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라오스 야구협회 부회장이자 KBO 육성위원회 부위원장인 이만수(60) 전 SK와이번스 감독은 헐크파운데이션을 세워 국내외에서 활발한 재능기부를 펼치고 있다. 라오스 국가대표 야구단을 창단한 이만수 부회장은 대표팀 ‘라오J브라더스’를 이끌고 지난달 경기도 화성에서 20일간 전지훈련과 스포츠 교류 활동을 했다.
이만수 전 감독은 "재능기부와 봉사활동으로 누구보다 행복하다"고 밝혔다. <사진= 이윤청 기자> |
“미리 알았다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이 말은 라오스에 계시는 제인내대표 카톡 대문에 써 놓은 글이다. 평생 공부와 사업에만 종사하신 분이 생소한 야구를 라오스에 보급하기로 결심한 분이다. 내가 제인내대표를 알게 된 시기는 2013년 시즌이 다 끝난 11월달이었다. 2013년도는 SK와이번스 감독한지 2년째 되던 해였다. 50년 야구하면서 늘 정상에만 있던 나로써는 6위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성적이었다. 그것도 선수시절이 아닌 감독생활 하면서 최악의 성적을 거두었을 때의 심정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고 괴로운 시간들이었다. 그런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전혀 알지도 못한 제인내대표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다. 제인내대표가 자기 소개하면서 라오스에서 무엇을 하며 어떤 일을 하는지 상세하게 자기 소개하는 것이다.
2013년 가을인 11월에 제인내대표와 처음 연락이 되었다. 그렇게 처음 시작 된 인연이 어느덧 햇수로 6년이 되었다. 2014년 10월말에 SK 팀에서의 감독생활 3년을 다 끝내고 퇴임하게 되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이 지난 2014년 11월 12일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난생 처음 라오스라는 나라로 날아갔다. 이때만 해도 라오스 라는 나라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또한 친척이나 친구도 없는 정말 낯선 나라였다. 그런 낯선 나라에 그것도 혼자 날아 간다는 것은 맨땅에 헤딩하기였다.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삼성라이온즈 팀에서 16년 간 프로야구 선수생활하고 은퇴식도 없이 낯선 미국 땅으로 도망가듯이 혼자 갔던 기억이 난다. 그때와 어쩌면 똑 같은 상황인지…. 삼성라이온즈에서 선수생활 끝내고 미국에 갔을 때만 해도 41살이었다. 그때만 해도 젊은 나이였기에 무모할 수도 있었지만 젊었다는 이유 하나로 인해 낯선 미국으로 갈 수 있었다. 화려한 프로야구에서 지도자생활 했다가 동남아에서도 최빈국인 라오스에 야구 보급을 위해 날아간다는 것도 역시 무모한 행동이었다.
이때만 해도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갈 수 있었다. 제인내대표의 말처럼 “미리 알았다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솔직히 몰랐기 때문에 가능했다.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시도도 안 했을 것이다. 척박한 라오스 땅에서 야구를 보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보였다.
날씨는 40도가 넘고 선수들은 야구에 대해 전혀 아는 것도 없고 야구 볼을 굴려 주면 작은 축구 볼인 줄 알고 발로 차다가 발가락이 부러질 뻔 했고 운동하러 나오라고 하면 시간도 지키지 않고 자기들이 나오는 시간이 운동하는 시간이고 이런 선수들을 데리고 과연 야구를 라오스에 정착 시킬 수 있을까? 라오스에 야구는 불가능한 스포츠였다. 아니 이렇게 더운 날씨에 누가 야구하기 위해 땡볕에 운동장에 나오겠는가? 하루 연습 했다가 힘들면 다음 날에는 선수들이 나오지 않는다. 정부 사람들은 낯선 이방인이 야구를 가르친다는 소문으로 인해 날마다 감시카메라로 찍어서 정부에 보고했던 시절들이 생각난다.
잠시 야구만 가르치고 두 번 다시 올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나머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과 같이 하루 하루 야구하면서 닫혔던 나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는 것을 느꼈다. 불가능해 보이고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고 같이 하는 사람이 없어도 나는 해맑은 아이들의 마음과 눈을 보게 되었다. 때묻지 않은 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보며 때묻었던 나의 마음이 오히려 이들로 인해 조금씩 씻겨 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가능하다는 의지를 갖고 한번 이들과 부딪혀 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메마른 땅에 물을 부으면 금새 물이 증발해서 마르는 것처럼 의미 없어 보였다. 그러나 한해 동안 수시로 라오스로 왕래하며 젊은 선수들과 같이 생소한 야구를 같이 하는 동안 메마른 땅 같아 보이던 라오스 야구에 작은 씨앗이 솟아 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낯선 라오스 땅에 날아가 야구를 보급하니 가장 잘 도와줄 것 같던 교민들이 오히려 모함과 누명을 씌워 힘든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 거기다가 라오스 정부는 생소한 야구를 가르치는 우리들을 경계 대상으로 지정, 날마다 사람들을 보내 감시를 했다. 라오스에 야구를 보급하기 위해서는 이들 정부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문을 두드렸지만 이들은 만나주지도 않았다. 라오스 고위 공무원을 만나는 일이 이렇게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난생 처음 알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랬던 그들이 이제 너무 협조적이며 무상으로 야구장 부지를 제공했다. 부끄럽지만 라오스대통령으로부터 상도 받았다.
이렇게 앞만 보며 열심히 달려온 것이 어느덧 4년이 되었다. 솔직히 지난 2~3년 동안은 앞만 보고 달려 왔기에 힘들고 어렵다는 생각을 많이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제 라오스에 야구 보급한지 4년이 되어 야구협회도 발족이 되었고 8월에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리는 아시아게임(AG)대회에도 참가하게 되었다.
라오스 제인내대표와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다가 제인내대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미리 알았다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나 또한 제인내대표와 같은 마음이었다. 몰랐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 이렇게 힘들고 어려웠다면 절대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 그러면서 제인내대표와 서로 위로 아닌 위로를 했던 기억이 난다.
라오J브라더스 선수들이 한국에서 3주간의 미니캠프를 끝내고 라오스에 잘 들어갔다. 모두 라오스 보내고 나서 혼자 조용한 시간에 지나온 과정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나에게 또다시 이런 과정들이 온다면 지금처럼 온 정성을 다해 똑 같이 야구를 보급할 수 있을까? 이전까지만 해도 “나는 절대 못 할 것 같다 “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지금 또 다시 이런 일을 하라고 한다면 나는 “힘들어도 이 길을 갈 것이다“ 라는 고백을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이것이 “내게 맡겨진 일“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 하고 싶어 하는 일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누구나 다 하고 싶은 일은 아닌데 내가 꼭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면 힘들어도 하는 것이 나중에 후회가 없을 것이다. 혼자였다면 절대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다. 고마운 사람들의 수고와 사랑에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