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스젠더 이야기 빠진 자리에 '빈 페이지'
독자들 "도서 취지에 어긋나는 행위" 비판
[모스크바 로이터=뉴스핌] 최윤정 인턴기자 =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아동 도서 '굿 나이트 슬립 포 레벨 걸스: 세상에 맞서는 100명의 여자 이야기'가 올해 러시아어로 번역돼 출판됐다. 하지만 성 소수자 관련 내용이 들어간 이야기가 빠져 99명의 인물만 등장하는 것으로 드러나 6일(현지시각) 도서 취지에 어긋난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LGBT 단체 회원이 촛불을 들고 러시아 영사관 앞으로 나와 시위를 벌이고 있다.[사진=로이터 뉴스핌] |
모스크바에 살며 페미니즘 블로그 운영하고 있는 리자 레이저슨(Liza Lazerson)은 베스트셀러 아동 도서 '굿 나이트 슬립 포 레벨 걸스' 러시아판을 구매하고 깜짝 놀랐다. 제목에는 100명의 여자 이야기라고 써있지만, 안을 들여다보니 99명의 이야기와 빈 페이지 한 장이 있었던 것이다. 빈 페이지는 독자가 직접 이야기를 추가하도록 구성돼 있었다.
레이저슨은 "그런데 블로그 독자가 같은 도서의 프랑스판에는 코이 메디스의 이야기가 있다며 직접 찍은 사진을 보내줬다"고 지적했다.
코이 메디스는 올해로 11살이 된 트랜스젠더 소녀로, 지난 2013년 초등학교 내 여학생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는 법적 권리가 있다는 판결을 받으며 화제가 됐다. 메디스는 남자로 태어났지만 18개월 때부터 자신을 여자라고 표현했고, 가족들은 메디스가 4살 때부터 그를 소녀라고 불렀다.
'굿 나이트 슬립 포 레벨 걸스' 러시아판을 인쇄한 출판사 봄보라(Bombora)는 이번 사건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 온라인 뉴스 기업 타키 델라(Takie Dela)는 출판사를 인용해 "2013년 러시아 정부가 제정한 '비전통적 성관계 선전금지법'(이른바 '게이 선전 금지법')을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해당 도서 원작 작가 중 한 명인 프란체스카 카바요는 "코이의 이야기가 빠졌다니 굉장히 슬프다"고 말했다.
러시아 출판업 규모는 560억루블(약 9480억8000만원)으로 상당히 큰 편이지만, 게이 선전 금지법이 업계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조사된 바가 없다.
베스트셀러 아동도서 '굿 나잇 슬립 포 레벨 걸스' 한국판 [출처=Timbuktu Labs] |
미국의 판타지 소설가 빅토리아 슈웹은 "러시아 출판사 로스만(Rosman)이 지난해 '마법의 그림자' 번역본을 출간할 때 성소수자와 관련된 내용을 편집했다"며 "허락도 없이 줄거리를 통째로 잘라냈다"고 폭로했지만, 로스만 측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 현행법 상 출판사는 성소수자 관련 내용이 들어간 도서를 청소년이나 어린이를 대상으로 내놓으려면 해당 내용을 완전히 삭제해야 한다. 내용을 그대로 두고 싶다면 도서 겉표지에 '18세 이상 이용가' 표시를 하고 비닐로 포장해 진열하는 방법밖에 없다.
작가들과 독자들은 "내가 읽을 책은 직접 열어보고 내용을 살핀 후에 구매할 수 있어야 한다. 성소수자를에 대한 내용을 빼는 것은 도서 취지에 어긋난다"며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러시아는 1993년까지 동성애를 기소 대상으로 취급했고, 1999년까지는 정신 질환으로 분류했다. 2013년부터는 '비전통적 성관계 선전 금지법'을 제정해 성소수자를 탄압하고 있으며, 이 법으로 인해 지난 2014년 많은 국가 정상들이 소치올림픽 개막식을 보이콧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지난해 유럽 인권재판소는 러시아의 게이 선전 금지법이 유럽조약에서 추구하는 평등의 원칙에 어긋난다며 폐지를 촉구했으나, 러시아 정부는 해당 판결이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성 소수자 문제에 엄격한 그리스정교회 유권자들을 얻기 위해 게이 선전 금지법을 제정한 것으로 보인다. 성소수자 인권단체 일가유럽(ILGA-Europe)에 따르면 성소수자에 대한 러시아의 평등 수준은 49개국 중 45위다.
yjchoi75300@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