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적 혼인관계 그러나 서로 터치 않고 독립
미혼남녀 설문, 5명 중 2명 "졸혼 긍정적"
[뉴스핌=김범준 기자] 결혼생활 38년째인 조은옥(여·60·서울 서대문구)씨는 올해 환갑을 맞아 큰 결심을 내렸다.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갖고자 '졸혼(卒婚)'을 선택한 것.
조씨는 "대학도 못가고 어린 나이에 시집 와서 40년 가까이 오롯 가정과 자식을 위해 집안일만 했다"며 "자식 농사 다 지었으니, 남은 인생은 누구에게 구애받지 않고 하고 싶은 거 실컷 하고 싶다"고 말했다.
손재주가 좋은 조씨는 요즘 프랑스 자수와 가죽공예를 배울 수 있는 공방에 날마다 나가고 있다. 아예 올해 안에 집에서 나와 작업실을 겸한 거처를 마련할 계획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혼은 아니라고 한다.
"쿨하죠" 웃어보인 조씨는 "서로 터치 안하는 각자 생활을 하자는 것일 뿐, 여전히 남편을 사랑하고 우리 가족이 제일 소중하다"고 했다. 일요일에는 하던대로 남편과 성당에 가고 같이 식사도 할 것이라고 전했다. 그리고 결혼기념일, 명절, 기타 가족행사도 함께할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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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혼이란 '결혼에서 졸업한다' 뜻으로, 법적 혼인 관계는 유지하지만 부부가 각자의 삶에 간섭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황혼이혼과 다르다.
졸혼(卒婚·소츠콘)이라는 개념은 일본의 스기야마 유미코 작가가 지난 2004년 출간한 '졸혼을 권함(卒婚のススメ)'을 통해 일본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최근 일본에서 황혼이혼이 급증하며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그 대안으로 제시한 개념이라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결혼도 졸업하는 시대', '이혼인 듯, 이혼 아닌 이혼 같은 졸혼시대' 등의 뉴스가 나오며 화제가 되고 있다.
배우 백일섭(73)씨가 대표적이다. 백씨는 지난해 11월 모 방송 프로그램에서 졸혼을 고백했다. "결혼을 졸업한다는 마음으로 전남 여수로 내려가 바다낚시를 즐기고 있다"며 "일흔이 넘어 시작한 싱글 라이프지만 불편함 없이 여유로운 삶을 만끽하고 있다"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지난해 11월 종영된 드라마 '공항가는 길'에서도 극중 주인공 부부가 인생의 두 번째 사춘기를 겪으며 졸혼의 모습을 보여줬다. 또 같은해 12월에 종영된 예능 프로그램 '미래일기'는 연예계 잉꼬부부로 소문난 이봉원·박미선 부부가 졸혼 생활을 가상하는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자료=듀오(Duo)휴먼라이프연구소 2017 혼인 이혼 인식 보고서 <그래픽=김범준 기자> |
결혼정보회사 듀오와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가 공동 운영하는 듀오휴먼라이프연구소는 지난달 25일 전국 25세 이상 39세 이하 미혼남녀 1000명(남 502명·여 49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2017 혼인 이혼 인식 보고서'를 공개했다.
전체 응답자의 46.9%는 10년 후 '사실혼(동거)'이 결혼을 제치고 보편적으로 성행할 것이라고 답했다. 계약 결혼(9.1%)과 졸혼(8.1%)을 선택한 응답자도 적지 않았다.
특히 '졸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질문에 응답자의 39.2%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남성(38.5%)에 비해 여성(40.0%)이 소폭 높았다. 육아와 가사노동까지 도맡는 여성들이 남편을 위하는 삶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살고 싶은 욕구가 보다 크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또 고소득일수록 졸혼에 긍정적이었다. 연소득 2000만원 미만의 경우 남성은 100점 만점에 49.4점, 여성은 50.5점으로 평가했다. 연소득 5000만원 이상에서는 58.5점과 69점으로 각각 나타났다.
졸혼은 이미 젊은 세대에 자리 잡힌 혼밥(혼자 밥먹기), 혼술(혼자 술마시기) 같은 트렌드와 무관하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다른 사람과 부대끼는 생활을 힘들어하는 젊은 세대가 가족과도 거리감을 둔 채 느슨한 유대관계를 추구하면서 '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졸혼이라는 단어가 없었을 뿐, 사실상 '졸혼 부부'는 이전부터 존재했다. 각방을 쓰면서 '쇼윈도 부부'로 살거나, 평소 따로 살다가 명절이나 집안 경조사 때만 만나는 경우 등이다.
이미 많은 장년·노년 부부들이 졸혼 생활을 하고 있다. 남편은 귀농해 지방에서 생활하고 아내는 서울에서 지내는 경우, 자녀의 교육 때문에 해외에 처자식을 보내고 남편 홀로 지내는 '기러기 부부' 케이스 역시 넓은 의미의 졸혼이라 할 수 있다.
선한승 한국노동교육원 원장은 "한 조사에 의하면, 졸혼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 중 졸혼 시기에 대해 '지금이라도 당장'을 선택한 응답자는 10%, '은퇴 무렵 어느 정도 자금을 모았을 때'는 7%가 나왔다"고 밝혔다.
또 "졸혼을 원하는 이유로 '늦게나마 자아실현을 하고 싶어서'가 14%로 가장 많았고, '배우자 혹은 가족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답변도 10%를 차지했다. 또 황혼이혼의 대안이 될 수 있겠다는 대답도 19%나 나왔다"고 했다.
선 원장은 "졸혼이 권태기를 극복하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며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고 각자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준다는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 졸혼 이후 오히려 배우자와 사이가 좋아지는 경우도 있다. 일본의 탤런트 시미즈 아키라 씨는 "2013년에 아내와 졸혼한 후 오히려 아내의 소중함을 재인식했다"고 밝힌 바 있다.
물론 졸혼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일각에서는 "내가 이러려고 결혼했나, 자괴감 든다", "말이 졸혼이지 사실상 부부 관계가 끝난 것과 뭐가 다르냐" 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강학중 가정경영연구소 소장은 뉴스핌과 통화에서 "현재 행복하게 사는 부부들이 더 행복해지기 위해 졸혼을 선택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며 "가정의 불화를 졸혼으로 미화하면서 마치 쿨하다고 하는 것은 본질을 호도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졸혼이 대두되는 현상에 대해 강 소장은 "가치관이 바뀌고, 100세 시대가 되면서 그런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이혼의 차선으로 졸혼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부부는 노년에 의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대상"이라고 말했다. 또 함께 살면서 얼마든지 서로 취미와 관심사를 존중해주는 등 충분히 아름다운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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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핌 Newspim] 김범준 기자 (nunc@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