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tvN이 역사왜곡에 휘말렸다. 드라마 '철인왕후'를 비롯해 예능 '설민석의 벌거벗은 세계사'의 역사관이 도마 위에 올랐다. 제작진의 공식 사과에도 불구하고, tvN의 역사 의식에 대한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 "조선왕조실록도 지라시네"…인물 수정까지 나선 '철인왕후'
지난 12일 첫 방송된 새 드라마 '철인왕후'는 현대시대 허세남의 영혼이 조선시대 중전 김소용(신혜선)의 몸에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퓨전 사극을 그렸다. 이 작품은 중국 '태자비승직기'가 원작인 가운데, 원작에서는 '혐한' 요소들이 발견돼 제작 전부터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했다.
[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철인왕후' 메인 포스터 [사진=tvN] 2020.12.24 alice09@newspim.com |
우려의 목소리는 곧 현실이 됐다. 중국 작품을 '한국화' 하면서 '남성의 영혼이 왕후의 몸에 들어온다'라는 설정은 고스란히 가져왔지만, 국내에서 방송되고 있는 '철인왕후'는 혐한이 아닌 역사왜곡으로 뭇매를 맞았다.
이 작품에는 철종, 김소용 등 실존 인물들을 차용해 만든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중전의 몸을 하고 있지만 영혼은 현대시대 남성의 것이기에 궁궐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실존 인물들과 역사가 녹아있지만, 이 모든 것들이 드라마 내에서는 자극적인 요소들로만 사용됐다. 지난 13일 방송에서는 실존 인물인 신정왕후를 부적을 사용하고 저주를 내리는 등 미신에 심취한 인물로 표현했다.
이에 신정왕후의 후손인 풍양 조씨 종친회가 반발했고, 제작진은 관련 논란을 의식한 듯 공식 홈페이지에 게재된 인물관계도 속 '풍양 조문'을 '풍안 조문'으로 '안동 김문'이 '안송 김문'으로 수정했다.
또 철종(김정현)이 잠자리에서 왕후를 멀리하자, 그는 "주색으로 유명한 왕의 실체가…조선왕조실록 한낱 지라시네"라는 대사를 내뱉었다. 특히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을 '지라시'로 표현한 점에 대해 시청자들은 불쾌감을 드러냈다.
더불어 일부 시청자들은 '철인왕후'의 설정과 대사들이 우리나라 전통 문화와 왕조를 희화화하는 것이 아니냐고 지적하고 있다. 이 작품은 퓨전사극과 코미디 장르지만, 실존 인물과 실제 역사 배경을 차용한 만큼, 이번 사안에 대한 비판 여론은 커지고 있다.
[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역사왜곡 논란 후 수정된 인물설정도 [사진=tvN] 2020.12.24 alice09@newspim.com |
뿐만 아니라 '철인왕후'의 원작인 '태자비승직기' 작가가 또 다른 작품인 '화친공주'에서 한국인을 비하했다는 사실 등이 알려지며 방송 직후 방송통심심의위원회에 700건이 넘는 민원이 접수되기도 했다.
이에 '철인왕후' 제작진은 "이 작품은 해당 드라마의 제작사가 중국에서 방영한 웹드라마 '태자비승직기'의 리메이크 방영권을 구매하여 기획된 작품"이라며 "제작에서 원작 소설이 아닌 웹드라마의 리메이크 방영권을 구입한 것이고, 계약 당시에는 웹드라마 '태자비승직기'의 원작 소설가의 또 다른 작품인 '화친공주'에 한국 관련 부정적 발언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이어 "해당 사실을 사전에 인지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시청자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 드리며, 원작과 차별화된 새로운 창작물로서 보시는 데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제작에 최선을 다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특히 '조선왕조실록 지라시' 대사에 대해 "해당 표현이 부적절했음을 무겁게 받아들여 문제된 내레이션을 삭제했다. 그 밖에 역사적인 인물과 사건 등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표현할 의도는 없었다"고 밝혔다.
제작진은 "'퓨전 사극 판타지 코믹' 장르로 역사 속 인물과 배경을 차용했지만 '현대의 영혼이 실존 인물을 만나 파동을 일으키게 된다면?' 이라는 상상력에서 출발한 창작에 기반한 픽션이다. 건강한 웃음을 드리고자 했던 의도와 달리 불편을 드린 점 다시 한 번 죄송한 말씀드린다"며 "앞으로 제작에 더욱 유의하여 좋은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 '벌거벗은 세계사'…설민석 "내가 부족하고 모자라서 생긴 부분"
tvN에서 역사 왜곡으로 논란이 된 프로그램은 또 있다. 바로 역사 강사로 이름을 알린 설민석이 자신의 이름을 내건 '설민석의 벌거벗은 세계사'이다.
