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최신뉴스 GAM
KYD 디데이
글로벌 일본

속보

더보기

"소녀의 몸, 사체는 썩어도 비디오론 다시 볼 수 있지"

기사입력 : 2019년02월05일 09:00

최종수정 : 2019년02월25일 16:20

일본 역사상 최악의 아동유괴 살인사건 일으킨 '미야자키 쓰토무'
'오타쿠=잠재적 범죄자' 인식을 만들어내

[서울=뉴스핌] 김은빈 기자 = "소녀들의 몸을 내 것으로 하고 싶었다. 사체는 썩어버리지만 비디오는 다시 볼 수 있지."

1989년 아키히토(明仁) 덴노(天皇)의 즉위와 함께 헤이세이(平成) 시대가 시작되면서 일본 열도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잔뜩 부풀어오른 분위기는 얼마 안 가 산산조각이 난다. 그해 일본에서 역사상 최악의 미성년자 대상 범죄 두 건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네 소녀의 목숨을 앗아간 '도쿄·사이타마 연쇄 유아 납치살해 사건'이다. 사건명보다는 가해자인 미야자키 쓰토무(宮崎勤)의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진 이 사건은 범행의 잔혹성과 범인의 광기로 인해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사건 중 하나다.

미야자키 쓰토무의 첫 공판을 방청하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 [사진=지지통신 뉴스핌]

◆ 처참하게 짓밟힌 네 명의 소녀

1989년 7월 23일 도쿄(東京) 하치오지(八王子)시에서 한 남자가 붙잡혔다. 그는 어린 소녀의 성기에 카메라 렌즈를 넣으려는 성폭행을 저지르려다가 소녀의 보호자가 목격하면서 붙잡혔다. 남자의 이름은 미야자키 쓰토무.

경찰에 잡힌 쓰토무의 '스펙'은 좋은 편이었다. 그는 도쿄(東京) 아키루노(あきる野)시에서 지역신문사를 운영하는 집안의 장남으로, 이른바 금수저였다. 게다가 고등학생 때까지는 메이지(明治)대학 부속고등학교를 갈 정도로 성적이 높은 편이었으며, 도쿄공예대학(東京工芸大学) 단기대학부를 졸업한 뒤에는 인쇄 회사에 취직하기도 했다.

문제는 그의 '범죄 이력'도 화려했다는 것이다. 쓰토무가 조사에서 과거 범죄를 자백하면서 경찰은 뒤집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린 소녀를 대상으로 연쇄살인을 저질렀던 살인마였다.

범행을 자백한 지 하루 만인 8월 10일, 노모토 아야코(野本綾子·당시 5세)의 머리가 발견됐다. 이어 9월 2일 검사가 기소에 들어가면서 어린 소녀들의 사체가 속속 발견됐다. 그에게 살해당한 소녀는 모두 4명. 나이는 4~7세로, 아직 제 앞가림도 못할 어린아이들이었다.

범행 현장 사진 [사진=지지통신 뉴스핌]

그의 범행 내역은 다음과 같다. 1988년 8월 22일, 그는 사이타마(埼玉)현에서 콘노 마리(今野真理·당시 4세)를 납치한다. 이후 하치오지시의 숲으로 끌고 가서 오후 6시경 살해하고, 다음날 비디오 대여점에서 카메라를 빌려 사후경직으로 굳은 사체를 비디오로 촬영했다. 그는 사체의 일부분을 절단해 벽장에 보관하고 나머지는 화장 후 유기했다.

이어 같은 해 10월 3일, 그는 사이타마현 소학교(초등학교)에서 놀고 있던 1학년 요시자와 마사미(吉沢正美·당시 7세)를 납치한 후 마리를 죽인 장소로 끌고 가 살해했다. 옷을 벗긴 후앤 시체에 외설행위를 했다.

진술에 의하면 마사미는 아직 죽지 않았는지 발을 움찍거릴 정도의 경련을 일으켰다. 쓰토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스릴을 느꼈다"고 진술했다.

같은 해 12월 9일 사이타마현에서 난바 에리카(難波絵梨香·당시 4세)가 그에게 납치당한다. 끌고 가는 도중에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자, 그는 차 주변에 난방을 틀고 옷을 벗긴 뒤 성폭행했다. 오후 7시경 살해한 후 시신을 유린하는 영상을 찍고 다시 숲에 시체를 유기했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사망한 에리카의 부모 집에 엽서를 보냈다. 엽서는 잡지에서 활자를 오려내 만든 것으로, 살해 당시를 연상시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어 1989년 2월 6일, 피해자인 콘노 마리의 집에 골판지 상자가 배달된다. 상자에는 마리의 것으로 보이는 뼛조각과 치아가 있었다. 이어 2월 10일에 그는 이마다 유코(今田勇子)라는 가명으로 아사히신문 도쿄 본사에 성명을 보낸다. "아이를 유산한 스트레스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내용으로, 수사에 혼란을 주기 위함이었다.

