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우 감독의 데뷔작 '해피엔드'의 스틸 <사진=CJ엔터테인먼트> |
[뉴스핌=김세혁 기자] 얼마 전 정지우 감독의 ‘침묵의 목격자’(가제)에 대세 류준열이 합류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문득 ‘해피엔드’(1999)가 떠올랐던 건, 올 초 감독의 신작에 최민식이 출연한다는 이야기를 접했기 때문이다. 세기말 특유의 불안한 분위기와 닮은 이 작품은 ‘쉬리’(1998)로 스크린을 접수한 최민식과 당시 주목 받던 전도연, 그리고 신예 주진모가 출연한 치정극이었다. <스포일러를 다수 포함하고 있음>
◆영화 ‘해피엔드’의 기본정보
스토리 : 구직자 남편과 영어학원 원장 아내, 그리고 그의 옛 연인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다. 아내의 불륜을 참고 넘어가려던 남편이 어린 딸이 방치되는 상황을 참지 못하고 살인을 실행하면서 영화는 비극적 막을 내린다. 제목이 내용과 정반대인 '해피엔드'인 것을 놓고 다양한 해석이 쏟아졌다.
스코어 : 서울에서 45만6071명, 전국 73만 관객을 모으며 흥행에 성공했다. 특히 한 해 전 개봉한 히트작 '쉬리' 속 주연 한석규와 최민식의 대결이 주목을 받았다. 한석규는 '해피엔드'보다 한 달 먼저 개봉한 '텔 미 썸딩'으로 대결구도를 형성했다. '텔 미 썸딩'은 서울 68만5935명, 전국 123만 관객을 모았다.
감독 : 정지우는 이 영화로 첫 장편영화 연출에 도전했다. 각본을 함께 담당했으며, 올해 개봉한 '4등'으로 녹슬지 않은 연출실력과 날카로운 분석력을 보여줬다. 최민식, 류준열, 박신혜, 이수경이 출연하는 법정 스릴러 '침묵의 목격자'를 준비하고 있다.
◆‘해피엔드’를 구성하는 캐릭터들
영화 '해피엔드'의 주인공들. 사진 위로부터 최민식, 전도연, 주진모 <사진=CJ엔터테인먼트> |
서민기(최민식) : 은행을 그만둔 아이 아빠이자 구직자. 돈 버는 아내의 구박에 자존심이 상하지만 오늘도 이력서를 쓰며 희망을 건다. 좀처럼 일자리가 잡히지 않아 늘 초조하다. 우연히 목격한 아내의 불륜을 참고 넘어가려던 중, 딸의 분유에 개미가 섞인 걸 보고 분노가 폭발한다.
최보라(전도연) : 대형 영어학원 원장. 남편 몰래 옛 연인 김일범과 바람을 피운다. 어린 딸 생각에 눈물을 흘리고 은근히 죄책감을 느끼지만 김일범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고 의심하는 이중적 캐릭터. 끝내 가정으로 돌아가려 하나, 집 앞까지 찾아온 애인과 만나기 위해 분유에 수면제를 타 넣는 모순적인 인물이다.
김일범(주진모) : 최보라의 예전 연인. 군입대를 계기로 헤어졌다. 홈페이지 작업을 하는 사진작가로, 최보라가 서민기와 이혼하기를 갈망한다. 갈수록 집착이 심해져 최보라의 아파트까지 찾아가는 대담함을 보여준다. 결국 서민기의 덫에 걸려 최보라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된다.
◆세기말 닮은 치정극…파격적 정사+남편의 계획살인
'해피엔드'에서 최민식이 보여주는 상반된 이미지. 알리바이를 위해 태연하게 기차에 올라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장면(위)과 죽은 아내 사진을 태우다가 오열하는 신이 대비된다. <사진=CJ엔터테인먼트> |
어두운 내용과 대비되는 제목을 붙인 ‘해피엔드’는 보는 이에게 묘한 아이러니를 남긴다. ‘사로’와 ‘생강’을 내놓은 정지우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32세였던 정지우는 이 영화의 각본도 담당했다. 톱스타 최민식과 전도연을 기용한 그는 작정한 듯 파격의 끝을 보여준다. ‘생강’보다 밋밋하다는 평도 있지만 세기말의 불안함을 닮은 아슬아슬한 전개가 인상적이다.
당시 ‘해피엔드’가 관객의 관심을 끈 가장 큰 이유는 정사신이었다. 전도연과 주진모가 영화 속에서 몇 차례 보여주는 정사신은 파격 그 자체로 받아들여졌다. 한 달 뒤 개봉한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만큼은 아니지만 리얼한 상황묘사 탓에 실제상황이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돌았다.
더욱이 영화는 남편 서민기의 철저한 계획살인을 담아 관객을 충격에 몰아넣었다. 서민기는 분유를 타려다 개미가 섞인 걸 보고 아내를 증오하기 시작한다. 사실 그는 아내의 불륜을 눈치 챈 직후 화를 내거나 들추지 않고 비밀리에 조사를 진행한다. 용서따위 없이 이미 복수를 작정한 사람처럼. 아내 차에 남겨진 톨게이트 영수증, 심지어 차가 어디를 몇 km나 달렸는지까지 파악한다. 결국 집안까지 불륜남을 끌어들인 상황을 목격한 그는 현장을 덮칠 수 있었음에도 조용히 자리를 피한다. 분노를 억누르며 침착하게, 그리고 치밀하게 아내를 처치한 서민기는 아무렇지 않게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일면 최보라를 그리며 오열한다. 사이코패스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OST
‘해피엔드’의 OST는 조영욱 감독이 담당했다. ‘아가씨’를 비롯해 ‘대호’ ‘내부자들’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클래식’ 등에서 수완을 과시했다.