이 예능은 전 세계 곳곳을 온택트로 둘러보며 각 나라의 명소를 살펴보고, 다양한 관점에서 우리가 몰랐던 세계의 역사를 파헤치는 프로그램이다. 유명 역사 강사의 프로그램인 만큼, 첫 방송부터 관심은 뜨거웠다.
[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사진=tvN] 2020.12.24 alice09@newspim.com |
지난 12일 첫 방송된 '벌거벗은 세계사'는 5.2%(닐슨, 전국 유료플랫폼 가입기준)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어 2회 방송분은 5.9%로 0.7%P 상승한 수치를 기록했다. 시청률도 상승했고, 화제성 역시 대단했다. 방송 내내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는 프로그램명과 설민석의 이름이 뜨면서 화제성을 입증했다.
하지만 문제는 2회에서 터졌다. 해당 편에서는 6000년 역사를 지낸 고대 문명의 발상지인 이집트에 대해 다뤘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 편 자문을 맡은 고고학자 곽민수 한국이집트학 연구소장이 지난 2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사실관계가 자체가 틀린 게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언급하기가 힘들 지경"이라고 비판하며 내용상의 오류를 지적, 논란에 휩싸였다.
곽 소장은 "재미있게 '역사 이야기'를 한다고 사실로 확인된 것과 그냥 풍문으로 떠도는 가십거리를 섞어서 말하는 것에 저는 정말 큰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며 "설민석이 진행하는 이 프로그램은 그 문제의식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역사적 사실과 풍문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은 역사 이야기를 할 때 관심을 끌기에 분명히 좋은 전략이지만, 하고자 하는 것이 그냥 '구라 풀기'가 아니라 '역사 이야기'라면 사실과 풍문을 분명하게 구분해 언급해줘야 한다"며 "게다가 이건 언급되는 사실관계 자체가 수시로 틀렸다"고 비판했다.
마지막으로 곽 소장은 "제가 자문한 내용은 잘 반영이 안 돼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보지 마시라"고 일갈했다.
이에 '벌거벗은 세계사' 제작진은 "먼저 방대한 고대사의 자료를 리서치하는 과정에서 일부 오류가 있었던 점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사과문을 발표했다. 이어 "제작진은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자문단을 더 늘리고 다양한 분야의 자문위원님들의 의견을 겸허히 수용하겠다"며 재발방지를 약속했다.
[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설민석의 사과영상 [사진=설민석 유튜브 캡처] 2020.12.24 alice09@newspim.com |
제작진의 사과에도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설민석 역시 '역사 강사' 임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부분을 그대로 미디어에 노출시켰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이에 설민석은 지난 22일 "지난 2화 클레오파트라 편에서 제가 강의 중에 오류를 범했고 그 부분을 자문위원께서 지적해 주셨다. 제작진이 정중하게 시청자 여러분들께 사과의 말씀을 드렸는데, 제가 판단하기엔 제작진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모든 잘못은 나에게 있다"고 밝혔다.
이어 "제가 많이 부족하고 모자라서 생긴 부분인 것 같다. 앞으로 여러분들의 말씀들 더 잘하라는 채찍질로 여기고 더 성실하고 더 열심히 준비하는 설민석의 모습을 보여드리도록 할 것"이라며 "걱정해주셨던 많은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 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tvN은 이번 뿐만 아니라 이전에도 역사 문제로 계속해서 논란의 도마에 올랐다. 지난 2018년 방송된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나라를 팔았다는 평가를 받는 이완용을 모티브로 구동매(유연석) 캐릭터와 실존 단체를 차용하면서 이들에게 친일이 정당하다는 명분을 부여해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로 인해 사과문 발표와 더불어 캐릭터 수정에 들어가기도 했다.
또 '즐거운 토요일-도레미 마켓'에서는 아역배우 김강훈에게 입혔던 갑옷이 임진왜란에 참여한 이시다 미츠나리 집안의 문장이 쓰여 있어 왜색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는 의상 대여 업체는 물론, 제작진도 문제를 인식하지 못해 발생했고, VOD는 전면 재편집되기도 했다.
이에 한 방송 관계자는 "역사는 재미를 위해서 바꿔서도, 바꿀 수도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에 기반을 둔 작품들은 사실에 기반해 조금의 픽션을 가미하거나 역사 인물들의 이름을 다르게 수정하는 것이 지금까지 해온 관례"라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이번 tvN의 드라마의 경우, 실존 인물이나 역사를 아예 폄하했다고 생각한다. 이건 코미디 장르와 엮어서는 안 될 문제"라며 "예능도, 드라마도 역사에 대해 다룰 때 조금 더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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