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1~3호 월성 해자지구 발굴 조사 발표
1호 월성 수혈해자 규모 30~40m
백제 풍납토성 등 10~15m 정도
[경주=뉴스핌] 이현경 기자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삼국시대 해자지구 중 경주 월성의 규모가 가장 클 것으로 추정했다. 신라 왕궁인 월성 해자는 북쪽은 성벽을 따라 도랑을 파고 물을 채워 만들어졌고 남쪽은 자연하천인 남천(문천)을 활용했다. 해자를 만드는 방법에 따라 크게 2가지로 나뉘는데 땅에 구덩이를 파 수혈해자와 돌을 쌓아 사용한 석축해자로 구분된다.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일 경주 월성 발굴 지구에서 열린 ‘경주 월성 발굴조사 성과 현장 공개 기자브리핑’에서 이 같은 내용을 발표했다. 연구소에 따르면 수혈해자 층 전체에서 호안 목제 구조물을 구성하는 목주 45개, 판재 168개, 갈고리형 목제 6개 등이 확인됐다.
석축해자는 총 6개의 독립된 형태가 확인됐다. 각 해자는 입‧출수구로 연결돼 있다. 1~5호 해자와 나 지구 석축해자로 나눠 조사‧발굴 연구가 진행 중이다. 2015년에 4~6호, 나 지구 석축해자에 대한 발표가 있었고 올해는 1~3호 조사 결과가 공개됐다.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1~3호 수혈해자의 최대폭은 약 58m, 최대깊이는 약 1.8m다. 석축해자의 최대 길이는 약 150m, 최대폭은 약 50m, 최대높이는 약 0.8m다.
![]() |
[경주=뉴스핌] 이현경기자=월성 1호 해자지구에 대해 설명중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장기명 학예연구관 2019.04.01 89hklee@newspim.com |
이날은 실제 목제 구조물 대신 현수막에 프린트된 자료로 확인이 가능했다. 목재이기 때문에 공기 중에 노출되면 자칫 훼손될까 우려돼서다. 최문정 학예연구관은 “현수막으로 길이와 높이를 전달하고 싶어 이렇게 마련했다. 여기에 보면 나무판재가 일곱 단이고 목주는 최대 3m까지 나왔다. 목주 간 간격은 1.5m, 판재 두께는 3cm”라고 밝혔다.
이어 “이 시설물은 수혈해자 층 바깥에 만들어졌고 유실물을 방지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해자 전체에서 확인됐다”면서 “이 시설을 통해 삼국시대에 대규모 토목 공사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설명했다.
![]() |
[사진=문화재청] |
연구소의 복원도에 따르면 이 목제 구조물은 거리를 띄워 판재를 엮는 방식을 취했다. 갈고리형 및 쐐기형으로 만들어졌다. 최 연구관은 “신라시대 사람들의 목재를 다듬는 방법, 토목 공사 과정을 복원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월성해자는 삼국시대에 수혈해자를 만들어 사용하다 통일신라 이후 해자 벽을 돌로 쌓아 석축해자로 전환했다. 통일 직후 7세기 후반 월성 주변에 대대적 정비 공사가 이뤄지던 시기에 수혈해자에서 석축해자로 변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장기명 학예연구관은 신라시대 해자에 대해 “해자를 성벽을 둘러싼 방어시설로 생각하기 쉬운데 삼국통일 이후 신라는 조경 시설로 1, 2, 3, 4, 5호로 나눠 조경시설로 운영됐다”고 설명했다.
![]() |
해자지구 출토 유물 [사진=문화재청] |
특히 장 학예연구관은 신라시대 해자의 규모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1호 수혈해자의 규모를 보면 30~40m에 달한다. 동시대 백제 풍납도성의 해자, 고구려 국내성과 평양성, 대가야 고려 연저리 궁터 해자를 보면 10~15m에 그친다. 그에 비하면 굉장한 규모”라고 말했다. 신라인들이 국가적으로 대규모 토목행사를 진행한 사실을 보여준다는 설명이다.
한편 월성 해자지구에서는 배와 방패를 본뜬 목제품, 복골 동물뼈, 60여종의 씨와 열매류, 3면 목간, 단조철부가 함께 출토됐다. 배 모양의 목제품은 현재까지 확인된 배를 모방한 유물로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확인됐다. 배의 내외에 불에 그을리고 탄 흔적 등이 남아 있어 의례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89hklee@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