슈베르트 피아노 트리오 D.929 2악장 안단테 콘 모토(Andante con moto) : ‘해피엔드’를 대변하는 곡으로 주로 서민기 파트에서 흐른다. 불륜을 저지른 아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고민하는 서민기의 심정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가정과 불륜 사이에서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전도연의 줄타기를 묘사하기에 이만한 곡도 없을 듯하다. 이래저래 이 영화가 흥행할 수 있었던 데는, 슈베르트의 명곡이 일조한 바 크다.
그래험 내쉬 ‘프리즌 송(Prison Song)’ : 영화의 막이 오르면서 등장하는 OST. 비록 인트로 부분만 나오다 말지만, 특유의 관조적인 멜로디가 영화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미리 이야기하는 듯하다.
작은 꽃(Petite Fleur) : 아내를 살해한 서민기가 태연히 일상으로 돌아오는 순간 나오는 곡. 90분 넘게 객석을 불편하게 몰아붙인 영화가 마지막에 슬쩍 내놓는 위로 같은 곡이다.
◆‘해피엔드’가 담은 세기말…어두웠던 사회상
‘해피엔드’가 개봉한 1999년 말은 ‘밀레니엄’ ‘새천년’이라는 용어가 사회적으로 크게 유행했다. 2000년으로 넘어가는 이 시기, 컴퓨터가 시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금융사고 등 대규모 재앙이 벌어지리라는 위기론이 팽배했다. 돌이켜보면 괴담에 가까운 이야기였지만, ‘해피엔드’는 당시의 불안한 사회상을 치정에 덧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또 1999년은 대규모 아파트에 아직 CC(폐쇄회로)TV가 설치되기 전이었다. 최민식이 세운 모든 살인계획들은 CCTV가 없었기에 실행 가능했다. 그의 알리바이의 시작점은 은사의 장례식인데, 만약 CCTV가 있었다면 문상을 간다며 서부역까지 후배 이미영(황미선)을 데리고 가지도 않았을 거다. 이 부분부터 알리바이가 깨지기 때문이다. 참고로 CCTV는 범죄수사에 효과가 입증되면서 2000년대 이후부터 확산됐다.
◆'해피엔드'의 명대사이자 유일한 웃음코드
“파고다공원이 아니라 탑골공원이거든.”
일자리 없이 논다며 구박하는 아내의 말에 반박하는 최민식. 파고다공원이 아니라 탑골공원이라며 대화 속 오류를 잡아준다. <사진=CJ엔터테인먼트> |
99분짜리 영화 ‘해피엔드’는 분위기 상 웃음을 유발하는 신이 거의 없다. 그나마 최민식이 아내 전도연과 말다툼을 하다 내뱉는 이 대사가 유일한 유머다. 은행을 그만두고 일자리를 구하는 서민기는 책방에서 소설을 탐닉하며 모진 현실을 부정하는 캐릭터. 샌님 기질이 있어서 규범에 어긋나는 것을 도무지 참지 못한다. 잘나가는 영어학원 원장 최보라에게 잔소리를 듣고 자존심이 구겨진 상황에서도 끝내 파고다공원을 탑골공원이라고 정정하는 장면은 서민기의 독특한 캐릭터를 잘 보여준다.
◆여전히 회자되는 명장면
계획살인 : 아내의 불륜을 꾹꾹 눌러 참던 서민기는 최보라를 살해할 때 비로소 미친 듯 분노를 표출한다. 칼로 거의 난도질하는 수준이다. 숨이 끊어진 걸 확인한 뒤에도 시신에 대고 칼질을 하는 장면에서 서민기의 깊은 분노를 느낄 수 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누군가의 조등을 마주하는 최보라(전도연) <사진=CJ엔터테인먼트> |
망자의 조등 : 최보라는 잔인하게 살해된 뒤, 영화 말미에 어쩐 일인지 아파트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운다. 이미 죽은 그는 복도식 아파트 저 밑에서 바람에 살랑살랑 떠오른 조등(장례를 알리는 등불)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손을 뻗어 잡으려던 순간, 창틀에 걸렸던 끈이 풀리면서 조등은 하늘 멀리 날아간다. 최보라의 회상신으로도 해석 가능한 이 자면은 망자가 된 최보라가 다름 아닌 자신의 조등과 마주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분유에 수면제를 타는 신 : 최보라는 남편이 카센터로 간 뒤 술에 취한 김일범이 찾아오자 당황한다. 어린아이를 두고 나갈 수 없다고 버티던 그는 서랍에서 수면제를 꺼내 분유에 탄다. 아이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생각에 눈물을 떨구며 '섬집아기'를 부르는 전도연의 내면연기가 압권이다.
[뉴스핌 Newspim] 김세혁 기자 (starzooboo@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