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 포스터 <사진=㈜토호> |
<본 기사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 2014
-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바이쇼 치에코(소피 목소리), 기무라 타쿠야(하울 목소리), 캘시퍼(불꽃 악마)
- 어느 날 소피는 마녀의 저주를 받고 할머니가 된다.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머물던 곳을 떠나게 되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들어가게 된다. 청소부가 되어 미소년 하울과 동고동락을 하면서 다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게 되고 하울과 점점 가까워지는데…
누군가가 나에게 특별한 영화를 물어오면 나는 언제나 서슴없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라는 만화영화를 꼽는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 나는 이 영화가 왜 나에게 특별한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저 거장의 작품이기 때문에, 그 천재성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했다.
그게 무엇이었을까…
나는 이 영화를 처음 접했던 순간부터 수십 번 영화를 보고 또 보았다. 어쩌면 나는 영화에서 해석되지 않았던 장면들을 무의식적으로 머릿속으로 재생해 봤을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답이 나를 찾아왔다. 내 기억에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는 영화 속 한 장면이다. 소피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이동 가능한 ‘하울의 성’에 입성한 후, 타이머를 돌리고 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왁자지껄한 시장 통부터 아름다운 정원, 황량한 벌판까지 신기하게도 다양한 장소들이 펼쳐진다. 소피가 여느 때와 같이 타이머를 돌리고 문을 열자 화창한 봄날의 초원이 있다. 모처럼 신이 난 소피와 마루쿠쿠, 허수아비, 그리고 정체모를 강아지가 신이 나서 뛰어 나간다.
햇살 좋은 한 낮, 빨래를 널어놓고 맛있는 점심을 먹는 장면은 기분을 상쾌하게 만든다. 잠시 후, 마루쿠쿠와 소피가 의자에 앉아 초원과 초원의 끝닿은 곳에 조용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던 장면이 연출된다. 그리고 더 시간이 흘러 소피 혼자 망연히 앉아 있는 뒷 모습이 비춰진다. 누군가에게는 그냥 잠시 스쳐지나갈 만한 이 장면이 왜 나에게는 오랜 시간 각인되어 있었던 것일까? 그 이유는 소피의 뒷모습에서 나는 나의 20대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내리는 눈물의 의미를 영화를 처음 접하고 십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20대 초반 때, 나는 가슴이 답답하고 벅차오를 때마다 빈 공터에 앉아 있기를 좋아했다. 푸른 잔디가 펼쳐진 공터에 앉아 하루 종일 그 잔디를, 허공을 바라보면 파편화된 나 자신의 조각들을 하나 하나 끼워 맞출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는지도 모르게 하루가 저물곤 했다. 해가 기울고 노을이 지기 시작할 때까지 하염없이 누군가가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고 위로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 덕에 외로움과 고독감 그리고 두려움을 오롯이 견딜 수 있었다. 한동안 바쁘게 살며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의 한 장면이 나를 그렇게도 많이 흔들어 놓을 줄 몰랐다.
소피는 왜 갑자기 늙어버렸을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설정은 황당하다. 그렇지만 영화를 보면서 그런 황당함은 오래 가지 않는다. 그 의미를 왠지 알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나도 스무살 시절에 빨리 늙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으며, 나에게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전혀 지도가 없었다.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열패감과 무기력감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었다.
어떤 이들은 20대 초반까지를 청소년기 후기로 보도 하는데, 이 시기에는 자아정체성을 형성하고 앞으로 일어날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준비해야만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아직 마음의 준비도, 충분한 경험도 없는 나이에 진로, 결혼 등 중대한 사안을 결정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 때문인지 소피는 자신이 할머니가 된 사실에 충격을 받지만 곧 이를 수용한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아름답지만 스스로 아름답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20대를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20대에는 그 시절이 아름답게 느껴지지만은 않다. 하고 싶은 것은 많지만 할 수 있는 능력은 없기에 늘 엎어지고 좌절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20대는 아름다운만큼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시기이기도 하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인한 상이 아닌 것처럼,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인한 벌이 아니다." (정지우 감독의 영화 '은교' 속 대사)
20대 초반 때 한 수필집에서 읽은 것으로 기억되는 희랍신화에 등장하는 무녀의 이야기를 하나 소개한다. 이름 꽤나 알려진 한 무녀가 신들의 만찬에 초대되고 제우스 앞에 서게 된다. 제우스는 무녀에게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녀는 영원한 삶을 이야기하고 제우스는 그에 화답하여 그녀의 손안에 든 먼지만큼의 시간을 선사한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는 무궁한 시간을 의미한다. 그녀는 소원대로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생명을 선사 받았고 자신의 소원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잊은 것 한 가지가 있었다. 그 치명적인 실수로 그녀는 살아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영원의 삶을 살게 된다. 그녀가 놓친 그것은 바로 ‘젊음’이었다. 젊음 없는 장수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젊은 무녀는 그때는 그 젊음의 위대함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이처럼 젊음은 한번 흘러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고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순간순간 깨어 있으면서 우리는 현재의 삶을 즐기는 방법을 알아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나이를 먹고 있는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이와 반대로 영화가 진행되면서 소피는 점점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가면서 점점 원래 자신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나이가 들고 성숙하면서 자기다워지고 자기 자신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영화는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 ‘은교’ (2012) 대사 일부
박소진 한국인지행동심리학회장(′영화 속 심리학′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