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보다 사랑, 사랑보다 예술(10)
케냐의 나이로비 도심을 벗어나 외곽으로 20㎞ 정도 달리면 카렌 지역이 나타난다. 이곳에는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실제 여주인공이자 작가인 카렌 블릭센이 살던 집을 기념관으로 개조한 ‘카렌 블릭센 기념관’이 있다. 케냐 박물관협회(National Museums of Kenya)의 관리 하에 있는 카렌 블릭센 기념관은 1920년대 초창기의 커피농장과 백인 정착민들의 삶의 흔적을 보여준다, 널따란 뜰에는 당시 사용했던 트랙터와 철제 농기구가 있다. 입구에서 호젓한 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커피농장에서 사용했던 각종 커피 원두 가공 기계류와 농기구들이 노천에 방치되어 있다.
덴마크의 룽스테드룬에도 카렌 블릭센 박물관이 있다. 이 작은 마을은 그녀가 태어나고 죽은 곳이다. 그리고 박물관에는 뛰어난 이야기꾼이자 소설가였던 카렌 블릭센의 생애와 그녀가 살았던 시절을 알려 주는 기념물들이 비치되어 있다.
황혼에 물든 아프리카의 야생 초원-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한 장면 <사진=이철환> |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는 아프리카의 아름다운 자연과 풍광을 한껏 감상할 수 있는 영화이다. 화면 가득 펼쳐지는 아프리카의 광활한 초원과 목초지 풍경, 그리고 무리를 지어 뛰노는 야생동물의 모습을 잊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 영화에 삽입된 음악,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은 영화의 풍미와 감동을 한껏 더해 준다.
이 음악은 모차르트가 죽기 두 달 전에 작곡한 그의 유일한 클라리넷 협주곡이자 마지막 협주곡이기도 하다. 모차르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메시지, 그의 음악적 유언이다. 그래서인지 곡에는 이별의 노래와 같은 아련함이 배어있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여주인공인 카렌 블릭센(미국 여배우 메릴 스트립 분)은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을 따라 고국인 덴마크를 떠나 아프리카의 케냐에 정착해 커피농장을 경영하게 된다. 그런데 남편은 방랑벽이 있어 자신에게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성병인 매독까지 전염시켜 놓는다. 그래서 그녀는 모험가 데니스 해튼(미국 배우 로버트 레드포드 분)에게서 위안을 구한다.
데니스는 여러모로 남편과는 대조적인 남자이다. 그는 아프리카의 자연과 사람을 사랑한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즐겨 들으며 경비행기를 타고 광활한 아프리카의 초원을 나르며 인생과 사랑에 대해 얘기할 줄 아는 멋진 남자다. 이런 데니스에게 카렌은 깊이 빠져든다. 남편과 이혼한 후, 카렌은 데니스와의 결혼을 원한다. 그러나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데니스는 그런 카렌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한편, 두 사람의 아프리카 원주민에 대한 인식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카렌에게 있어서의 아프리카 원주민들이란 당시 여느 백인들이 가지고 있던 관념과 유사했다, 즉 문화적으로 미개한 흑인들은 선교사적인 열정을 가지고 가르쳐야 할 ‘교화 대상’이었던 것이다. 다만, 카렌은 그들에게 연민의 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호의적으로 대해줄 따름이었다.
반면, 데니스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문명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글로 쓰지 않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이런 생각을 카렌에게 주입시키려 노력했다. 아프리카의 문화를 그 자체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이후 원주민들과 오랜 동안 함께 생활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카렌의 생각도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한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얼마 후 카렌에게는 더 이상 아프리카 땅에 남아있을 이유가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사랑하는 연인 데니스가 농장으로 돌아오는 도중 비행기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이상기후로 인해 커피 값이 폭락하면서 소유하고 있던 커피농장을 팔아야만 했다. 이에 카렌은 17년간의 아프리카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덴마크로 귀향하게 된다.
농장을 떠나던 날, 카렌은 하인들에게 자기를 ‘마님’이 아닌 ‘카렌’으로 불러 달라는 마지막 부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원주민에게 나누어주고서 자신은 조그만 가방 하나만 가진 채 아프리카를 떠난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간 그녀는 17년 동안의 아프리카 생활을 회상하며 글을 정리하였다. 그것이 바로 소설 《아웃 오브 아프리카》이다. 비록 결혼과 농장 경영에서는 실패하지만 평생 소중하게 간직할 수 있는 데니스에 대한 추억과 아프리카에 대한 애정, 그리고 역경을 이겨내는 여성의 모습 등을 그린 이 작품은 바로 그녀의 인생이자 문학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슬픔은 당신이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혹은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견딜 수가 있다.(All sorrows can be borne if you can put them into a story or tell a story about them.)”
