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2일까지 이화익 갤러리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이화익갤러리(서울 종로구 율곡로)는 11월 2일부터 11월 22일까지 안두진 작가의 개인전 <리듬 속에 그 춤을 Dance to the Rhythm> 전시를 진행한다. 코로나19 직전인 2019년 10월 개인전 <조류 : 고오오오-> 개최 이후 3년 만에 열리는 작가의 개인전이자 박사 학위 청구 전시회로 3년 동안 진행해온 신작들을 한데 모아 선보인다.
안두진 작가는 1975년 경기도 수원 출생으로 홍익대학교 회화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홍익대학교 회화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5년 중앙미술대전 선정 작가였으며, 2013년 제2회 종근당 예술지상을 수상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등 국내 주요미술관 뿐만 아니라 미국 영화감독이자 세계 미술계 주요 컬렉터 중 한명인 올리버 스톤 컬렉션과 아부다비 왕족 컬렉션에도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Splash!, Acrylic & Oil on canvas 51 1/5 × 63 in | 130 × 160 cm(2022) 2022.11.04 digibobos@newspim.com |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Floating 둥둥(2021) 2022.11.04 digibobos@newspim.com |
안두진은 "이마쿼크"라는 본인만의 가설을 기반으로 한 회화작품에 몰두하고 있다. 이마쿼크(Imaquark)는 이미지(Image)의 'Ima-'와 복합소립자를 뜻하는 'Quark'의 합성어로 이미지의 최소단위를 뜻한다. 즉, 이미지의 최소단위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단어로 자연의 미시세계의 추상적 개념을 미술적으로 전환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안두진 작가의 회화는 작가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의도를 최대한 배제하고, 이마쿼크들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발생과정을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그림을 그리는 작가"는 물감을 캔버스에 옮기는 역할만을 수행할 뿐 그림은 이마쿼크들의 이동들로 스스로 그림이 되어지는 것이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Boink!(2020) 2022.11.04 digibobos@newspim.com |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Boink - Oval and sky(2019) 2022.11.04 digibobos@newspim.com |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A deeper there(2022) 2022.11.04 digibobos@newspim.com |
지난 전시에서는 이러한 이마쿼크들의 반복적인 움직임과 그 움직임들이 파생하는 (무음의) 소리에 집중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그가 정립하고자하는 그리기 이론의 완성에 이르기 위하여 시도한 실험적인 작품들이 돋보인다.
"디디-위베르만은 이미지는 고유한 운동성을 지닌다고 하는데 1) 혼미한 정신 속에서 행해진 행위야 말로 이미지를 향한 순수한 운동일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운동하며 운동하는 모든 것은 흔적을 남긴다. 이 말은 물리학적으론 입자들을 뭉치게 하는 힘들 또한 매개 입자를 갖는 다는 것이고 칸트의 말을 빌리면 숭고의 감정으로 인한 마음의 운동(동요) 즉 불쾌일 것이다."
"물리적 관점에서 이마쿼크와 물감의 관계와 충돌의 지점으로서의 형광면과 숭고의 감정과의 관계, 즉 이 두 그룹의 기묘한 공존에는 관통하는 것이 있다. 물질과 숭고는 운동(힘)에 의해 공존된다는 것이다. 형광면 위에 물감이 운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화가는 무엇을 하는가? 판단하지 않고, 아니 그 전에 운동(그리기)은 시작된다. 판단이 사라진 있는 그대로의 상태의 그리기만 있을 뿐이다." - 작가 노트 중 -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Lemon yellow and white(2022) 2022.11.04 digibobos@newspim.com |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포맷변환]ku ku ku kung!, (2022) 2022.11.04 digibobos@newspim.com |
특히,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Gabriel - (no.1) - 검은 원과 검은 사각형> 작품은 작가가 기존 회화의 모든 요소를 제거하는데 집중한 작업이다. 회화의 이야기, 추상성, 물질의 느낌, 작가의 그리기적 재능 등이 최대한 제거된 그림의 결과물이라고 말하는데 작가는 그 끝에서 도리어 신비 또는 신성과 같은 것을 보게 되어 당혹스럽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작가가 말하던 숭고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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