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글 장주연 기자·사진 이형석 기자] 2년 전 겨울, 배우 김규리(36)는 명필름 심재명 대표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명필름의 심재명입니다”는 인사가 들려왔고 그는 대뜸 “임권택 감독님 영화 이번에 만드시죠. 진심으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건넸다. 심 대표는 김규리의 감사(?) 인사가 끝나고 나서야 임권택 감독의 신작 캐스팅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김규리에게 임권택 감독은 그런 존재다. 존경해 마땅치 않은 사람이자 지금껏 그래 왔듯 오랜 시간 충무로를 지켜줬으면 하는 감독. 이 말인즉슨 그에게는 영화 ‘화장’(제작 명필름, 배급 리틀빅픽처스)의 캐스팅 제안을 고민할 필요도,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는 의미다.
김규리가 지난 9일 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영화 ‘화장’을 선보였다. 지난 2004년 제28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김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화장(火葬)과 화장(化粧)이란 서로 다른 소재와 의미를 통해 아내와 젊은 여자, 두 여자 사이에서 번민하는 한 중년 남자의 심리를 그린 작품이다. 김규리는 극중 오상무(안성기)를 흔드는 건강하고 젊은 여인 추은주를 연기했다.
“요즘 긴장을 너무 많이 해서 감기가 낫지를 않네요(웃음). 신인 때도 이렇게 긴장을 안 했는데 이상해요. 확실히 이 작품은 제게 뭔가 다른 느낌이죠. 촬영하면서 감독님이 저에게 많이 맡겨주셨거든요. 그래서 더 잘하고 싶고 더 어렵죠. 어떤 대중의 평가에 대한 부담은 아니에요. 그거보다도 임권택 감독님의 마음에 쏙 들면 아주 좋겠다는 생각이 크네요.”
임권택 감독의 오랜 팬을 자청한 김규리는 인터뷰 시작부터 임 감독을 향한 무한 존경심을 드러냈다. 처음 함께 작업한 영화 ‘하류인생’ 이야기부터 임 감독이 지난 2013년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공연을 보고 자신을 캐스팅한 일화까지 아낌없이 털어놨다. 중간중간 임 감독의 말투를 흉내 내는 김규리에게서 소녀 같은 설렘과 팬심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전 감독님이 행복해하시는 게 좋아요. 여력이 되신다면 계속 작품을 만들어주셨으면 좋겠죠. 우리 아버지 같으세요. 실제로 감독님 첫째 아들이 저랑 동갑이기도 하고요. 그러다 보니까 그냥 감독님 옆에 서면 나도 모르게 자식이 되고 그런 마음으로 대하게 돼요. 근데 또 현장 가면 호랑이같이 에너지가 넘치시거든요. 전 제가 어떻게 한국 영화 역사상 가장 중요한 분과 두 작품을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니 불러만 주신다면 무조건 달려가야죠. 망설일 시간이 어디 있어요(웃음).”
극중 김규리가 열연을 펼친 추은주에 대한 설명을 좀 더 곁들이자면 그는 30대 초반의 화장품 회사 마케팅부서 대리이자 오상무의 열정을 깨우는 여인이다. 오상무 생의 한가운데 빛나는 여자, 추은주는 살아있음을 표상하는 영화의 ‘꽃’ 같은 존재다.
“다 만들어주니까 꽃이 된 거죠. 잎사귀 없는 꽃이 과연 예뻐 보이겠어요? 초라하죠. 스태프와 감독님이 예쁘고 아름답게 보일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해줬어요. 탱글탱글한 잎사귀를 많이 만들어 주신 거죠.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이 모든 사람이 나를 아름답게 만들어주려고 찍어주려고 했을 때 이걸 충분히 즐기지 못했다는 거예요. 너무 잘하고 싶은 마음에 스스로 복잡하게 만들고 어렵게 갔던 거죠.”
스스로는 즐기지 못했다지만 어찌 됐건 그런 김규리의 노력 끝에 스크린 속 추은주는 그 누구보다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물론 같은 이유로 일각에서는 ‘추은주가 오상무에게 여지(?)를 둔다’는 평이 따르기도 했다. 하지만 김규리는 “그건 아니다”며 오상무를 향한 추은주의 마음은 이성적 감정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오상무를 향한 추은주의 마음은 존경심이죠. 전 사랑에 여러 모습이 있다고 생각해요. 존경심도 그중 하나고요. 회식 장면 촬영하면서 안성기 선배의 얼굴을 모니터로 보는데 너무 매력적이시더라고요. 근데 그게 이성인 감정은 아니잖아요. 존경심이죠. 그때 생각했어요. ‘그래, 존경심도 사랑의 일종이야’라고요. ‘하류인생’ 촬영 당시 제가 감독님께 모든 걸 흡수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추은주도 오상무에게서 그런 감정을 느낀 거겠죠.”
실제 김규리는 인터뷰 내내 임권택 감독과 안성기, 아내를 연기한 김호정에게 연신 존경의 뜻을 내비쳤다. 반면 자신을 향한 칭찬에는 고개를 저으며 “전 그냥 감독님과 선배들에게 묻어간 거”라고 스스로를 낮췄다. 그러나 관객은 분명히 알고 있다. 김규리였기에 추은주의 아름다움이 강렬하게 표현될 수 있었다는 것을.
“전 이상하게 영화를 보면서 추은주와 아내를 동떨어지게 생각 못하겠더라고요. 추은주라는 내 캐릭터만 보이는 게 아니라 같은 여자로서 연장되는 느낌이었죠. 저 역시 앞으로 걸어가는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생각 끝에 그런 결론을 내렸어요. 오늘 이 시간을 최선을 다해서. 나를 위해서 즐겁게 살아내자고요. 물론 아직도 성장통을 겪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겠죠. 하지만 저를 환기하고 다잡으면서 매 순간 즐기려고요. 그런 말도 있잖아요. 즐기는 자가 진정한 챔피언!(웃음)”
[뉴스핌 Newspim] 글 장주연 기자 (jjy333jjy@newspim.com)·사진 이형석 기자 (leehs@newspim.com)