카렌 블릭센(Karen Blixen, 1885~1963)은 1885년 덴마크의 룽스테드룬(Rungstedlund)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빌헬름 디네센은 군인이자 정치가였으며 문필가이기도 했다. 어머니 잉게보르 베스텐홀츠는 부유한 상인 가문 출신이었다. 그녀가 10살이 되던 1895년 아버지가 자살을 하면서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자신의 친정에서 살게 되었다.
전형적인 청교도적 부르주아 가문인 외가에서의 생활은 어린 카렌에게 경건함과 절제력을 키우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후 그녀 작품의 주된 테마가 되는 신과 인간, 운명과 자유의지, 귀족과 부르주아 등의 대립구도는 어린 시절 가졌던 심적 갈등의 흔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 전 이미 그녀는 덴마크의 몇몇 잡지를 통해 단편을 발표했지만, 젊은 시절의 목표는 화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덴마크 왕립 미술원을 비롯 파리와 로마에서 잠시 동안 미술공부를 하기도 했다. 1914년 그녀는 스웨덴 출신의 육촌 브로 폰 피네케와 동아프리카 케냐로 가서 결혼식을 올리고 커피농장을 시작한다. 그러나 케냐에서의 생활은 순탄치가 못했다. 남편과의 이혼, 경제 대공황과 고르지 못한 작황으로 인한 커피농장의 파산, 연인 데니스와의 사별 등을 겪은 뒤 1931년 고향인 덴마크로 돌아온다.
이후 3년간 칩거하며 집필한 첫 작품 《7개의 고딕 이야기(Seven Gothic Tales)》를 1934년 미국 랜덤 하우스 출판사에서 ‘이자크 디네센(Isak Dinesen)’이라는 필명으로 출간하였다. 이 작품이 좋은 반응을 보이면서 그녀는 순식간에 주목받는 작가로 떠올랐다. 이후 1937년 케냐에서의 삶을 바탕으로 쓴 소설 《아웃 오브 아프리카》가 또다시 커다란 성공을 거두게 되자, 그녀는 문학계에서 확고한 입지를 구축하게 된다. 당시 그녀의 나이 49세였다.
이후 그녀는 본명인 ‘카렌 블릭센’ 대신 ‘이자크 디네센’이라는 필명으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펼치게 된다. 당시 여성의 사회활동이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의 이름으로 책을 내면 행여나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래서 남자 이름인 ‘이자크(Isak)’와 귀족적인 어감을 지닌 처녀 때의 성 ‘디네센(Dinesen)’을 붙여 자신의 필명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한편, 또 다른 그녀의 대표작 《바베트의 만찬》은 1987년 영화로 만들어져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BAFTA 필름 어워드 외국어영화상, 런던 비평가협회 외국어영화상 등을 수상하였다.
이 작품은 음식이 얼어붙은 사람의 마음을 녹이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마법 같은 이야기를 내용으로 담고 있다. 주인공 바베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의 이웃들이 서로 반목과 갈등에 휩싸여 있다는 사실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어떻게 이들을 화해시킬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복권당첨으로 큰 돈이 생기게 되는데, 이를 몽땅 마을 사람들을 위해 쓰기로 마음먹는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을 만찬에 초대하는 계획을 세운다. 그들에게 평생 잊지 못할 멋진 식사를 대접함으로써 강퍅해진 그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려 보려는 생각에서였다.
마침내 만찬행사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마을 사람들이 음식을 먹는 동안 그들 사이에는 따뜻한 사랑의 온기가 퍼져나갔다. 정성이 담긴 맛있고 풍족한 식사는 굳게 얼어 있던 그들의 마음을 녹아내리게 하고 오랫동안 잊고 있던 사랑과 배려의 감정을 되살려 준다. 서로를 축복하는 말도 건네게 된다.“마치 수많은 작은 후광이 하나로 합쳐져 거룩한 광채를 내기라도 한 듯 천상의 빛이 만찬장소를 가득 메웠다. 말수가 적은 노인들은 말문이 트였고, 수년간 거의 듣지 못했던 귀가 열렸다. 시간은 영원 속으로 녹아들었다.”
1963년 수술 후유증으로 인한 영양실조로 77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까지 그녀는 《일곱 개의 고딕 이야기》, 《겨울 이야기》, 《마지막 이야기》, 《바베트의 만찬》, 《카니발》, 《아웃 오브 아프리카》, 《결혼에 대하여》 등 수많은 작품과 산문집을 남겼다. 또한 정규 작품 활동 외에도 덴마크 내에서 라디오 강연, 평론, 에세이 집필 등의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천부적인 이야기꾼인 그녀의 작품들에 대한 문학성이 인정되어 1954년과 1957년, 두 차례에 걸쳐 노벨상 후보에 올랐다. 비록 상은 헤밍웨이와 카뮈에게 돌아갔지만, 헤밍웨이는 그녀가 상을 탔어야 했다는 수상소감을 남김으로써 디네센의 작품세계에 경의를 표하였다.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