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김기락 기자] 올해 11살인 큰딸은 요즘 귀가 시간이 늦다. 나름 고학년에 속하는 4학년 새학기를 앞두고 학원 수업 시간이 길어진 탓이다. 집에는 저녁 7시 반쯤 도착한다.
평소보다 1시간 남짓 공부를 더하게 된 큰딸이 어느날 유난히 피곤해 했다. 집에 오자마자, 옷 입은 채로 침대로 갔다. 좋아하는 밥도 안 먹고 말이다.
아이한테 물었다. 아니 나 혼자 느끼듯 ‘요즘 공부하기 힘들구나! 많이 힘들면 학원 안 다녀도 돼’라고 말하자, “학원 안 다니면 성적이 떨어질 수 있잖아!”라고 받아쳤다.
순간, 머릿속엔 두 가지가 스쳤다. 정말 학원을 보내지 않아도 아빠인 내가 괜찮을까?, 또 학원 공부를 안 시키는 게 큰딸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일까?
우리는 죽도록 노력해야 평범하게 살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평범하게 살면 결코 평범하게 조차 살지 못하는 ‘억울한’ 상황이 기약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렸을 때 뛰어놀고, 학교 다니고 성인이 돼 취업하거나 창업하며 자기 꿈을 이뤄나가는 이 지극히 평범한 과정이 점점 불가능해지고 있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 회원국 중 멕시코 다음인 두 번째로 노동시간이 길다. OECD에 따르면 2015년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정부 보고 기준)은 2113시간으로, OECD 평균(1766시간)보다 347시간, 가장 노동시간이 짧은 독일(1371시간) 대비 742시간(30.9일) 더 길다.
죽도록 일해야만 죽도록 일하는 사람들끼리 겨우 어울릴 수 있는 ‘조건 환경’에 놓인 것. 그나마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감사히 생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취업조차 해보지 못한 젊은 청춘들을 쉽게 볼 수 있어서다.
통계청 조사 결과, 지난해 취업 무경험 남성 실업자는 9만5000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1만4000명 늘었다. 이는 13년 만에 가장 큰 증가폭으로, 제조업 등 취업 시장이 극도로 얼어붙었다는 방증이다. 실업자는 무려 100만명을 넘어섰다.
이런 와중에 지금 한국 사회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극에 달하는 분노로 휩싸여 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죽도록’ 사는 사람과 ‘죽도록 살고 싶어서’ 일자리를 기웃거리는 청춘들의 고개를 더 숙이도록 만든 것이다.
국정농단의 혐의자가 서울 대치동 특검에 소환될 때면 시민을 빙자한 정치 세력들로 장사진을 이루지만, 정치색을 띠지 않는 시민들도 삼삼오오 모인다. 어떤 시민은 ‘열심히 살기만 했는데 세상이 왜 이렇게 됐냐?’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평생의 꿈이 한 마디 말에 의해 비정상적으로 이뤄지고, 또 가고 싶은 대학교를 공정하지 못한 방법을 통해 들어가는 등 이번 국정농단이 주는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처럼 썩어빠진 한국 사회를 어쩌면 내 큰딸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시나브로 배웠을지도 모른다. 죽도록 살아야만 평범하게라도 살 수 있다는 것을... 지금의 한국 사회를 적어도 자식한테는 물려주고 싶지 않은 게 모든 부모의 마음일 게다.
오늘도 딸의 피곤한 얼굴을 보게 될까봐 퇴근길이 무거울 것 같다.
[뉴스핌 Newspim] 김기락 기자 (peoplekim@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