이어 같은 해 3월 29일, 인근에서 일본 역대 최악의 미성년자 대상 범죄 중 하나인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 피해자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경찰의 관심이 미야자키 쓰토무에서 그쪽으로 옮겨가게 된다. 이후 쓰토무도 2개월간 별다른 활동에 나서지 않았다. 

그리고 1989년 6월 6일. 그는 도쿄에서 노모토 아야코를 납치한 후 차량 내에서 살해했다. 시신 유린 장면은 비디오로 촬영됐고, 그는 시체의 일부를 잘라 먹고 피를 마신 뒤 시체를 공동묘지 화장실에 버렸다. 

1997년 4월 도쿄지방재판소에서 미야자키 쓰토무의 사형이 선고됐다. [사진=지지통신 뉴스핌]

경찰에 잡힌 후 쓰토무의 집에서는 5763개의 비디오테이프가 발견됐다. 그 안에는 높은 수위의 호러 영화와 로리타 콤플렉스를 다룬 성인물이 발견됐다.

언론은 이를 두고 오타쿠를 잠재적 범죄자라는 식으로 보도하면서, 일본에선 오타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박히게 된다.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오타쿠(オタク)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다.

그런데 쓰토무는 공판이 시작되자, 이전에 자신의 자백을 뒤집곤 "내 안에 또 다른 인격이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재판의 주요 변수는 그의 다중인격 여부가 됐다. 정신이상자는 형사책임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정신 감정에 시간이 많이 소요됐다. 해당 사건의 심리가 1990년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시작됐지만, 1차 판결까지 7년이 걸렸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1차 정신 감정 결과 그는 '극단적인 인격적 편향', 즉 인격 장애로 나왔으며, 정신 장애가 아니기에 완전한 책임능력이 인정됐다. 2차에선 심신미약으로 분류됐다. 이 경우 사형 선고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재판소는 1차 감정 결과를 수용해 1997년 아동 유괴 살인 혐의로 사형을 선고했다. 2001년 6월 도쿄고등재판소는 미야자키의 항소를 기각하고 사형을 선고했으며, 2006년 최고재판소도 상고를 기각하며 사형 판결을 최종 확정했다.

2008년 6월 17일 사형 판결을 받은 지 2년 뒤 미야자키 쓰토무의 사형이 집행됐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아직 못 본 비디오가 있는데 말이지"였다.

◆ 열등감 속 얻은 '어린 소녀'의 위로

쓰토무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조부모와 부모, 여동생 둘과 함께 살았다. 부모님은 맞벌이로 바빠 교류가 적었으며, 그를 이해하는 가족 구성원은 할아버지밖에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그는 손에 선천적인 장애를 갖고 있었다. 이 때문인지 대인관계가 좋지 않아 학창 시절엔 집단 괴롭힘을 당했다. 당시 동급생의 말에 따르면 "상당히 어둡고 눈 밖에 난 소년"이었다.

대학 졸업 후 한 인쇄 회사에 취직했지만 당시 동료들의 평도 "근무 자세와 평판이 상당히 안 좋았다"며 부정적이었다. 이후 1986년 그는 해고당하게 된다.

직장에서 잘린 그는 히키코모리 생활을 하게 된다. 이때 애니메이션에 빠져 동인지 발행에도 손을 뻗게 되고, 이를 위해 복수의 비디오 서클에 가입한다. 하지만 대인관계 문제가 반복됐다. 다른 서클 회원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탓에 비난을 받으면서 동인지 발행이 단발성으로 끝난 것이다.

괴로워하던 쓰토무는 이 시기 우연히 만난 어린 소녀에게 위로를 받게 됐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의 '여아 집착'이 시작된다. 이미 상당히 내면이 뒤틀려 있던 그는 자신에게 위로를 준 '어린 여자아이'의 존재를 범행 대상으로 주목한 것이다.

미야자키 쓰토무가 수감 생활 중 모 잡지사와 주고받은 서신을 묶어 출간한 책 '연속 유녀 살해 사건 전 피고의 고백'

◆ 광기에 수많은 삶이 무너지다

아동 납치 범죄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4명이나 되는 피해자 △시신 훼손 △식인 △언론에 보낸 도전장 △피해자 가족에게 보낸 시신 일부 등 쓰토무의 범죄는 광기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충격적인 내용으로 가득했다.

