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흔히 보이는 것들로 뫼비우스적, 그 이상의 상상 여행을 하려 한다. 주변의 사물들엔 저마다 독특한 내력이 숨어 있고 어떻게 빚느냐에 따라 보석이 되기도 하고 나침판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출발한 여행의 과정에 어떤 빛깔의 풍경이 나타날지, 그 끝이 어디까지 다다를지 필자 자신도 설레인다. 인문학의 시대라고 하는데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 메타적 성찰 역시 필요한 시점이다. 사물과 풍경, 시대와 인문을 두루 관통하면서 색다르면서도 유익한 여행을 떠나려 한다.
중동하면 내게 또 떠오르는 것이 수피춤이다. 이스탄불의 어느 홀에서 관람한 적이 있는데 너무도 인상적이었다. 몇 명의 남성 무용수들이 한 방향으로 계속 돌고 돈다. 일이십 분도 더 되는듯하다. 나 같으면 어지러워 쓰러질텐데도 얼굴엔 신비로운 미소마저 띠며 계속 돌고 돌았다. 춤을 넘어서는 느낌이었다. 나는 서서히 황홀경에 잠겨갔다. 삼사십분 정도는 회전이 계속되었다.
이슬람의 신비주의 수피즘에서 유래된 춤이라고 한다. 입고 있는 검은 옷은 죽음을 나타내고 흰 옷은 수의를, 머리에 쓴 하얀 색의 길쭉한 모자는 묘지에 세워두는 비석을 상징한다고 이전의 다른 수필에서 나는 묘사한 적이 있었다. 춤 뿐 아니라 예술 전반이 고대의 종교와 연관되지만 수피춤은 종교성을 극단으로 단순화시킴으로서 고밀도를 빚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단순의 극치이며 그것의 반복이어서 합일이란 느낌에 점점 젖게 하는 기이함을 가진 춤이다.
수피춤과 더불어 또하나 유명한 중동의 춤이 밸리 댄스이다. 허리와 엉덩이를 요염하게 돌리는 관능적인 춤인데 그 기원을 알고 나자 나는 다소 멍해졌다. 고대 메소포타미아까지 깊어진다. 몸을 흔드는 것은 향기의 발산, 무릎을 꿇고 몸을 뒤로 젖히는 것은 받아들임, 격렬한 몸짓은 출산과 고통을 의미한다고 한다. 코란을 기점으로 정리하자면 중동엔 그 이전의 시기에 깊은 유래를 갖는 밸리 댄스가 있으며 그 이후엔 수피춤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중동엔 이 두 개의 춤보다 다채로운 춤들이 존재할 것이다. 내가 그쪽 문화에 깊지 못해서 피상적인 지식만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양성으로 따지자면 중동보다는 유럽이 단연 강할 것이다. 춤만 하더라도 트로트, 록, 블루스, 탱고, 살사, 힙합 등등 이름을 나열하기도 버거울 지경이다. 그것들은 유럽에서 탄생되기도 했고 남미나 다른 대지에서 생겨나 흘러오기도 했다. 물론 춤을 포함한 문화 전반의 유입 현상은 중동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종교 등의 이유로 그 정도가 유럽을 따라가진 못할 것이다. 유럽은 문명의 탄생에서부터 외래의 것들의 유입에 상당히 기반되었다. 기독교만 하더라도 히브리 내지 로마로부터 유입된 것이다. 이슬람이 중동 안에서 생겨나 신앙화된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그리스, 로마, 중앙아시아. 중국, 인도, 남미 등등 온갖 곳들에서 가지각색의 문물들이 유입되고 도둑질 성격도 띠면서 유럽 문명이 생성되어갔다. 그런 특성은 유럽의 사생아라고도 할 수 있는 미국의 특성으로도 이어진다. 재즈 역시 유럽의 클래식의 바탕 위에서 아프리카적인 생동감이 결합된 면이 강하다. 재즈를 기반으로 한 각종의 춤들 역시 유럽과 미국 문명의 특성을 보여준다.
