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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CGV아트하우스> |
- 2015.04.29 개봉
- 감독 한준희 /출연 김혜수(엄마), 김고은(일영), 엄태구(우곤)
지하철 보관함 10번에 칸에 버려진 아이(김고은)는 한 거지에게 발견되고 그 이후 ‘10’을 문자 그대로 읽어 이름이 ‘일영’이라 불린다.
일영은 어느 날, 부패한 경찰에게 이끌려 쓸모 있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차이나타운의 대모(김혜수)를 만난다. 부모도 없고 출생신고도 안되어 있는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와 쓸모 있는 아이들만 자신의 식구로 키우며 차이나타운을 지배하는 마우희, 그녀는 사람들에게 ‘엄마’로 불린다. 오직 쓸모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고 돈을 빌려주고 사람의 목숨을 사는 이 여자에게 ‘엄마’라는 호칭은 참으로 묘하다.
그녀가 언제부터 ‘엄마’로 불렸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그녀에게도 그녀가 ‘엄마’로 불렀던 존재가 있었다는 것과 그 엄마를 자신이 죽였으며, 언젠가 그녀도 그렇게 죽임을 당할것이라는 묘한 암시가 이 영화의 후반부에 드러난다.
일영은 그런 엄마에게 인정받기 위해, 유일하게 자신을 받아준 엄마에게 일영은 혼신의 힘을 다해 충성하지만, 석현을 만나면서 그녀의 세계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단 한번도 경험한 적 없는 따뜻하고 친절한 세상이 있다는 것을 그를 만나기 전엔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일영의 마음을 안 것인지 엄마는 일영을 시험하고 결국 두 사람은 극한의 대결을 펼치게 된다.
일영은 엄마에게 자신이 아직도 쓸모 있음을 증명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세상으로 떠나기 위해 엄마(기존의 세계)를 버릴 것인가?
이름만으로도 아름답고 섹시한 여배우 김혜수는 민망할 정도로 적나라한 민낯을 내보였고 이는 처음엔 낯설게 느껴졌다. 시종일관 무표정한 표정과 대사에서 암울함, 무기력함, 슬픔과 분노가 드러났다.
처음에 이 영화가 극도로 무기력하고 우울한 우리들의 내면을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기력과 우울함 뒤에 가려져 있었던 극도의 분노는 어디로도 해소할 수 없고 탈출구 없는 우리들의 삶의 어두운 측면을 보여준다.
이 분노는 결국은 아무런 죄도 없고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대상에게로 표출된다. 분노는 어딘가에 누군가에게는 표출되야 하기 때문이다. 우울한 사람들은 그저 무기력하고 슬픔에만 빠져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우울감이면에는 ‘분노’가 도사리고 있다. 극한의 분노는 때로는 스스로와 세상 모두에게 향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위험에 빠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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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CGV아트하우스> |
“너는 왜 바라보기만 하고 도와주진 않니? 너도 쓸모 없어지면 죽일 거다.”
엄마의 자궁은 태아에게는 완전한 하나의 세계이다. 그러나 그 순간은 10개월에 지나지 않는다. 곧 태아는 엄마의 자궁에서 세상 속으로 나오게 되고, 원튼 원하지 않든 살기 위해 원래 있던 곳을 탈출 해야 한다. 태어나려는 자는 자신이 속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하는 숙명을 지닌다.
그런 의미에서 차이나타운은 엄마의 자궁과도 같이 은밀하고 보호된 세계이며, 우리의 하늘 아래 같이 존재하면서도 우리의 영향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치외법권 하에 있는 묘한 지점을 의미한다.
마우희는 우리가 아는 그런 엄마가 아닌 절대 권력을 가진 최고의 권력자로 군림한다. 어린 아이에게 엄마는 신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죽인 엄마의 제사를 지내는 엄마 마우희는 결국 자신을 죽이고 자신의 자리를 대신해줄 누군가를 기다린다.
여기서 죽음은 종말을 의미하며, 종말은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진다. 엄마는 자신을 대신할 누군가(일영)의 등장은 자신의 죽음을 의미함에도 슬퍼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묵묵히 자신의 책무를 다한 사람이 가진 시원섭섭한 그런 심정일지도 모른다.
죽음으로써 자유로워지고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아이러니가 차이나타운이 가지고 있는 비밀이며 이는 우리의 삶의 비밀스러움이기도 하다.
박소진 한국인지행동심리학회장(′영화 속 심리학′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