이뤄지고 그 결과가 300쪽이 넘는 분량의 공소사실로 정리되는 동안 이미 대부분 실체가 사라진 채 직권남용 혐의들만 주로 남게 됐고 이러한 혐의들도 대부분 범죄가 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됐다"며 "유죄로 인정된 범행들도 대부분 피고인이 단독으로 저지른 범행들이거나 예산에 관한 범행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수사 초기부터 사법농단의 핵심으로 지목돼 오랜 기간 대내외적인 비난과 질타의 대상이 된 점, 재판만으로도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혐의를 벗기 위해 수많은 시간과 비용을 소비해야만 했던 일종의 사회적인 형벌을 받은 점, 이 사건으로 500일이 넘는 기간 구금돼 있으면서 과오에 대한 죗값을 일정 부분 치른 점 등을 양형에 고려했다"고 덧붙였다.
이날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 사건, 일본군 위안부 손해배상 사건,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사건 등에 대한 재판개입 혐의와 법원 내 진보 성향 학술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와해를 시도한 혐의를 비롯해 판사 사찰 관련 직권남용 혐의 등 다수 공소사실은 무죄로 판단됐다.
임 전 차장은 선고 직후 '선고 결과에 대해 한 말씀만 해 달라', '법원 구성원들한테 하실 말씀 없나' 등 취재진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인사 후 법원을 떠났다.
앞서 임 전 차장은 지난 2012년 8월부터 2017년 3월까지 각각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과 차장으로 재직하면서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현재까지 사법농단 의혹에 연루돼 기소된 14명의 전·현직 법관 중 임 전 차장을 포함해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과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만 유죄가 인정됐다.
항소심에서 이 전 실장은 벌금 1500만원, 이 전 상임위원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고 무죄를 선고받은 방창현 부장판사, 심상철 전 법원장과 함께 대법원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과 신광렬·성창호·이태종 전 부장판사 및 조의연 부장판사는 2021년, 임성근 전 부장판사는 2022년 각각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받았다.
사법농단 의혹의 정점으로 지목된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은 지난달 26일 1심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임 전 차장의 재판개입 등 일부 직권남용을 인정하면서도 양 전 대법원장 등이 공모하거나 지시 또는 가담했다고 볼 증거가 없다며 무죄로 판단했다.
shl22@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