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배우 이하늬가 설경구, 박소담과 함께한 신작 영화 '유령'으로 대중 앞에 섰다. 미혼의 배우에서 엄마가 돼 돌아온 그의 눈빛이 결연하다.
이하늬는 '유령'에서 일제강점기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모종의 이유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조선총독부 직원 박차경을 연기했다. 스타일리시한 액션 누아르 '독전'의 이해영 감독이 그를 염두에 두고 작업한 시나리오인 만큼, 전에 없던 서늘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매력이 돋보인다.
[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영화 '유령'에 출연한 배우 이하늬 [사진=CJ ENM] 2023.02.06 jyyang@newspim.com |
◆ '긍정 에너지' 누르고 안으로 품은 감정표현, 한계를 내보이다
"이해영 감독님이 감사하게도 책을 주시면서 차경이란 역을 저를 염두에 두고 쓰셨다고 하셨어요. 사실이든 아니든 정말 영광스러운 말씀이었죠. 그만으로도 황송하고 감사하다고 생각하며 봤는데 하지 않을 수 없는 역이었어요. 배우가 작품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작품이 운명적으로 저한테 오는 게 많다고 생각돼요. 이해영 감독님의 프라임 타임 안에 제가 소화할 수 있는 역이 있고 시간이 딱 겹처져서 하게 된 그런 느낌이라, '유령'은 저와 완전히 맞는 작품이었죠."
이해영 감독은 평소 이하늬의 팬을 자처하며, 항상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 그의 연기를 눈여겨봤다고 했다. 그리곤 정 반대의, 감정을 안으로만 품어낼 때 '큰 사람'으로서의 그의 면모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그려보고자 했다. '유령'에서는 이하늬의 내면으로 끊임없이 삼켜내는 먹먹한 감정과 깊고 짙은 슬픔에서 오는 묵직한 카리스마를 만날 수 있다.
"박차경은 표면적으로 1차원적인 사람이 아니어서 좋았어요. 슬픔이나 화, 기쁨 같은 감정들을 단번에 와락 쏟아내는 게 아니라 누르다못해 비집고 나오더라도 절대 표현하지 않는 쪽이죠. 마치 쪽빛이 살짝씩 배어나오듯 연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레이어를 굉장히 촘촘히 쌓아온 슬픔, 동굴 저 밑바닥까지도 들어가는 감정을 안고 사는 사람이죠. 사실 제가 가진 슬픔으론 잘 이해가 안됐어요. 차원이 다른 슬픔을 겪었고 겪고 있으니까요. 찰랑찰랑한 잔이 채워진 채로 살면서도 절대 쏟지 않는 것 같처럼요. 그걸 유지하는 게 촬영 내내 고통스러웠어요. 어떤 장면에서 차경을 봐도 내면의 복잡하고 깊은 어떤 것들이 조금씩 드러나기를 바랐죠. 오히려 연기하는 재미, 맛은 더 있었고요."
[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영화 '유령'에 출연한 배우 이하늬 [사진=CJ ENM] 2023.02.06 jyyang@newspim.com |
영화에서 차경의 전사가 자세히 설명되지는 않지만, 친구나 자매보다 깊은 감정을 교류한 것으로 추측되는 난영(이솜)을 잃고 묵묵히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그가 늘 되뇌는 인상적인 대사는 "죽어야 할 때 죽기위해 살아"라는 말이다. 부러울 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모든 것을 버리고 항일운동에 앞장서기까지, 그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를 이하늬는 영화에 고스란히 담았다.
"차경의 전사가 따로 나오진 않지만, 결국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시작됐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재력가의 딸이었으면 친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거고 어쩌면 최고의 엘리트 코스로 자랐을 지도 모르죠. 굳이 왜 이런 모진 삶을 생각했을까.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이 컸을 거고 자신이 누리고 있지만 사회적인 책무감 같은 것이 있었을지도요. 그 시작은 사랑하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죠. 사랑하는 사람의 신념이었는데 그가 산산이 부서지는 걸 바라보면서 무의미가 의미로 바뀌고 자신의 삶을 내던져 지키고 싶은 것이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제가 담기엔 정말 큰 인물이었죠."
