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친, 숙명의 라이벌 고르바초프 대통령 사임 이후도 혹독한 견제
본인도 퇴임후 후회·고립 '쓴맛'...후계자 푸틴에 '허수아비'로 전락
[서울=뉴스핌] 김흥식 객원논설위원 = 고르바초프에 대한 옐친의 몽니 부리기는 그 자신이 90년 러시아 민선 대통령으로 당선, 고르바초프에 각을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실패한 쿠데타 사건을 계기로 본격화했다. 옐친의 강압에 떠밀린 고르바초프가 1991년 12월 25일 소련 대통령직을 사임하자 이제는 끝나겠거니 했지만 옐친의 몽니부리기는 그 후로도 멈추지 않았다.
[서울=뉴스핌]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 |
◆옐친, 숙명의 정치적 라이벌 고르바초프 대통령 사임 이후도 혹독한 견제
과거 모스크바 시 당 제1서기에서 밀려난 원한 때문이지 옐친의 감정은 사그러질 줄 몰랐다. 여기에는 숙명의 정치적 라이벌인 고르바초프의 부활을 막으려했던 원려도 깔려 있었다고 본다. 정치적 라이벌 사이에서 대중의 사랑을 나누어 갖기는 어렵다고 하는데 두 사람 사이가 그랬던 것 같다. 고르바초프와 옐친 두 사람 다 대중성을 기반으로 대중적 정치가로 성장했던 것이고 러시아인들이 고르바초프 대신 옐친을 선택함으로써 운명이 바뀌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르바초프의 수난은 혹독했다. 예를 들면, 전직 대통령에게 법적으로 보장된 예우와 특전은 고르바초프가 크렘린궁을 떠남과 동시에 모두 취소되었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경호는 물론이고 국가문서보관소 기록물 열람권, 퇴임직전 약속했던 정부지원하의 고르바초프 재단 설립도 원천 봉쇄됐다.
대통령에게 주어지는 아파트와 시골별장도 24시간 내에 비우라고 했다고 한다. 해외여행도 금지되었다. 고르바초프재단 설립은 그를 독일통일의 최대 은인으로 생각한 콜 총리의 선처로, 구 동독 대사관 건물을 사용하게 했다. 해외여행 금지조치 역시 서방의 빗발친 항의로 철회되긴 했다.
옐친의 몽니부리기는 해외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서방 정상들이 고르바초프를 만나주는 걸 아주 싫어했고 방해하려는 시도도 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르바초프 부부가 1995년 2월 서울을 방문해서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고자 했다. YS로서는 고르바초프가 한.소 수교의 직접 당사자라는 점과 야당총재시절 자신을 만나주었다는 점에서 거절할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그러나 옐친 대통령은 YS에게 만나지 말라고 강경하게 요구했다. 심지어 쿠나제 주한 러시아 대사를 통해해 면담 취소를 요구하는 의사를 전달하기도 했다. YS는 현명하게도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르바초프를 만나주었다. 양국관계의 초석을 다진 옛 친구를 나몰라라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옐친의 몽니는 대통령을 물러날 때까지 계속됐다. 러시아 현대사에서 대격변의 시대를 이끈 두 사람은 끝내 친구가 될 수 없었다. 흔히 정치에는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고 하는데 달라도 너무 다른 이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서울=뉴스핌]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 |
◆옐친 본인도 퇴임후 후회·고립 '쓴맛'...후계자로 키운 푸틴에 허수아비로 전락
그토록 당당했던 옐친도 퇴임 후에는 고르바초프 못지않게 후회와 고립의 쓴 맛을 보게 됐다. 후계자 문제와 관련, 권력층 내부 갈등으로 골머리를 앓던 옐친은 측근을 비롯한 기존의 핵심인사들을 모조리 배제하고 푸틴이라는 정치 신인(당시 페테르부르그 부시장)을 발탁해 후계자로 키웠다. 맡은 직무를 묵묵히 수행하고 옐친 정치노선에 남다른 충성심을 보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정치적 야심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기 때문이다.
옐친에 의해 대통령 행정실 부실장, 연방보안국장, 국가안보위원회 서기, 총리, 대통령 권한대행 등 불과 3년 사이에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했다. 푸틴은 처음에는 옐친의 노선과 지도를 떠받드는 듯 했으나 해가 갈수록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다. 옐친 계 인사들을 짧은 시간 안에 모두 축출했다. 옐친이 야심차게 설계하고 추진했던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시스템도 러시아 실정에 맞지 않다며 유명무실하게 만들어 버렸다.
푸틴의 감춰진 야심을 살피지 못한 옐친은 뒤늦게 후회막급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직접 발탁하고 키운 충성스런 후계자가 스탈린 못지 않은 무소불위의 독재자로 변할 줄은 짐작조차 못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격동기 주역이었던 고르바초프와 옐친이 야심을 품지 않은 정치신인을 발탁한다고 한 게 결과적으로 호랑이를 키운 셈이 된 것이다. 역사의 아이로니가 아닐 수 없다.
고르바초프와 옐친에 대한 역사적 공과를 평가하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경우 개혁은 완수하지 못했지만 자신에게 맡겨진 역사적 역할을 큰 혼란 없이 수행했다는 점에서 현대사의 흐름을 바꾼 위인으로 평가할만하다. 옐친 역시 소련 해체 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시스템을 도입, 정착시키고자 했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는다. 면밀한 준비 없이 성급하게 추진하는 바람에 혼란을 자초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과거의 공산체제로 돌아가기 어렵게 만든 점은 옐친의 공적이라고 할 만하다.
[모스크바 로이터=뉴스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31일(현지시간) 신년연설을 하고 있다.2018.01.01. |
▲김흥식 뉴스핌 객원논설위원
한국외대 러시아어과를 졸업하고 1977년 동양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뎠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해직되는 아픔을 겪고 쌍용그룹에 몸담고 있다가 1988년 연합뉴스 기자로 복귀했다. 1991년 한국의 첫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파견돼 맹활약했다. 이후 연합뉴스 북한부장, 남북관계 부장, 문화부장, 논설위원실 간사, 경영기획실장을 거쳐 편집담당 상무이사를 지냈다. 퇴임후 연합뉴스 부설 동북아센터 상임이사, 중소기업진흥공단 비상임이사, 도로교통공단 비상임이사, 방송통신심의위원회 특별위원 등을 지낸뒤 현재 뉴스핌 객원논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khs@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