내가 태어나 자란 대한민국은 유럽과 미국 문화에 영향 받은 바가 크다. 음악과 춤에 대한 나의 상식도 그에 기인된 것이다. 그래서일텐데 이스탄불에서 수피춤을 사전 지식 없이 처음 관람했을 때의 신선미와 경이로움은 상당했다. 이질적이었다. 그러면서도 시간이 흐를수록 마치 내게 맞는 옷처럼 아늑하고 편하게 느껴지는 것 또한 신기했다. 저런 춤도 가능하며 진짜 춤 이상이라고 여겨졌다.
나는 음악도 얇지만 춤에 대해서도 미천한 사람이다. 살아오면서 잠깐 잠깐씩의 축적 정도가 내 앎의 전부일 것이다. 그러한 피상적인 안목으로 본다면 수피춤은 승무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형식이 극단으로 단순하고 단순함이 주는 독특한 완벽미가 있어 보였다. 수피춤은 마치 종교춤의 원형인 느낌이 든다. 결정체라는 느낌 역시 든다. 저것보다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춤을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을까.
중동은 서양의 기준에 의한 것이다. 아시아를 기준으로 한다면 우리나라가 동아시아인 반면 중동은 서아시아이다. 즉 중동과 한국은 아시아 대륙의 서쪽과 동쪽에 각기 자리잡고 있으며 아시아의 일원들인 것이다. 수피춤이 이질적임에도 불구하도 왠지 모를 편안함과 친근미가 느껴진 것엔 이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에 속한 우리나라도 상고 시대에 제천행사 등 종교적인 것과 깊은 관계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의 춤도 그런 기원에서 비롯된다. 강강수월래는 임진왜란 때 생겨났다는 말도 있고 그 이전의 상고 시대의 추수감사나 제천행사에서 유래를 찾기까지 한다.
강강수월래 역시 원이다. 남녀노소가 손에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빙빙 돈다. 강강수월래와 수피춤은 물론 다르다.
강강수월래가 집단적이라면 수피춤은 개인적인 면이 강하다. 전자가 누구나 출 수 있는 평범한 춤이라면 후자는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춤이다. 무용수 한 명 한 명의 숙련도와 내공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복장 역시 전자가 평소에 입는 것이라면 후자는 설명했다시피 깊은 상징 체계를 지닌다. 유래는 전자가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지만 후자는 마호메트 이후의 수피즘에 있다.
이렇듯 따지고 보면 수많은 차이점들이 존재하지만 원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종교성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 그 원이 한국에선 저렇게 처리되고 중동에선 저렇게 처리되는구나 하는 유사성이 내겐 느껴진다. 시공이 다름에도 신성과 우주에 대한 마음, 자연의 원리, 오묘함 등에 깊은 관조를 보이면 수피춤이나 강강수월래 뿐만 아니라 저런 유형의 행위들이 빚어질 것 같다.
지금은 세계 전체가 비빔밥처럼 어우러져 동과 서, 유럽과 미주 문명이니 중동 문명, 동아시아 문명, 기타 문명이니 하는 분리적 시각이 그리 효율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현대를 깊게 알고 그 속의 우리의 삶을 통찰하고자 한다면 그 각종의 문명들과 그 층위들, 상호작용을 분석적으로 바라볼 필요도 있다.
유럽 너머에 중동이 있다는 것이 우리의 인식론적 시각일 것 같다. 그러나 지도에서 보면 중동 너머에 유럽이 있다. 지리적으로도 우리에겐 중동이 가깝고 아시아적 문화 양식으로도 그러하다. 다만 유럽과 미국이 현실적 힘의 우위로서 영향을 지나치게 끼쳤기에 그 그늘 하에 있는 것뿐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세계가 상징적으로 녹아 있는 밸리 댄스, 음악 같은 경전인 코란, 그 성스러운 종교성에 의해 빚어진 완벽한 예술미의 수피춤, 그 세 개의 이미지로도 중동은 너무도 아름다고 풍성하게 내게 다가온다. 내 안에 있는 강강수월래적인 심성과 감성과도 자연스럽게 교감된다. 현실적인 힘의 잣대에 의해 인간의 시각은 얼마든지 일그러질 수 있다. 그러한 주입식 처마도 때론 거두어내고 저 너머의 눈부심을 그 자체로 볼 수 있는 시각을 갖추면 삶과 현실은 보다 풍요롭게 향유될 것이다.
이명훈(소설 ‘작약도’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