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이현경 기자 =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근대시기 이전의 강수량 측정 기구로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남은 것으로 알려진 보물 제561호 '금영 측우기'를 비롯해 조선시대 측우 제도를 계통적으로 증명하는 보물 제842호 '대구 선화당 측우대'와 보물 제844호 '창덕궁 측우대'를 국보로 지정 예고했다.
보물 지정 당시 명칭은 위 순서대로 '금영 측우기' '대구 선화당 측우대' '창덕궁 측우대'였으나 원소재의 정확한 표기를 위해 각각 '공주감영 측우기' '대구감영 측우대'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로 명칭을 변경 예고했다.
[서울=뉴스핌] 이현경 기자 = 공주감영 측우기(현 보물 제561호 금영 측우기) [사진=문화재청] 2019.12.30 89hklee@newspim.com |
세 보물은 1971년(측우기)과 1985년(측우대) 두 번에 걸쳐 지정됐으며 멀게는 근 50년 만에 국보로서 가치가 새롭게 인정받게 됐다. 1442년(세종 24년) 조선에서 농업에 활용하고자 세계 최초로 측우기와 측우대를 제작한 이후 그 전통이 이어져 왔음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측우기의 경우 1911년 세계 기상학계에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하고 획기적인 발명품으로 이미 높은 평가를 받았다.
보물 제561호 '금영 측우기'는 조선시대 충남 지역 감독관청이던 공주감영에 설치됐던 것으로 1915년경 일본인 기상학자 와다 유지(1859~1918)가 국외 반출한 뒤 1971년 일본에서 환수돼 서울 기상청이 보관해 왔다. 조선시대에는 중앙정부에서 측우기를 제작해 전국의 감영에 보냈기 때문에 여러 점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금영 측우기'만 유일하게 알려져 있다.
'금영 측우기'의 제작시기와 크기 등은 중단의 바깥 면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확인된다. 명문에 의하면 이 측우기는 1837년(헌종 3년) 만들었으며 높이는 1자(尺) 5치(寸), 지름 7치, 무게 11근이다. 오늘날 치수로 환산하면 높이 31.9cm, 지름 14.9cm, 무게는 6.2kg에 해당한다. 이는 세종 대에 처음 만들어진 측우기 제도를 그대로 따른 것이며, 바닥면의 명문을 통해 통인(通引), 급창(及唱), 사령(使令)의 직책을 가진 관리들이 관련 업무를 담당했음을 보여준다.
[서울=뉴스핌] 이현경 기자 = 대구감영 측우대 측면 [사진=문화재청] 2019.12.30 89hklee@newspim.com |
문화재청은 측우기의 과학적인 제작기법을 규명하기 위해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과 함께 과학적 조사와 실험을 시행했으며 그 결과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먼저 각 접합부는 빗물이 고였을 때 새는 것을 막고자 납땜을 해 고정한 흔적이 있다. 정밀측정 결과 높이가 주척을 기준으로 1자 5치(1척 5촌)의 근사치에 해당하고 각 단은 약 5치의 크기로 만들어져 몸체 자체가 강수량을 알 수 있는 척도로서 기능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기존에 빗물의 양을 조선시대 도량형 표준자인 주척을 사용해 별도로 쟀을 것으로 막연하게 추정해 온 것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세종 대 확립된 측우기 제도는 임진왜란 등을 거치며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다 1770년(영조 46년) 부활했다. 영조는 세종대의 제도에 따라 측우기를 제작해 팔도감영에 보내고 측우대는 세종 대 척도를 고증해 1740년에 만든 신제척 가운데 포백척을 따라 높이 1자, 길이와 폭 8치, 구멍의 깊이 1치로 하게 했다. 이렇듯 영조 대에 새롭게 확립된 측우대 제작을 증명해주는 유물이 보물 제842호 '대구 선화당 측우대'다.
'창덕궁 측우대'는 1782년(정조 6)에 제작된 것으로 측우대 제도가 정조 연간(1776~1880)에도 이어졌음 알려주는 유물이다. 비록 함께 있던 측우기는 확인되지 않지만 명문과 '동궐도' 등 회화자료를 통해 창덕궁 이문원 앞에 놓였던 사실이 확인되며 정면에 조선 시대 강수량 제도의 역사를 설명해 놓은 긴 명문이 새겨져 있어 주목된다.
이 측우대의 명문은 다음과 같이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첫째, 측우기는 1442년(세종 24년)에 구리로 주조했으며 높이 1자 5치, 지름 7치라는 사실이다. 둘째는 1770년(영조 46년)에 세종 대의 제도를 따라 측우기를 만들고 창덕궁, 경희궁, 팔도, 강화부, 개성부에 뒀다는 거다. 셋째는 1782년(정조 6년) 여름에 기우제를 지낸 후 비가 내렸고 정조의 명으로 규장각 이문원 뜰에 측우기를 설치했다는 사실이다.
[서울=뉴스핌] 이현경 기자 =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측우기 복원 모습 [사진=문화재청] 2019.12.30 89hklee@newspim.com |
'창덕궁 측우대'는 조선 전기 확립된 강수량 측정제도에 연원을 두고 있으며, 조선 후기까지 그 전통이 지속됐음을 증명하는 사례로 중요한 의의가 있다.
이번에 국보 지정 예고된 '금영 측우기'를 비롯해 '대구 선화당 측우대'와 '창덕궁 측우대'는 제작 시기와 연원이 명확할 뿐 아니라 농업을 위한 과학적 발명과 그 구체적인 실행을 증명하는 유물로 인류문화사 관점에서도 큰 가치가 있다. '금영 측우기'는 1837년 제작됐으나 실물 크기가 세종 대 측우기 제도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두 점의 측우대 역시 규격과 명문을 통해 그 계통을 따랐음을 말해준다.
문화재청은 국보로 지정 예고한 '금영 측우기' 등 총 3건에 대해 30일간 예고 기간 각계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국보)로 지정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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