◆ 연기 10년 만 '1000만배우' 타이틀…임신·출산이 배우에게 미치는 영향
이하늬는 2006년 미스코리아 진으로 연예계에 발을 들여 2009년 드라마 '파트너'로 연기자로 데뷔했다. '파스타' '상어'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 '열혈사제' '원 더 우먼' 등의 드라마에서 활약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았고, 영화 '극한직업'으로 1000만 배우 반열에도 올랐다. 여기까지 10년이 걸렸다.
"과거로는 사실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열심히 돌아왔지만요. 예전엔 언제 진짜 배우가 되지? 왜 날 아무도 배우로 안봐주지 하는 갈증이 있었어요. 한창 그러다 슬럼프를 깊게 겪고 나서야 내가 배우가 되고싶다고 배우로 봐주진 않는구나. 돌이 막 굴러서 이끼가 끼는 시간이 필요하구나. 배우는 정말 시간이 필요한 직업이란 걸 알게됐죠. 스킬보다도 그 사람이 익어야 나오는 연기가 따로 있달까요. 잔인한 직업이기도 하고 나이가 들수록 더 풍성해질 수도 있겠죠. 10년이란 시간을 제게 주고, 일단 굴러보자 했었어요. 배역의 크기 같은 건 상관하지 않고 계속 작품을 해온 게 저 자신을 구르게 하는 시간들이었던 것 같아요."
[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영화 '유령'에 출연한 배우 이하늬 [사진=CJ ENM] 2023.02.06 jyyang@newspim.com |
'유령'이 결혼 전, 한창 코로나 시기에 작업한 작품이지만 대중앞에 선보이는 지금 이하늬는 결혼과 출산을 겪고 난 엄마가 됐다. 배우로서 가장 소중한 나 자신과 신체를 관통하는 경험을 하고 난 뒤, 그는 오히려 새로운 세상을 알게된 듯 여유가 넘친다고 했다.
"사실 임신 출산을 겪으면서 인간계와 신계가 이렇게 동시에 있을 수가 있나 싶은 경험을 했어요. 내가 이렇게 동물이었나. 신의 영역인 창조의 영역을 내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일이 몇이나 될까요. 누구나 임신을 하기 때문에 그 의미를 미처 몰랐던 거죠. 저도 몰라서 가능했어요. 37시간 진통을 하면서 신의 영역에 잠시 갔다온 것 같아요. 동시에 정말 동물같은 경험들을 하면서 이땅의 엄마들이 하는 일이 이런 거란 걸 알게 됐죠. 엄마들의 세상에 정말 경외감이 들고 똑바로 살아야겠단 생각도 하고요. 엄마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정말 많이 바뀌었어요."
자연스럽게 천만배우로서, 또 엄마로서 연기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예전엔 무작정 열심히 했다면 이제는 이하늬라는 배우의 삶이 연기와 작품에 녹아든다고 믿는다. 연기를 하고 작품을 선택할 때도 이제는 또 다른 주체인 엄마로서의 시각과 세계관이 가져다줄, 더 확장된 경험을 기대했다.
"예전엔 1000만 배우가 되면 대단한 연기력의 독보적인 사람이겠거니 했는데 별로 안그래요. 그냥 똑같아요. 정말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별 게 없어서 더 내 하루가 소중하고 촬영장에서 내가 어떤 사람으로 존재하는지가 더 중요해졌어요. 1600만 관객은 마치 기적과 선물처럼 온 거죠. 일확천금 같은 걸 꿈꾸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예전엔 연기를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라고 생각했고 그것만이 무기라고 여겼어요. 이제는 그보다도 삶을 연기하고 싶어요. 내 삶을 살아가면서 이걸 녹여내는 배우를 꿈꾸게 됐죠. 이젠 누가 알아보든 말든 문화센터 가서 애 들처업고 '이거봐라' 하는 엄마인걸요. 아무것도 상관이 없어졌어요. 육아와 일을 병행할 때도 책임감이 강해서 죄책감도 큰 편이에요. 그래도 채무감을 조금 내려놓고 인간 이하늬에게도 좀 숨통을 트여주고 싶어요."
jyyang@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