사건으로 인해 자신의 딸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게 된 부모들의 인생도 황폐해진 건 자명한 일이었다. 하지만 쓰토무는 재판 중에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이는 등 재판 자체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법정에서도 "깨지 않는 꿈 속에서 (범행을) 했던 것 같다"는 등의 발언을 하면서 반성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에 피해자 부모들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비난할 정도였다.

쓰토무의 범죄는 피해자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변인물들도 파괴했다. 재판이 진행되던 1994년 쓰토무의 아버지가 죄를 책임지겠다며 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하지만 쓰토무는 죄책감보다 "아버지가 그렇게 돼 속이 시원하다"고 발언했다.

쓰토무의 신상이 퍼지면서 그의 두 여동생은 직장에서 해고되거나 파혼당했으며, 분노한 사람들에 의해 편지와 전화로 폭언에 시달렸다. 본가뿐만 아니라 친가와 외가 친척들에게까지 여파가 미쳐 모두 풍비박산이 났다. 유복하던 그의 집안은 피해자 보상을 위해 대부분 처분됐다. 미야자키 쓰토무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던 오타쿠들과 독신 남성들이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기도 했다.

일본의 미스터리 소설에도 이 범행은 큰 영향을 미쳤다. 소설가 아비코 다케마루(我孫子武丸)의 '살육에 이르는 병'이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추리소설가 누쿠이 도쿠로(貫井徳郎)의 데뷔작 '통곡' 역시 이 사건을 기반으로 했다.

 

kebjun@newspim.com

[뉴스핌 베스트 기사]

