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장주연 기자] 2000년 8월10일 새벽 2시경 전북 익산 약촌 오거리에서 택시기사가 12차례나 칼에 찔려 살해당했다. 경찰은 수색 과정 중 다방 배달을 하던 소년 최군의 진술을 확보했다. 하지만 3일 후, 최군은 느닷없이 용의자로 체포됐다. 경찰은 ‘최군이 택시기사와 말싸움 끝에 그를 살해하고 증거를 인멸, 목격자인 것처럼 다시 돌아와 경찰에 진술했다’고 밝혔다.
지난 2013년과 2015년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방영되면서 세상을 들썩였던 ‘약촌 오거리 살인 사건’이 스크린에 펼쳐졌다. 15일 개봉한 영화 ‘재심’을 통해서다. ‘약촌 오거리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재구성한 ‘재심’은 벼랑 끝에 몰린 변호사 준영과 누명을 쓰고 10년을 감옥에서 보낸 현우가 진실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휴먼드라마다.
그간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종횡무진 누비며 20대 연기파 배우로 자리 잡은 강하늘(27)이 현우를 연기했다. 목격자에서 살인범이 돼 10년을 감옥살이한 청년, 최군을 토대로 만들어진 캐릭터다.
“엄청난 메시지를 주고자 한 건 없었어요. 억울한 사람의 말을 들어달라는 것도 아니죠. 그저 시나리오가 재밌어서 선택했어요. 더 큰 걸 담고 싶은 마음은 없었고, 지금도 없죠. 찍을 때도 사명감, 혹은 이 작품으로 특정 분들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조금이나마 많은 분이 이 사건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바람만 있었어요. 그리고 그땐 재심 판결 전이라 그러면 어느 정도 이 사건이 힘을 받게 되지 않을까 싶었죠.”
영화에 합류하게 된 강하늘이 가장 먼저 한 작업은 현우와 최군의 분리였다. ‘재심’ 출연 계기가 누군가를 대변하기 위해서가 아니듯 연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실존 인물의 억울함보다는 영화 속 현우 캐릭터 자체에 더 집중했다. 현우에게 일어난 모든 일에 타당성을 더하기 위해 영화적 설정을 강조하는 작업도 거쳤다. “실화를 모티브로 한 거지 실화를 그린 건 아니다”는 게 그의 입장이다.
“현우라는 캐릭터를 채워나가면서 한 가지 지양한 건 현우가 숨 막혀 보이는 것, 억울해 보이는 거였죠. 그런 모습은 그간 많은 작품에서 다뤄져 왔기도 했고요. 그래서 일부러 현실감을 조금 더 주려고 했어요. 예를 들면 저 사람에게 누명을 씌운 이유에 힘을 싣기 위해서 껄렁껄렁한 비주얼을 강조했죠. 긴 머리에 브리지도 넣고 귀걸이도 하고 의상 선택에서도 고민을 많이 했어요.”
물론 캐릭터와 실존 인물이 분리될 수 없는 순간도 왔다. 촬영장을 찾은 최군을 마주했을 때다. 당시 강하늘이 느낀 첫 감정은 당황, 처음 든 생각은 ‘하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강하늘이 찍고 있던 장면은 최군이 진짜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이었다(이는 영화에서 현우의 상상 신으로 나온다).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무슨 촬영인지 모르고 오셨죠. 근데 도저히 그 꼴로 인사를 못 드리겠더라고요. 자칫 잘못하면 실례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피범벅이 된 얼굴을 다 닦고 다시 갔죠. 이야기도 작품, 사건에 관한 게 아니라 일상적인 대화만 하려고 노력했어요. 실제로 뵈니까 내가 뭐라고 그분의 10년, 그 마음을 이해할까 싶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가벼운 대화 나누면서 아이들과 사진 찍고 그랬죠. 번호 교환하고 전주에서 술 한잔하기로 하고요. 그냥 제가 시건방졌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캐릭터가 캐릭터인 만큼 스트레스도 오래갔을 거라 여겼다. 더욱이 전작인 ‘동주’(2016) 촬영 당시 그는 부담감에 수면 유도제를 먹고 잤을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고 했다. “내가 사명감이나 특정 메시지를 가지고 작품을 대했다면 그랬을 거다. 그리고 실수도 많이 생겼을 것”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정신적으로 힘든 부분은 없었어요. 오히려 개인적으로 보면 나 김하늘이란 사람이 성장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어요. 촬영 내내 집중의 끈을 놓지 않되 즐길 수 있었거든요. 제 감정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컷하면 다 같이 즐길 수 있는 인간적인 성장이 가능했던 거죠. 아마 제가 더 어리고 어수룩했다면 제 감정 하나밖에 못 봤을 거예요. 물론 그것 역시 좋은 집중이겠지만, 어찌 됐건 제가 바라는 모습은 이게 더 가깝고 그걸 조금이나마 따라갈 수 있어 좋았죠.”
인간 김하늘의 성장만은 아니다. ‘재심’을 통해 많은 이가 배우 강하늘의 성장을 직접 확인했다. 실제 영화가 베일을 벗은 후 강하늘은 관객과 평단의 극찬을 독차지했다. ‘동주’를 뛰어넘는 또 한 번의 열연. 그의 연기는 제대로 물이 올라 있었다.
“전 좋은 평가만큼 반대의 평가도 있다고 봐요. 만일 좋은 말만 듣고 기분이 좋아 버리면, 그분들 말에는 금방 기분이 나빠지겠죠. 그래서 차라리 모두 흘려보내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결국 모두 지나갈 거로 생각하죠. 최근엔 책에서 그런 구절을 봤어요. 과거는 거짓말이고 미래는 환상이라고. 과거도 미래도 내가 힘을 끼칠 수 있는 건 없다는 의미죠.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건 지금밖에 없는 건데 그 이야기가 와 닿아서 그렇게, 지금만을 살아가려 노력 중이에요.”
칭찬에도 들뜨거나 기고만장하지 않기 때문일까. 그는 꾸준히 노력하며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업계에서는 그런 강하늘을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분위기다. 이미 차기작도 정해졌다. 박서준과 함께하는 ‘청년경찰’이다. 믿을 건 전공 서적과 젊음뿐인 두 경찰대생이 눈앞에서 목격한 납치사건에 휘말리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청춘 수사 액션물. 지난해 11월 촬영을 시작, 곧 크랭크업을 앞두고 있다.
“촬영은 이번 주쯤 끝날 듯해요. 이번에도 쉽진 않았어요. 연기 자체가 할수록 어려워요. 어려운 부분만 눈에 밟히고요. 배우라 역설적일 수도 있는데 사실 전 사람들 이목이 쏠리는 걸 안 좋아하죠. 제가 진짜 하려고 하는 건 오로지 좋은 연기라고 생각하고 살아요. 그래서 제가 해야 할 일 역시 좋은 작품을 만나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는 것, 그리고 거기에 대한 고민이죠. 작품의 흥행이나 남들에게 보이는 이미지가 먼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뉴스핌 Newspim] 장주연 기자 (jjy333jjy@newspim.com) <사진=오퍼스픽쳐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