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글 김세혁 기자 사진 이형석 기자] 변화무쌍한 연기파 박혁권(45)이 느릿하고 담담한 특유의 색깔로 돌아왔다. SBS ‘펀치’(2014)를 함께 했던 선배 조재현(51)의 ‘나홀로 휴가’를 통해서다. 이 영화에서 박혁권은 불륜을 저지르는 남자 강재를 연기하며 여성 관객의 공공의 적이 돼버렸다. 박혁권 고유의 무기력한(?) 연기가 돋보이는 강재는 아내 몰래 만난 시연(윤주)을 10년이나 잊지 못하고 방황하는 못난 사내다.
“‘나홀로 휴가’는 남자의 사랑과 현실을 이야기해요. 강재는 사랑이란 감정과 현실 사이에서 혼란에 빠진 인물이죠. 제가 유부남이 아니다 보니 갑자기 다가오는 사랑에 강재처럼 빠져들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어요. 근데 나중엔 오히려 그럴수록 더 절실하겠구나 싶었죠. 그러면 안 되는 상황이기에 더 그렇지 않을까 공감이 갔고요.”
박혁권의 연기 덕이라고 할까. ‘나홀로 휴가’ 속 강재를 접한 여성들은 결혼이 싫어졌다며 진저리를 쳤다. ‘다시 태어나도 나와 결혼할 거예요?’라고 묻는 아내에게 ‘그럼’이라고 이야기하는 강재는 그 순간에도 시연을 떠올린다. 둘만의 은밀한 만남도 모자라 헤어진 뒤 10년이나 그 곁을 맴돈다. 과연 여자들이 증오할 만하다.
“제가 그렇게 미움 받고 있나요? 연기를 잘했다는 의미니까 일단 감사해요. 아빠 역이 좀 힘들었는데 조카처럼 대체할 대상을 찾으면 도움이 돼요. 그래도 몰입이 문제였죠. 결혼한 선배, 특히 조재현 감독한테 많이 물어봤어요. 사람은 강재처럼 대부분 집착이 있지 않나 싶기도 해요. 그래도 10년이나 스토킹하진 못하겠죠. 에너지를 그런 곳에 계속 쏟으면 몸이 상하지 않을까요. 담배처럼요. 전 강재처럼은 못할 거예요.”
결혼 이야기가 나온 김에 미혼인 박혁권의 결혼관이 궁금했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옹기종기 모여 사는지 가끔 신기하다”며 웃음을 터뜨린 그는 “아직은 자신이 없다”고 머리를 긁적였다.
“‘나홀로 휴가’ 때문에 결혼이 더 싫어진 건 아니에요. 다만 여전히 자신없어요. 부부라는 둘만의 관계를 계속 지속하려면 서로 좋은 걸 보여주기보다 싫어하는 걸 참는 게 중요해요. 어려운 일이죠. 영화에서 이준혁 씨가 이야기하는 결혼계약제가 그래서 공감이 가요. 부부관계 유지를 감당할 자신이 아직은 없답니다.”
‘펀치’에서 처음 박혁권을 만난 조재현은 그를 주인공으로 낙점(원래는 자신이 주연을 맡으려 했지만)한 뒤 ‘나홀로 휴가’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진짜 찍겠어?’라고 반신반의했던 박혁권은 그렇게 조재현의 감독 데뷔작에서 주연을 맡았다. 30년 가까운 경력에 연기 잘하기로 소문난 조재현. 그의 앞에서 연기한 박혁권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의외로 편했어요. 워낙 합리적인 사람이거든요. 감독이 배우 입장에서 생각하기에 뭐가 불편한지 움직이는 거 보면 딱 알더군요. 저에 대해서 연구한 거 같았거요. 저 역시 굳이 ‘잘 해야겠다’ 강박도 없어서 여러모로 좋았죠. 근데, 선배가 다음에 또 영화 하자면 이번엔 대본을 좀 보려고요. 하하.”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졌던 지난여름, 박혁권은 정말이지 오랜만에 휴식을 택했다. 머릿속을 싹 비우고 몸을 쭉 펴고 오로지 쉬는 데 시간을 썼다.
“지난 3월 말 SBS ‘육룡이 나르샤’ 끝낼 당시 무조건 쉬어야지 결심했어요. 게다가 올여름은 되게 더워서 뭘 하기도 싫었고요. 이 머리요? 보통 배우가 머리를 기르면 작품 때문인데 전 아무 것도 안 해서 길어진 거예요. 폭염에 영화 찍는 사람들 보면서 ‘야, 고생 좀 하겠다’ 묘한 쾌감이 들었죠. 주차장에 남 차 긁힌 거 보면 약간 기분이 좋아져요. 제가 좀 그런 사람이에요.”
극중에서 강재가 시연네 집 안방 장롱에서 겪는 심리변화는 매우 인상적이다. 그가 장롱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장면은 ‘나홀로 휴가’ 중 단연 베스트신. 혹자는 여자가 헤어진 뒤 과거를 깨끗하게, 그리고 빨리 잊는다고 강조하지만 남자 역시 매우 현실적일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오가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오는 재미가 큰 장면이에요. 10년간 스토킹한 여자의 집 장롱에 갇힌 게 참 웃기면서도 슬프죠. 따지고 보면 강재 캐릭터 자체가 그래요. 엔딩에서도 시연을 우연히 다시 마주치지만 아내가 옆에 있어 티를 못내죠. 그런 웃지 못할 상황을 조재현 감독이 의도한 것 아닐까 합니다.”
이번 영화에서 박혁권은 특유의 무색무취 연기색깔을 보여준다. 가수 이승열의 ‘돌아오지 않아’ 뮤직비디오 속 이미지를 오랜만에 만나는 셈이다. 물론 길태미(육룡이 나르샤)나 준형(밀회)처럼 도드라지고 음흉하며 파격적인 박혁권도 좋지만, 본래의 그를 만난다는 건 팬으로서 분명 반가운 일이다.
“일부러 그렇게 힘 빼고 연기하는 건 아닌데. 아, 생긴 것도 약간 작용하는 것 같아요. 이쪽 일 하는 사람치곤 잘생긴 얼굴이 아니잖아요. 개성이 강한 마스크가 아니다 보니 여기다 놓아도 묻히고 저기다 놓아도 묻히죠. 그런 게 지금은 제 색깔이다, 장점이다 칭찬이 됐지만 예전엔 콤플렉스였어요.”
[뉴스핌 Newspim] 글 김세혁 기자 (starzooboo@newspim.com) 사진 이형석 기자 (leehs@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