사진
'반구천의 암각화' 세계유산 등재 [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선사시대의 생활문화를 엿볼 수 있는 바위그림인 '반구천의 암각화'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제47차 세계유산위원회는 12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회의에서 한국 정부가 신청한 '반구천의 암각화'를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2010년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된 후 15년 만의 결실이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총 17건(문화유산 15건·자연유산 2건)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반구천의 암각화' [사진=국가유산청] 2025.07.12 alice09@newspim.com '반구천의 암각화'는 국보로 지정된 울산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와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를 포함하는 유산이다.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에는 작살 맞은 고래, 새끼를 배거나 데리고 다니는 고래 등이 생동감 있게 표현돼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상화 생태계를 엿볼 수 있다. 국가유산청은 지난 2010년 '반구천의 암각화'가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된 후 지난해 1월 세계유산 등재 신청서를 유네스코에 제출했다. 이후 서류 및 현장실사 등 심사를 거쳤다. 세계유산위원회는 '반구천의 암각화'에 대해 "탁월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그려진 사실적인 그림과 독특한 구도는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의 예술성을 보여주고, 다양한 고래와 고래잡이의 주요 단계를 담은 희소한 주제를 선사인들의 창의성으로 풀어낸 걸작"이라고 평했다. 이어 "선사시대부터 약 6000년에 걸쳐 지속된 암각화의 전통을 증명하는 독보적인 증거이면서 한반도 동남부 연안 지역 사람들의 문화 발전을 집약해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사진=국가유산청] 2025.07.12 alice09@newspim.com 세계유산위원회는 등재 결정과 함께 사연댐 공사의 진척 사항을 보고할 것과 더불어 반구천 세계 암각화센터의 효과적 운영을 보장하고, 관리 체계에서 지역 공동체와 줌니들의 역할을 공식화하고, 유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모든 주요 개발 계획에 대해 알릴 것을 권고했다. 국가유산청 관계자는 "이번 '반구천의 암각화'의 세계유산 등재는 국가유산청과 외교부, 주유네스코대한민국대표부, 해당 지자체가 모두 힘을 합쳐 이뤄낸 값진 결과"라며 "이번 등재롤 계기로 '반구천의 암각화'가 가진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충실히 보존하는 한편, 지역주민과의 긴밀한 협력을 이어가는 적극행정으로 지역사회와의 상생을 위한 정책적 노력을 지속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최응천 국가유산청장은 "'반구천의 암각화'가 세상에 알려진 지 50여 년이 지났지만, 세계유산 등재까지는 쉽지 않은 긴 여정이었다"며 "앞으로도 국가유산청은 '반구천의 암각화'를 인류 공동의 유산으로서 가치를 지키고 잘 보존·활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전했다. alice09@newspim.com 2025-07-12 18:02
사진
신네르, 생애 첫 윔블던 단식 우승 [서울=뉴스핌] 박상욱 기자 = 세계 1위 얀니크 신네르(이탈리아)가 생애 첫 윔블던 남자 단식 정상에 올랐다. 신네르는 13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올잉글랜드클럽 센터코트에서 열린 2025 윔블던 테니스 대회 남자 단식 결승에서 카를로스 알카라스(스페인·2위)를 3시간 4분 만에 3-1(4-6 6-4 6-4 6-4)로 꺾었다. 올해 1월 호주오픈에 이은 시즌 두 번째 메이저 타이틀을 품에 안고 상금은 300만 파운드(약 55억8000만원)를 거머쥐었다. 이탈리아 선수가 윔블던 단식 정상을 밟은 것은 남녀를 통틀어 이번이 처음이다. 2021년 남자 단식 마테오 베레티니, 2024년 여자 단식 자스민 파올리니가 결승에 진출했지만 모두 준우승에 그쳤다. [런던 로이터 =뉴스핌] 박상욱 기자 = 신네르가 13일(현지시간) 열린 윔블던 남자 단식 결승에서 알카라스를 꺾고 우승한 뒤 기뻐하고 있다. 2025.7.13 psoq1337@newspim.com 이번 결승은 지난 프랑스오픈 결승에 이은 두 선수의 메이저 결승 리턴 매치. 당시 신네르는 알카라스에게 2-3(6-4 7-6<7-4> 4-6 6-7<3-7> 6-7<2-10>)으로 패해 우승을 놓쳤다. 당시 트리플 매치 포인트를 날린 신네르는 경기 후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경기'라며 절치부심했고 한 달 만에 완벽하게 되갚았다. 신네르는 알카라스에게 당하던 5연패 사슬을 끊었다. 둘의 상대 전적은 여전히 알카라스가 8승 5패로 앞선다. 신네르는 이날 알카라스 특유의 드롭샷과 로브, 변칙 플레이에 흔들리지 않았다. 특히 3세트 게임스코어 4-4에서 브레이크에 성공하며 분위기를 완전히 가져왔다. 4세트에서도 다시 한 번 브레이크로 균형을 깼다. 게임스코어 5-4, 자신의 마지막 서브 게임에서 신네르는 평균 200km/h에 가까운 강서브로 트리플 챔피언십 포인트를 만들었고 두 번째 기회를 놓치지 않으며 우승을 확정 지었다. [런던 로이터 =뉴스핌] 박상욱 기자 = 신네르가 13일(현지시간) 열린 윔블던 남자 단식 결승에서 알카라스를 꺾고 우승한 뒤 케이트 미들턴 영국 왕세자빈의 축하를 받고 있다. 2025.7.13 psoq1337@newspim.com 경기 후 신네르는 "파리에서 정말 힘든 패배를 겪었기 때문에 감정이 북받친다"며 "결국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을 배웠는지다. 우리는 패배를 받아들이고 계속 노력했고, 그 결과 이렇게 트로피를 들게 됐다"고 말했다. 하드 코트 메이저에서만 세 차례(2023 US오픈, 2024 호주오픈 포함) 우승했던 그는 이번 잔디 코트에서 처음 정상에 올라 메이저 전천후 강자임을 입증했다. 유일하게 우승이 없는 클레이코트 메이저 프랑스오픈까지 제패할 경우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한다. 지난해 도핑 양성 반응이 나왔던 신네르는 도핑 사실이 알려진 뒤로는 올해 호주오픈에 이어 두 번째 메이저 트로피를 따냈고 도핑으로 인한 3개월 출전 정지 징계를 마친 올해 5월 초 이후로는 이번이 첫 메이저 우승이다. 반면 알카라스는 윔블던 3연패 도전에 실패했다. 통산 6번째 메이저 결승전에서 처음으로 패배를 당했고 커리어 그랜드슬램 달성을 위해선 여전히 호주오픈 우승이 필요하다. [런던 로이터 =뉴스핌] 박상욱 기자 = 신네르(왼쪽)와 알카라스가 13일(현지시간) 열린 윔블던 남자 단식 결승을 마치고 축하와 위로의 인사를 나누고 있다. 2025.7.13 psoq1337@newspim.com 그는 "결승에서 지는 건 언제나 힘든 일이다"라면서도 "하지만 오늘은 야닉의 날이다. 훌륭한 테니스를 한 그에게 축하를 전하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신네르와 알카라스는 지난해 호주오픈부터 치러진 7번의 메이저 대회에서 타이틀을 전부 나눠 가졌다. 2023년엔 알카라스가 프랑스오픈과 윔블던을, 신네르가 호주오픈과 US오픈을 차지했고, 올해는 다시 신네르가 호주오픈과 윔블던을, 알카라스가 프랑스오픈을 가져갔다. 이제 두 선수는 메이저를 양분하는 확실한 '빅2'로 자리매김했다. psoq1337@newspim.com 2025-07-14 06:48
안다쇼핑
Top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